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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교체의 주역 박재석-마수리 농요 기능보유자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E020401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마수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상기

박재석[1955~ ] 씨는 마수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농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농악놀이에 직접 참여한 것은 16살 때인 1970년이라 한다. 당시 4-H 경연대회에 농악 부문이 있어서 지남기 선생의 지도로 대원들과 함께 연습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신니면 화안리에 있던 산수초등학교에서 5월 5일 단오제가 열리곤 했는데 그때도 역시 팀을 구성 농악연습을 했다고 박재석 씨는 회고한다.

1972년 마수리 농요가 전국 민속예술 경연대회에 나가 대통령상을 탄 다음부터는 마수리가 농요와 농악의 중심 마을이 되었고 그 후 좀 더 자주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한다. 그러므로 박재석 씨는 농요를 접할 기회가 더 많아졌고, 20대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농요팀에 합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는 지남기, 박기서, 유진형 등 1세대 농요/농악팀이 주축을 이루었기 때문에 따라다니면서 농요와 농악을 배우는 일이 중요했다고 한다.

1970년대 중·후반은 중원군에서 주최하는 농악 경연대회에 참가하는 일이 많았다 한다. 20여 명의 젊은이들이 약 보름 내지 20일 동안 연습을 해서 충주 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되는 농악 경연대회에 참가하였으며 1등상을 여러 번 탔다. 그러면 다시 충청북도 대회에 나갔고, 1등상을 탄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농요와 농악을 알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농요의 선율과 농악의 리듬에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박재석 씨가 좀 더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은 1982년경이다. 당시 지남기 선생의 지도로 여성 노작요가 공연되었는데 그때 박재석 씨는 소를 했다고 한다. 소의 모형 속에 들어가 연희를 펼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1980년대는 마수리 농요가 전국에 불려 다니며 공연을 했다고 한다. 1983년에는 충주에서 열린 전국 민속예술 경연대회에 찬조출연을 했고, 1985년에는 국립극장에서 민속예술 경연대회 대통령상 수상팀 자격으로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1986년 9월에는 아시안게임 경축 행사가 호암아트홀에서 열렸는데 그때가 마수리 농요의 전성기였던 것 같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팀의 주축이 50살 전후의 원숙한 가인과 예인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한 3~4년간은 마수리 농요의 휴지기였다고 한다. 외부 공연은 별로 없었고 마을에서 삶과 어우러진 형태로 농요와 농악이 행해졌다. 그리고 지남기 선생과 유진형 씨 등이 좀 더 적은 인원으로 각 지역에 나가 공연을 하는 일은 계속 이어졌다고 말한다. 그러던 것이 1993년 마수리 농요전수관 건립예산이 책정되면서 마수리 농요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1994년 10월에는 마수리 308번지중원 마수리 농요전수관(40평의 한옥 기와집)이 건립되었다. 이어 12월 30일에는 마수리 농요가 충청북도 무형 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다. 이때까지도 박재석 씨는 마수리 농요팀의 막내로 큰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1995년 10월 지남기 선생이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상황이 바뀐다고 말했다. 우선 그동안 지남기 선생이 해오던 역할을 김봉옥[1933~ ] 씨에게 맡기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김봉옥 씨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팀이 서울에 가서 공연을 하면서 큰 호응을 얻지 못했던 것 같다고 한다.

당시 마을에서 마수리 농요팀에 대한 회의가 열렸고, 젊은 층으로 가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그래서 지남기 선생이 하던 역할을 박재석 씨가 맡게 되었다. 박재석 씨가 마수리 농요 기능 전수생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박재석 씨의 데뷔는 1996년이 된다. 당시 박재석 씨가 병석의 지남기 선생을 찾아가자 그는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고 한다. “이렇게 가는 길은 험난하구 엄청 어렵지만 해볼 만한 일이다. 네가 이걸 꼭 끌구 가라. 이건 다른 누가 끌구 갈 수두 없는 거구. 너는 소질이 있구 할 수 있으니까 잘 해보도록 해라(재석을 보면서 눈물을 흘림) 모심기 노래인 ‘아라성’은 기묘한 거다. 물과 연계된 노랫말로 정선 아리랑과 맥이 통한다. 그렇지만 사설과 가락이 우리 중원의 고유한 거다” 라 하였다.

그런데 지남기 선생이 이처럼 대화는 할 수 있었지만, 노래를 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마수리 농요에 대한 1대1 전수교육이 불가능했다. 박재석 씨는 농요의 사설을 외우고, 녹음테이프를 들으면서 거의 독학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공부를 하고는 지남기 선생과 농요팀의 원로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문제점을 지적받아 고치는 방식을 취했다. 그렇게 해서 공식적으로 나간 첫 무대가 1996년 10월 충주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우륵문화제 공연이었다. 이때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박재석 씨는 마수리 농요의 중심인물로 부상하게 된다.

1998년은 박재석 씨의 음악 인생에 중요한 해이다. 4월 20일에 마수리 농요 기능전수자 심사를 위한 시연을 했을 뿐 아니라 기능전수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6월 11일에는 또 마수리 농요 전 과정을 현지에서 재연하여 마수리 농요가 박재석을 중심으로 세대교체를 이뤘기 때문이다.

1999년부터 박재석 씨는 마수리 농요팀을 이끌고 매년 4~5회 공식적인 공연에 참여해왔다고 한다. 그 외에 농요전수관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지도하기도 하고, 비공식적인 행사에 개별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고 한다. 2001년에는 함께 공연했던 최종남[1958~] 씨가 여성 노작요 기능전수자가 되어 마수리 농요의 완전한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2005년 9월에는 지남기 선생이 세상을 떠난다. 2006년부터 박재석 씨는 마수리 농요에 대한 책임감도 커지게 되었고 그래서인지 공연 횟수도 많아졌다. 2007년 2월 28일에는 마수리 농요 기능보유자 심의가 있었고, 7월 13일에는 지남기 선생의 계승자로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5호 기능보유자가 된다. 2007년은 박재석씨와 마수리 농요에 있어서 또 한 번 중요한 해이다. 1년 동안 마수리 현지에서 마수리 농요 영상물 제작을 위한 작업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충주에 있는 성화 스튜디오 팀이 공연 전 과정을 비디오로 촬영하여 현재까지 DVD 편집과 제작을 진행하고 있다.

2008년 현재 박재석 씨는 마수리 11번지에 부인,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아들과 딸을 두었으나 딸은 이미 출가를 시켰다 한다. 평상시에는 농업에 종사하고 있고, 일이 있을 때마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마수리 농요를 공연한다. 그리고 최근에는 마수리 농요에 관심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마수리 농요를 가르치기도 한다. 국악을 배우는 선생이나 국악 관련 학생들이 많이 오는 편이다. 그러면 마수리 농요전수관이나 가까운 학교 또는 충주에 있는 우륵당 등에서 마수리 농요를 전수한다.

그리고 용원초등학교 등 학교를 찾아 현장 실습을 하는 일도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또 지역 주민들에게 마수리 농요를 더 알리기 위해 국악협회 충주지부와 공동으로 연희를 하는 계획도 짜보고 있다. 즉 마수리 농요를 좀 더 활성화해서 모든 사람들이 함께 부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그는 오늘도 애쓰고 있었다. 현재 마수리 농요는 박재석과 최종남이 이끄는 농요팀, 유진형이 이끄는 농악팀, 박홍서와 박용기가 이끄는 마수리 농요 보존회 집행팀을 세 축으로 해서 굴러가고 있다.

[정보제공]

  • •  박재석(남, 53세, 마수리 농요 기능보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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