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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요 때문에 고생 참 많이 했지-박기서(초대 마수리 농요보존회장) 씨가 말하는 1972년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 대통령상의 추억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E020103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마수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상기

박기서(초대 마수리 농요보존회장) 씨는 1972년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 대통령상 수상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마수리 농요가 1969년 방송을 탔다면, 1971년부터 1972년까지는 마수리 농요가 공개석상에서 인정을 받는 일이 벌어졌다. 박기서 씨의 기록에 따르면 1971년부터 충북도에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1972년 10월에 제13회 전국 민속예술 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탔기 때문이다. 당시의 일을 박기서 씨의 구술과 기록을 통해 재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71년 어느 날 충청북도 공보실 조계장이 우리 동네에 출장을 와서 이장인 박기서를 찾았다. 그는 “아무 장소에서 무슨 노래 부른 적이 있느냐?” 고 물었고, 박기서는 “있다더라” 하고 대답을 했다. 그러자 “그분이 여기 있습니까?” 라고 물었고, 박기서는 “있는데 지금 일 나가고 없다” 고 대답했다. 그는 “통지를 하면 도청으로 올 수 있는지” 를 물었고, 박기서는 “나날이 품 팔어 먹는 사람이라 그렇게 될지 모르겠다” 고 말하고는 헤어졌다.

그런데 그해 가을 도청에서 다시 공문이 와서 지남기 씨가 청주에 가게 되었고 예총 사람들 앞에서 들에서 부르던 그 노래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들은 “예, 청이 참 좋습니다” 라고 화답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2년 가을 다시 도에서 “중원 마수리 농요팀을 구성해 10월 15일까지 도청으로 오라” 는 공문을 보내왔다. 영세민을 추려서 12명의 단원으로 청주에 갔고, 그때 도에서 나와 국악협회로 안내했다. 당시 국악협회장은 윤영남 씨였다. “당시 국악협회에 가보니 잡색과 무당들이 뚱땅거리구 노는 모습이 가관시럽구 변만시러워 우리가 도깨비에 홀린 건가하고 의심을 했다” 고 한다. 조금 있자 도의 관계자가 영동으로 데리고 가는데 국악협회 사람 20명, 마수리 사람 12명으로 모두 32명이었다. 영동에서는 영동여고 2학년 학생 70명을 지원받아 농요팀을 만든 다음 합숙을 하면서 일주일 동안 연습에 들어갔다. 당시 지도와 조언을 해준 사람은 청주교대의 박진 교수와 청주대의 김용진 교수였다.

공보실 직원으로부터 농요의 명칭을 조금 더 지명도가 높은 ‘탄금대 방아타령’으로 정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일주일의 연습 후인 10월 21일 기관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종합적인 시연을 하게 되었다. 최종 점검을 받는 자리였던 것이다. 시연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잘 했습니다” 라는 소리가 나오고 격려금도 상당히 들어왔다고 한다. 대원들은 이에 눈이 휘둥그레졌고, 다음날 아침 8시까지는 대전역에 가야 한다는 소릴 들었다고 한다.

10월 22일 아침 대전역에 도착을 하니 도 공보실 직원과 예총 관계자 그리고 도내 인사들이 나와 농요팀을 격려해 주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경제적인 여유도 없고 운송수단도 마땅치 않아 역전에서 대전 공설운동장까지 걸어갔다고 한다. 거리가 꽤나 멀었지만 농악놀이를 하면서 행진해 갈 수밖에 없었단다. 당시 화암리 출신인 권태수 씨가 기수였는데, “키가 작고 도리 빵빵한 것이 기폭을 들고 거리를 뚫고 나가” 10시 30분에 시작하는 개회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마수리 농요 발표는 오후 2시로 잡혀 있었다. 2시가 되어 마수리 농요 팀은 40분간 발표를 하였다. 당시 공설운동장에 모인 사람들의 반응은 대단했는데, 공연이 끝난 후 공연단에 대한 대접은 별로 신통치를 않았다. 다음에 행해지는 공연들을 보지도 못하고 돌아와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의 일을 박기서 씨는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우리 탄금대 방아타령 팀이 일주일간 연습을 통해 갈고 닦은 기량을 40분 동안 시연하니 많은 방청객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어. 박수갈채도 대단했지만 환호하고 아우성치며 난리가 났었지. 그런데 도청 공보실 조계장이 오더니 우리 공연이 끝났으니 각자가 알아서 돌아가라는 거야. 원래 경연 일정이 3일이었거든. 속으로 이런 놈이 있나 하고 생각했어. 그때는 그게 엄청 서운했어. 그 말을 듣고 책임을 맡은 이장이 되어 11명 회원들과 상의를 했지. 그러자 박순석이 자기 누님 박용석이 이곳 대전에 사는데 그리로 가서 신세를 좀 지자고 말하는 거여. 우리 모두는 그 말을 따라 그리로 갔지. 가니까 고향 사람들이 왔다고 있는 음식 없는 음식 다 가지고 와서 우리를 대접하지 않겠어. 저녁을 푸짐하게 먹고 그때 8시 30분인지 9신지 충주 가는 열차가 있었어. 그래서 그놈을 타고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 아 그런데 이장이랍시고 12명과 함께 일주일간을 돌아다니고 나니 이게 도깨비에 홀린 건지 뭔지. 그리고 인간대접을 못 받은 거 같아 엄청 서운하기도 했어. 또 마침 그때가 가을 추수철이었거든. 추수할 일이 밀려 고생도 많이 했지. 3일 후에 결과가 발표된다고 하는데, 고생한 결과가 궁금해서 매일 저녁 라디오 뉴스에 귀를 기울였어. 아 그런데 라디오에서 입상이라고 하는 소리가 들리더라구. 우리가 1등을 했다는 거여. 충청북도 탄금대 방아타령이 최우수상이며 대통령상이라는 거였어. 그 뉴스를 듣는 순간 참으로 기쁘기 한이 없었고, 온통 축제분위기였지. 이틀 후에 도청에서 책임자인 이장과 지기선이 함께 상을 타러 오라는 통보를 했어. 그때 도지사가 태종학 씨인데 우리를 보고 어찌나 좋아하던지. 충청북도가 대회에 나가 일등 한 적이 없어서 그랬던 것 같아. 그러면서 숙원사업이 있느냐고 물어보는 거여. 그래서 우리가 그랬지 전기를 넣어 달라고. 당시 새마을 사업으로 농어촌 전기사업이 한창이었거든. 도지사가 농정과 실무자를 불러 사업 검토를 지시했고, 그해 겨울철 착공하여 이듬해인 1973년 전기가 들어오게 되었지. 석유 등잔불과 호롱불빛 아래 생활하다가 전깃불을 보니 그 얼마나 신기하고 놀랍던지. 라디오만 듣다가 TV를 보니 그 즐거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지. 농요로 해서 타 지역보다 앞당겨 문화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거여”

내친김에 상금에 대해서도 물었다. 박기서씨는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그때 대통령상 상금이 100만원이여. 그런데 예총 사람들이 이 상금은 거금이니 상장과 상금을 예총에서 관리하겠다고 말하는 거여. 그래서 상장도 보지도 못하고 상금은 10원 한 장도 만져보질 못했어. 그리고 보존회 조례를 만들어 지기선과 나를 임원으로 넣어주더군. 앞으로는 조례에 따라 보존회를 구성하고 운영기금은 상금의 이자로 한다는 거여. 그래선지 지기선에게 20만원인가 지원해 주는 것도 같았어. 마한 놈들 나중에 상장의 행방을 물으니 예총 회장도 바뀌고 사무실도 옮겨 다니는 바람에 잃어버렸다는 거여. 그래서 나중에 문화공보부에 가서 복사해다 놨지. 원본은 없어졌어”

이후 농요 활동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여쭈었다. 박기서 씨는 말씀하셨다.

“그 후 우리 마수리 농요가 전국적으로 알려졌고 곳곳에서 공연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오게 되었어. 그해 12월 10일경 동양방송(TBC)에서 우리 마수리 농요를 녹화해 방영하겠다는 거여. 이장을 책임자로 해서 지난 대회에 참여한 12명이 서울에 가게 되었지. 서울 나들이는 처음이라 별 준비도 못하고 갔어. 아침에 가서 어두워지도록 공연하느라 지쳤어. 끝나고 나니까 날이 침침한데 금일봉을 야차하게 많이 주더라구. 그날은 충주에 내려갈 수가 없어 숙소를 구해 하룻밤 묵었지. 이튿날 쓰고 남은 돈을 똑같이 나눠주었어. 그런데 돈이 생기니까 색안경을 끼고 보는 문제도 좀 생겼어. 내가 더 쓰는 건 아닌가 하는 거겠지. 그렇지만 그때부터 농요가 살아나기 시작했어. 공연일자는 정확히 생각이 안 나는데 엽연초 건조장 공연에 참여해달라는 부탁이 또 왔어. 우리는 3개팀(마수리, 국악협회, 영동여고)이 모여야 되어 어렵다고 했더니 농요만 해 달라는 거여. 그래서 또 공연을 했지. 이듬해인 1973년 10월 충청북도 청주에서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가 개최되었어. 전 해의 대통령상 입상팀인 우리가 식전 행사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지. 그래서 또 준비하고 연습하고 훈련해서 참가했던 기억이 나. 탄금대 방아타령으로 입상한 후 여기저기서 농요 소리를 들으려는 사람들이 우리 마을을 찾아 왔어. 그런데 국악협회 회원과 영동여고 학생들을 동원할 수 없는 게 늘 문제였어. 그러다 지남기 씨가 제안을 하는 거여. 우리 마을의 부녀자들을 동원하여 여성 노작팀을 만들자구. 그래 남녀 합해 50명으로 팀을 구성하고 지남기 씨가 중원 지방의 여성노동요를 수집하게 된 거지. 먼저 마수리에 살던 김금익 여사에게 자문을 구했어. 김금익 여사는 평소 장구도 치고 흥겨운 우리 가락을 좋아하던 분이었거든. 그래서 지남기 씨가 그분이 아는 노래 중 방아를 찧으며 부르던 노래를 채록하게 되었지. 그런데 그 가사가 조금은 야위고 상스럽고 속되더란 말여. 그래서 그중 일부만 수용하고 나머지는 지남기 씨가 들어 알고 있는 중원의 방아타령을 차용하게 되었지. 김금익 여사에게서 받은 가사가 ‘시집살이 못하면 친정살이 하지/ 술담배 아니 먹군 못살겠네. 시아버지 죽어서 좋아했더니/ 왕골자리 떨어지니 생각이 나네. 시어머니 죽어서 좋아했더니/ 보리방아 물붜노니 또 생각나네’ 정도여. 그러니까 여성 노작요는 김금익 여사의 방아타령 사설 15%에 중원 지역의 방아타령 사설 85%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거여. 이 여성 노작요가 완성된 다음에는 지남기 씨 지도하에 밤잠을 설쳐가며 연습을 했지. 그래서 우리 마을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마수리 농요팀이 구성되게 된 거여. 그런데 이 여성 노작요가 최근 기능보유자 지정 때문에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어. 그 뿌리를 찾기가 어렵다나 뭐라나. 뿌리니 전통이니 하는 게 다 뭐여. 사람이 만드는 거 아녀. 김금익 여사가 알고 있는 사설, 지남기 씨가 알고 있는 사설이 모두 전통에 뿌리를 둔 거 아니냔 말여. 그들을 통해 나온 노동요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닌데 전통성을 자꾸 이야기하면 어떻게 해”

이제 77세인 박기서 씨는 지난 36년간 마수리 농요를 만들고 이끌어 온 산 증인이다. 지금은 마수리 농요보존회 고문으로 물러앉았지만, 농요 시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처음 진행을 맡는 사람이 박기서 씨이다. 그의 집에는 행사 때마다 입고 나가는 갓과 도포, 상투, 수염 그리고 짚신 등이 보관되어 있다. 이들 물건 모두에는 농요에 바친 그의 혼과 땀이 배어있다.

[정보제공]

  • •  박기서(남, 77세, 마수리 농요보존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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