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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아타령 소리만 들어두 진저리가 나-부인 김금순 씨가 말하는 지남기의 삶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E020301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마수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상기

마수리 농요의 명인 지남기(池南基)[1926~2005] 선생은 1926년 4월 10일 괴산군 불정면 웅동리[웅골] 274번지에서 아버지 지현덕 씨와 어머니 남궁순 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이웃하고 있는 외령리 잿말(영촌 본동)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자랐다. 24세 되던 1949년 당시 19세이던 김금순[1931~ ] 씨와 결혼하였다. 김금순 씨는 충주시 살미면 신매리 매남 사람으로 어머니와 함께 잿말로 이사와 살다가 지남기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김금순 씨에 따르면 당시 마을 사람들은 지남기 선생의 소리에 반해 시집을 왔느냐고 물어보았다고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지남기 선생의 노래 솜씨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지남기 선생은 형과 누나가 한 분씩 있었는데, 형인 지택기 씨에 의하면 “동생인 남기는 노래를 한 번 들으면 잊어버리지 않았다” 고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지남기 선생이 노래 솜씨를 타고났음을 알 수 있다.

1950년 6·25사변이 났고 전쟁의 와중에 지남기 선생은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좌익 활동을 했던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마수리 마을의 박장석 씨나 박기서 씨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좌익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마을에 더 이상 살 수가 없게 되자 1953년 지남기 선생 부부는 잿말을 떠나 쇠실 고개를 넘어 신니면 마수리로 들어오게 되었다.

지남기 선생은 마수리에 전혀 기반이 없기 때문에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다고 한다. 이듬해 다시 형이 있는 잿말로 가서 농사를 지었으나 그것 역시 생계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다음 해인 1955년 두 부부는 이류면[현 대소원면] 검단리로 가 새로운 살림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일이 마땅치 않자 남편은 다시 마수리 마제로 머슴살이를 떠나고 부인은 애들 둘을 데리고 검단리에 살았다고 한다.

1950년대 후반 지남기 씨 부부는 또 검단리에서 가까운 가금면 창동리 쇠꽂이 광산에서 광산품을 팔아 생계를 영위하기도 했다. 그러나 광산 일도 어려운데 비해서는 수입이 적어 1960년 초에 다시 마제로 들어가 남의 농사도 지어주고 품도 팔고 하면서 마제에 정착하게 되었다 한다. 이때부터 지남기 선생은 농사꾼으로 완전히 마제 사람이 되었고, 2005년 9월 6일 세상을 떠나 뼈를 마을 뒤인 시료울에 묻게 되었다 한다.

선생은 목청이 좋고 노래를 잘해 농사철에 메김소리를 도맡아 하게 되었다. 그는 소리뿐만 아니라 음악적인 재질도 뛰어나 1960년대 마수리 농요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상쇠가 되어 꽹과리를 치면서 선소리를 하고 농악대를 이끌었다고 한다. 그런 지남기 선생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1960년대 후반이다.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주덕읍 제내리 방죽안 앞 버드내들을 경지 정리할 때 지남기 선생이 그곳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당시 KBS 방송국에서 전국의 농요와 국악을 채록하면서 사람들에게 노래를 시켰으나 아무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 지남기 선생의 노래 솜씨를 알고 있던 사람들의 추천으로 노래를 했고 그것이 전국적 방송을 타면서 노래와 농요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남기 선생은 농요와 가요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잘 했으며 술도 좋아해 자신의 삶은 즐거웠다고 한다. 그렇지만 8남매를 키우며 살림을 해야 했던 부인은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인은 인터뷰를 하면서 남편에게 누를 끼치는 말을 하지 않으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노래꾼을 남편으로 둔 여인의 숙명 같은 것이 느껴졌다.

1960년대 말 충주 지역 농요를 정리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1969년 마수리에서도 지남기 선생을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이 참여하는 좀 더 큰 규모의 연희를 구상하게 되었다. 1970년대 들어 지남기 선생은 마수리 농요를 완벽하게 재현하였을 뿐 아니라 충주 지방의 대표적인 농요로 발전시키기에 이른다. 마수리 농요는 농악과 농요를 중심으로 민속놀이적인 성격이 약간 가미된 종합 예술로 볼 수 있다.

1972년 마수리 농요는 음악적인 요소에 연희적인 요소를 결합하여 탄금대 방아타령이라는 이름으로 제13회 전국 민속예술 경연대회에 참가하였다. 이 대회에서 마수리 농요는 최우수상인 대통령상을 받았다. 이때의 이야기를 부인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방아타령 키우느라 고생 엄청 했어유. 방아타령 소리만 들어도 진저리가 나. 한번 출연 나갈라면 뭐가 있어유. 싸빠진 창사구 사다가 그거 두루치기해서 안주하구 그랬어유. 방송국 같은데 많이 불려 갔어유. 어디 뭐 행사하문 불려 가구. 대통령상 타고 난 후에도 한 3년 혼났어유. 누구 말마따나 입만 가지고 한 거니까”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는 1958년 정부 수립 10주년 기념으로 처음 시작되었으며 전통 민속예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대회로 전통예술을 발굴 육성해 왔다. 참가 분야는 농악, 민속놀이, 민요, 민속무용, 민속극의 다섯 분야이다. 1999년부터는 문화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공동 주최하며 대회 이름도 한국민속예술축제로 바뀌었다.

그나마 1970년대 중반이 되면서 마수리 농요를 시연하는 일은 좀 더 나아지게 되었다. 지방 자치단체와 도 그리고 문화공보부 등으로부터 조금씩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인의 입장에서 보면 농사는 뒷전이고 공연과 연희를 위해 밖으로 나가는 때가 많아 경제적으로는 나아진 게 없었다고 한다.

중원 마수리 농요는 1994년 12월 30일 충북 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고 지남기 선생이 기능보유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충청북도로부터 매월 30만원의 지원을 받기 시작했고 이듬해부터는 매월 40만원을 받아 경제적으로 조금 나아졌다고 부인은 증언한다.

그러나 1995년 10월 지남기 선생에게 큰 불행이 닥쳤다. 뇌졸중(중풍)로 쓰러져 마수리 농요를 재현하는 일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중풍으로 쓰러지기 전에 어지럽고 팔다리에 힘이 없다고 그러더라” 는 것이다. 그래서 “침도 맞아보고 한약도 먹고 하면서 나아지기를 바랬어유. 그런데 종당에 쓰러지구 말더라구” 라는 이야기를 전하는 부인의 어투에 아쉬움이 가득하다.

1996년 김봉옥(76세) 씨를 메김 소리 후계자로 정하고 농요를 시연하게 된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의 반응이 별로였다고 한다. 김봉옥 씨의 소리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7월에 좀 더 젊은 층으로 바꾸자는데 의견이 모아졌고 박재석 씨가 후계자가 되었다. 박재석(53세) 씨는 이후 지남기 선생의 지도도 받고 녹음테이프도 듣고 1972년 전국 민속예술 경연대회 대통령상 수상 비디오테이프도 보고 하면서 밤낮없이 공부를 했다고 한다.

지남기 선생은 중풍에 걸렸지만 1997년까지 약 2년 동안은 말도 하고 노래도 고쳐 주면서 마수리 농요 전수활동을 했다. 그러나 1998년부터는 말을 못하게 되고 마수리 농요는 완전히 박재석 씨를 중심으로 공연되었다. 1998년 4월 20일에는 박재석 씨가 마수리 농요 기능전수자로 지정된다. 이후 마수리 농요는 전수자인 박재석 씨가 이끌고 마수리 농요 보존회장인 박기서 씨가 지원하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지남기 선생은 2002년부터 중풍이 악화되어 외부 출입을 하지 못하게 된다. 방안에서 꼼짝 못하고 누워있어야만 했기 때문에 부인이 오줌똥을 받아냈다고 한다. 4년 동안 그렇게 고생을 하다 2005년 9월 6일 지남기 선생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장례식 날 동네 사람들이 농요라도 불러 지남기 선생 가는 길을 기렸나 부인에게 물어보았더니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회관 앞에서 노제를 지내고 무덤 앞에서 지남기 선생이 부른 테이프를 틀어 고인의 넋을 기렸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부인은 “그래두 빚은 안 지구 장례를 치렀어유” 라고 하면서 고인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지남기 선생이 남긴 사진이라도 볼 수 없느냐고 묻자 방 안 깊숙이 간직한 환갑 때 찍은 사진을 보여준다. 그때만 해도 건강한 모습이다. 젊었을 때 고생으로 밝은 모습은 아니지만 예인으로서의 결기가 느껴진다. 또 다른 사진이나 농요 관련 자료가 있나 묻자 부인은 없다고 말한다. 농요 관련 사진이나 자료는 모두 마수리 농요보존회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에게 나오는 지원금도 지남기 선생이 세상을 떠나면서 끊기게 되었다고 한다. 지원금의 성격이 연금과는 달라 배우자에게 이전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자식들이 도청에 문의해 보았지만 역시 지원금을 더 이상 받을 수 없다는 말만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문제 역시 논의되어야 할 중요한 사안인 것 같다. 사실 기능보유자보다 더 고생을 하는 것은 그들을 뒷바라지하는 아내이기 때문이다.

지남기 선생의 아내인 김금순 씨는 1973년부터 현재의 집(마수리 108번지)에 계속 거주하고 있다. 2남 6녀의 자식들은 모두 출가하여 고향을 떠나 살고 있다. 큰 아들인 지석주 씨는 인천에 살고 있고 둘째 아들인 지석호 씨는 수원에 살고 있다고 한다. 김금순 씨와 인터뷰를 하는 시간에도 딸로부터 건강은 어떤지 식사는 했는지 하는 안부 전화가 온다.

전화를 끊고 나서 김금순 씨는 “애들 교육을 못 시켜 다들 잘 되지는 못했지만 부모에게 잘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식들이 아버지가 노래를 부르는 것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식 중에 아버지의 노래를 이어받을 사람은 없었느냐고 묻자 없었다고 대답한다. 이제 중원 마수리 농요의 명인 지남기 선생의 노래는 테이프를 통해서만 보고 들을 수 있다.

[정보제공]

  • •  김금순(여, 68세, 지남기 선생 부인)
  • •  지택기(남, 지남기 선생 형)
  • •  박장석(남, 76세, 마수리 주민)
  • •  박기서(남, 77세, 마수리 농요보존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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