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3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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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送奏請使 |
영어공식명칭 | Songjoochengsa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수성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영호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32년 1월 9일 - 「송주청사」 저자 전경창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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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585년 10월 9일 - 「송주청사」 저자 전경창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859년 - 「송주청사」 저자 전경창의 『계동집』 간행 |
배경 지역 | 파동 -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 |
성격 | 한시|오언시 |
작가 | 전경창 |
[정의]
조선 전기 학자인 대구 출신 전경창이 주청사를 송별하면서 지은 한시.
[개설]
「송주청사(送奏請使)」의 저자 전경창(全慶昌)[1532~1585]의 본관은 경산(慶山)이며, 자는 계하(季賀)이고, 호는 계동(溪東) 또는 만오(晩悟)라고도 한다. 정헌대부(正憲大夫) 예조판서(禮曹判書)인 문평공(文平公) 전백영(全伯英)의 5대손이다. 아버지는 전순(全珣)이고, 어머니는 김해송씨(金海宋氏) 송식(宋軾)의 딸이다. 대구부 수성현 파잠리(巴岑里)[현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에서 태어났다. 이황(李滉)[1501~1570]의 문인이다. 이숙량(李叔樑)[1519~1592], 정구(鄭逑)[1543~1620] 등과 교류하였다.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계동집(溪東集)』이 있다.
「송주청사」는 변무(辨誣)[사리를 따져서 억울함을 밝힘]를 청하러 가는 사신을 송별하며 지은 한시이다.
[구성]
「송주청사」는 현재 2구(句)만이 존재하고 나머지는 산실되었다. 오언시(五言詩)이다.
[내용]
「송주청사」는 현재 아래의 2구만 전한다.
국내천년통(國耐千年痛)[나라는 천년의 아픔 참을 동안]
신망백세수(臣忘百世羞)[신하는 백세토록 수치를 잊었네]
「송주청사」가 지어진 배경은 다음과 같다. 여말선초(麗末鮮初)에 윤이(尹彝)와 이초(李初) 등이 명나라 조정에 거짓으로 고하여 종실의 계통이 잘못 기록되었다. 잘못된 기록을 바로잡기 위하여 태종(太宗) 때부터 공소(控訴)하였으나 매번 다른 일로 가는 사신이 겸하여 국계변무(國系辨誣)를 청한 까닭에 고친다는 말만 들을 뿐 고친 결과는 받지 못하였다. 전경창은 변무의 일은 목숨을 바쳐서 하여야 하므로 변무의 일을 전임하는 사신을 파견하여야 한다고 상고하였다. 이에 왕의 윤허를 얻어 내었고, 전경창은 변무하러 가는 사신이 더욱 힘써 일을 성사시키길 바라는 마음으로 「송주청사」를 지었다.
[특징]
「송주청사」는 현재 전문이 전하지 않아 표현과 형식상의 특징을 단정 지을 수 없지만 전하여지는 구절을 통하여서 볼 때, ‘우(尤)’ 계열의 운목이 사용된 5언 근체시(近體詩)이다. 평측이 ●●○○●, ○○●●○으로 배치되어 있고, 시어가 정연히 대우(對偶)를 이루고 있다.
[의의와 평가]
「송주청사」는 전문이 전하지는 않지만 전경창의 시재(詩才)를 가늠하여 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손처눌(孫處訥)[1553~1634]이 지은 전경창 행장에 남아 있는 흔적을 바탕으로 문집에 수록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