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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진흥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20312
한자 農村振興運動
영어공식명칭 Rural Development Program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4년 - 1930년대 시작된 일제의 농촌진흥운동으로 대구광역시 동구[당시 달성군]지역 농민 해외 이주 시작
일제 농촌진흥운동 - 대구광역시 동구[당시 달성군]

[정의]

1930년대 대구광역시 동구에서 추진된 일제의 식민지농업정책.

[실시 배경]

1920년대 동구 지역이 위치한 달성군의 식민지지주제의 농업구조는 세계대공황 이후 1930년대 일제의 식민지농업정책인 농촌진흥운동이 벌어지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30년대 일제는 조선에 농촌진흥사업을 실시하였다. 조선의 지주에 대해 일정하게 압박을 가하면서 피폐된 조선농촌의 구조를 개선하려는 목적에서 실시하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조선농촌을 일본 독점자본주의의 이익이 관철되는 대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동구 지역 농촌진흥운동]

1920년대 말 세계대공황은 대구광역시 동구를 포함한 경상북도에 농산물 가격의 폭락, 농가 부채의 증가, 소작조건의 악화가 심화되어 소작농, 농업노동자, 화전민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농촌사회에서 농가경제의 악화는 필연적으로 농가부채와 춘궁농가의 증가를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일제는 농민을 국외로 이주시키는 작업을 시행하였다. 1934년의 경우 대구광역시 동구가 위치한 달성군도 그 대상에 포함되었다.

당시 지주들은 농촌진흥운동의 핵심 사업인 자작농 창정에 대해 소극적이거나 기피하는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대구의 대지주인 정해붕의 경우 소작인이 어렵고 궁한 상태가 된 배경에 대해, “곡가 폭락, 재해가 발생해 수입이 지출보다 모자라게 되니 채무가 생기고, 또 채무가 불어서 오늘날의 궁극을 보게 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곧 지주의 무리한 식민지지주제 소작관행이라는 구조적 농업관계를 개선할 생각은 거의 없었다. 또 “10년 이상 충실한 소작인에 대해 자작농 창정을 하여줄 의향이 있느냐”는 물음에 “간단한 문제가 아니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대답과 같이 지주들은 자작농 창정에 관해 관심이 거의 없었다.

이처럼 1930년대 일제의 식민지 농업정책으로 농촌진흥운동이 전개되는 가운데서도 농촌은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소작농민은 자립적 농업경영자로서의 위치를 상실하였다. 사실상의 임노동자의 지위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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