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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최여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21382
한자 與崔汝浩
영어공식명칭 A letter sent to Heung-won Choi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영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711년 - 「여최여호」이상정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781년 - 「여최여호」이상정 사망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754년연표보기 - 「여최여호」저술
편찬|간행 시기/일시 1802년연표보기 - 「여최여호」간행
배경 지역 「여최여호」 -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지도보기
성격 서독류|서
작가 이상정

[정의]

조선 후기 학자인 이상정이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에 은거하고 있던 최흥원에게 부친 서간문.

[개설]

이상정(李象靖)[1711~1781]은 현재 경상북도 안동시 출신으로,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大山)이다. 1735년(영조 11) 사마시와 대과에 급제하여 가주서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상정은 이황(李滉) 이후 기호학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침체된 영남학파에서 이황의 계승을 주창하고 일어난 이현일·이재로 이어진 영남학파의 중추적 인물이다.

최흥원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자는 태초(太初)·여호(汝浩), 호는 백불암(百弗庵)이다. 최흥원은 대대로 달성의 칠계[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에 살았기 때문에 칠계선생(漆溪先生)이라 일컬어졌다. 최흥원은 1739년(영조 15) 「남전향약(藍田鄕約)」에 의거해 「부인동규(夫仁洞規)」[부인동 동약]를 세웠다. 「부인동규」가 설치되어도 부인동 일대 백성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자, 1753년(영조 29)에는 선공고(先公庫)[토지세 대납]·휼빈고(卹貧庫)[토지가 없는 농민들에게 토지 지급]를 설치해 부인동규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모았다. 선공고와 휼빈고가 잘 운영되어 백성들의 삶이 안정되었다. 최흥원은 경모궁 수봉관, 장악원 주부, 공조 좌랑, 익위사 익찬을 거쳐 정3품 통정대부에까지 올랐다. 죽은 뒤 최흥원은 1789년 효행으로 정려문[국가에서 풍속을 권장하기 위해 충신·효자·열녀 등 모범이 되는 사람을 표창하고자 그 사람이 사는 마을 입구나 집 문 앞에 세우던 붉은 문]이 세워졌고, 1790년 승정원 좌승지겸경연참찬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백불암집』 8권 7책이 있다.

[구성]

「여최여호」는 이상정이 평소 알고 지내던 최흥원에게 보내는 편지글로, 자신의 근황을 알리고 상대방의 안부를 물으며, 평소 소회를 나타내고 있다.

[내용]

「여최여호」는 이상정이 최흥원을 만나보고 와서 보낸 편지이다. 「여최여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근래에 뵙고 안색을 보니 자못 수척하고 주름살이 늘어 예전같지 않은 모습에 마음이 쓰입니다. 전최가도사(殿最假都事)로 차임되어 늦게 감영에 도착하였다가 오늘에서야 일을 마쳤습니다. 내일 독미원(獨迷院)으로 길을 잡아 고향으로 향해야 하는데, 팔공산을 바라보니 함께 있었던 옻골로 마음이 날아가는 듯 하였습니다. 함께 자연에서 한가로이 노니는 그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특징]

「여최여호」는 이상정이 관인(官人)으로서 정치적 포부보다 도학가로서 삶을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글이다.

[의의와 평가]

「여최여호」는 자신의 처지와 마음을 황정견의 시구(詩句)[속학근지회수만(俗學近知回首晩), 병신전각절요난(病身全覺折腰難)]로 우회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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