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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시대 자치 제도, 현풍현 향약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035
한자 傳統 時代 自治 制度, 玄風縣 鄕約
이칭/별칭 현풍 향약,포산 향약,현풍현 향약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광우

[정의]

17세기 현풍 현감 김세렴이 제정한 현풍현 향약의 내용과 자치 규범.

[개설]

현풍현 향약(玄風縣 鄕約)은 1632년[인조 10]에 현풍 현감(玄風縣監)으로 재임했던 김세렴(金世濂)[1593~1646]이 권선징악과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만든 향촌의 자치 규약이다. 김세렴은 종래의 '여씨향약(呂氏鄕約)'과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에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의 '예안향규(禮安鄕規)'를 참고하여 현풍현의 실정에 맞게끔 향약(鄕約)과 향규를 적당히 혼합하여 '포산약조(苞山約條)'를 제정하여 실시하였다.

[향약의 전승과 특징]

중국 북송(北宋) 때, 남전현(籃田縣)에 거주하던 여씨 형제(呂氏兄弟)들은 고을에서 실시할 향촌 자치 규약인 향약을 처음으로 제정하였다. 이어 남송(南宋)의 성리학자 주자(朱子)는 성리학적 윤리관을 가미하여 '여씨향약'을 새롭게 증손(增損)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주자증손여씨향약'이다.

조선 시대 사족(士族)들은 주자증손여씨향약을 성리학적 이상향이 반영된 자치 규범으로 표방하였다. 이로 인해 전통적으로 형성되었던 각종 계(契)와 결사(結社) 조직이 성리학적 자치 규범인 향약으로 그 외형을 탈바꿈하거나 새롭게 제정되어 갔다. 향약은 한 고을·동리·촌 단위로 시행되기도 하고, 문중·교우 및 각종 상부상조 조직 등의 운영 명분으로도 활용되었다. 이 중 사족들과 지방관 주도로 시행되었던 고을 단위의 향약은 조선 시대 자치의 명분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재지 사족들은 자치의 명분으로, 지방관은 원활한 통치의 목적으로 향약을 활용하였던 것이다. 17세기 전반 경상도 현풍현에서 제정된 현풍현 향약도 이 틀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김세렴의 현풍 현감 부임]

김세렴의 본관은 선산(善山), 자(字)는 도원(道源), 호(號)는 동명(東溟), 시호는 문강(文康)으로 17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남인계(南人系) 문신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동서 분당(東西分黨) 시 동인의 핵심 인물이자 분당의 단초를 제공하였던 김효원(金孝元)[1532~1590]이다. 김세렴은 1616년(광해군 8)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 급제하면서 본격적인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다. 광해군 연간 인목 대비(仁穆大妃) 폐비(廢妃)를 반대하다 귀양을 가기도 했지만,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이후 다시 관직에 임명되었다.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 1631년(인조 9)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에 올랐다.

그러나 이 해 김세렴은 이귀(李貴)[1557~1633]를 논핵하다 현풍 현감(玄風縣監)으로 좌천되었다. 이귀는 인조반정 1등 공신으로 인조 초반에 인조의 신임을 받으며 강력한 정치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 이귀는 인사 행정의 최고 수장인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스스로 천거하였다. 대간(臺諫)이었던 김세렴은 권신이 인사권을 장악할 수 없다며 이 결정을 논핵하였는데, 김세렴의 판단이 오히려 정치적 역풍을 불러왔다. 인조는 나라에 큰 공이 있는 사람을 함부로 공격했다며 대노하였고, 김세렴을 종 3품 내직에서 종 6품 외직인 현풍 현감으로 강등시켜 버렸다.

석연찮은 이유로 현풍 현감으로 부임하였지만, 김세렴은 지방관이라는 본연의 의무에 충실하였다. 약 5년 동안의 재임 기간 중 많은 치적을 남겼고, 이로 인해 현풍현의 백성들은 김세렴의 선정을 기리고자 거사비(去思碑)를 세우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풍 현감 김세렴의 대표적인 치적이 교육·교화 정책인데, 특히 향약 제정을 주목할 수 있다.

[현풍현 향약의 4대 강령]

김세렴의 현풍현 향약은 주자와 예안향약(禮安鄕約)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16세기 이래 조선의 사족들은 지역적 특징과 시대적 흐름을 일정 부분 반영한 새로운 향약을 제정하였다. 1556년(명종 11) 이황은 자신의 고향인 경상도 예안현에서 실시할 자치 규약을 제정하였으니, 후학(後學)들은 이것을 ‘예안향약’ 또는 ‘퇴계향약(退溪鄕約)’이라 불렀다. 퇴계 이황의 학맥을 계승한 김세렴은 주자의 주자증손여씨향약과 퇴계 이황의 향약을 접목시켜 새로운 향약을 제정하니, 그것이 현풍현 향약이다. 현풍현 향약은 기본적으로 주자증손여씨향약의 덕업상권(德業相勸)·과실상규(過失相規)·예속상교(禮俗相交)·환난상휼(患難相恤)로 이루어진 4대 강령을 따르고 있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1. 덕업상권[좋은 일은 서로 권장함]

덕업상권에는 성리학적 윤리관이 반영되어 있다. 부모에 대한 효도, 자제(子弟)에 대한 올바른 교육, 어른에 대한 공경, 형제간의 우애, 이웃과의 화목, 친구와의 우정 등이 그것이다. 또한 법령과 조세 납부의 준수와 같은 통치 행위에 대한 성실한 이행도 권장하고 있다. 이러한 덕업은 향약 구성원들이 서로 권장하며, 탁이(卓異)[남보다 뛰어나게 다름]한 자는 상을 주어 타의 모범이 되게 하였다.

2. 과실상규[잘못은 서로 규제함]

과실상규는 향약 구성원 간의 상호 규제 조항으로, 당대 사족들을 중심으로 한 향촌 사회 질서가 반영되어 있다. 과실상규의 처벌 대상은 크게 극벌(極罰)·중벌(中罰)·하벌(下罰)로 구분되며, 다시 상(上)·중(中)·하(下)로 세분된다. 이러한 구분은 퇴계 이황의 예안향약을 따른 것이다. 우선 극벌에 해당되는 것은 불효(不孝)를 비롯한 강상(綱常) 윤리가 주를 이루는데, 형과 아우, 남편과 아내, 적자(嫡子)와 서얼(庶孼) 간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가 처벌 대상이 된다. 또한 관부(官府)의 일에 간섭하거나 향풍(鄕風)을 어지럽히는 행위, 소민(小民)을 침탈하는 행위도 극벌로 다루었다.

중벌과 하벌에도 강상의 윤리가 기본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다만 향촌 질서 및 향약 운영과 관련된 조항들을 많이 제정해 놓았다. 선비의 기풍을 어지럽히는 행위, 공사(公事)를 빙자한 행위, 부역이나 군역을 면제받으려는 행위, 유향소에 모입(冒入)[자격이 없는 사람이 속이고 들어감]하는 행위 등은 중벌로 다스려졌다. 향회(鄕會)에서 소란을 피우거나, 원활한 향약 운영을 방해하는 자는 하벌로 다스린다고 규정해 놓았다. 그 외에도 원악향리(元惡鄕吏) 조항이 주목된다. 민간에 폐단을 일으키는 향리, 공물(貢物)을 과도하게 거두는 향리, 사족을 능멸하는 서인(庶人) 등도 여기에 포함되는데, 모두 사족 중심의 향촌 지배 질서 유지와 관련되어 있다.

3. 예속상교[사람을 사귈 때는 서로 예의를 지킴]

예속상교는 성리학적 윤리관에 입각하여, 향약 구성원 간의 질서와 예의를 규정해 놓은 것이다. 예속상교는 주자증손여씨향약의 4대 강령 중 가장 긴 조항이나, 현풍현 향약에서는 핵심 조항만 추려 놓았다. 즉 향리(鄕里)에서 나이 차이에 따라 연장자를 섬기는 예, 향약 모임에서 나이에 따른 자리 배치와 이작(異爵)[특별히 벼슬이 있는 자]에 대한 대우 등을 규정하고 있다.

4. 환난상휼[어려움을 당하면 서로 도움]

환난상휼은 향약 구성원 간의 상부상조를 위한 조항이다. 현풍현 향약의 환난상휼도 이황의 향약을 대략적으로 따르고 있다. 구성원들은 정기적으로 쌀·콩·종이·섬[곡식 따위를 담기 위하여 짚으로 엮어 만든 그릇] 등을 납부하며, 구성원들이 재해를 당하거나 우환을 입었을 경우 여기서 부조한다고 규정하였다. 또한 구성원 내에 홀아비·과부·고아·독거노인, 가난하여 혼인하지 못하는 처녀, 배움의 시기를 놓쳐 버린 고아가 있을 경우 정성을 다해 보살펴 주고, 관에 보고하여 지원을 얻어낸다는 조항도 있다.

[자치와 통치의 조화, 현풍현 향약]

장현광(張顯光)[1554~1637]은 현풍현 향약을 열람한 뒤, 발문(跋文)을 직접 썼다. 장현광은 그 발문에서 "이 향약 가운데의 절목(節目)은 성분(性分)과 직분(職分)에 벗어난 것이 없다."라고 평가하였다. 이 구절은 현풍현 향약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목적, 즉 원활한 통치의 목적과 사족 중심의 향촌 지배 질서 유지의 의도가 단적으로 축약되어 있다. 현풍현 향약에는 4대 강령 이외에도 향약의 조직과 운영 관련 규정이 10개 조로 제정되어 있다. 이 조항들은 향약을 통해 자치와 통치의 조화를 이루려는 수령과 자신들 주도의 향촌 지배 질서를 확립하려는 사족의 의도를 함께 보여 주고 있다.

현풍현 향약의 대표는 도약정(都約正)으로, 나이가 많고 덕이 있는 자를 추천해서 뽑았다. 또한 덕행이 있는 자 두 사람을 도약정을 보좌하는 부약정(副約正)으로 삼는데, 한 사람은 유향소(留鄕所)의 수임(首任)인 좌수(座首)가 겸직하였다. 그리고 학행(學行)이 있는 자를 직월(直月)[오늘날의 간사(幹事)]로 뽑아 실무를 주관케 하였다. 현풍현 각 면(面)에도 향약 조직이 결성되었다. 덕망과 학행이 있는 자가 각 면의 약정(約正)이 되었으며, 사족이 아닌 하인(下人) 중 나이가 많고 근면한 자 한 사람을 뽑아 향약소이정(鄕約所里正)이라 부르며, 해당 면의 향약을 보조케 하였다. 그리고 10가(十家)마다 한 사람을 뽑아 행수(行首)로 삼았다. 이러한 향약 임원의 임명은 기본적으로 구성원 간의 추천으로 이루어졌으나, 최종 결정권은 수령이 가지고 있었다. 행정권의 최고 책임자인 수령이 자치 계통의 향약까지도 총괄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고을의 하부 행정 구조인 면리(面里) 조직을 향약 시행의 단위로 삼은 것도, 교화를 명분으로 삼아 원활한 지방 통치를 도모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현풍현의 사족들은 김세렴의 현풍현 향약을 매개로 자신들 중심의 향촌 지배 질서 유지에 대한 성리학적 명분을 확보하였다. 동리에서 향약의 법을 어긴 사람이 있을 경우, 물리력을 가한 직접적인 처벌도 가능하였다. 가벼운 죄일 경우 최대 20대의 태(笞)를 칠 수 있으며, 그 이상의 죄일 경우 관사에 보고하여 처리케 했다. 또한 봄과 가을에 행해지는 강신례(講信禮)의 절차는 철저히 향촌 내 위계 질서가 반영되어 있다. 품관(品官)[일반 사족]과 서얼, 향리와 하인에 따라 그 자리와 예를 취하는 법을 달리하였다. 이러한 조항으로 향촌 내의 사족들은 권위를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향약 조직을 통해 자신들 주도의 향촌 자치를 실현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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