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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복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905
한자 李在福
영어공식명칭 Lee Jaebok
이칭/별칭 이재철(李在哲),이일도(李一道),이재룡(李在龍)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6년 12월 8일연표보기 - 이재복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24년 6월 - 이재복 계성학교 재학
수학 시기/일시 1931년 4월 - 이재복 도시샤대학 신학부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32년 9월 - 이재복 대구노동자협의회 결성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36년 - 이재복 남성정교회에서 목회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37년 - 이재복 대구기독교청년회 이사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2년 - 이재복 애락원 원목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5년 10월 - 이재복 경상북도인민위원회 보안부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5년 12월 - 이재복 조선인민당 결성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46년 10월 - 이재복 대구 10월항쟁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49년 5월 26일연표보기 - 이재복 사망
출생지 포항 - 경상북도 포항시
거주|이주지 대구 - 대구광역시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성격 사회운동가|종교인
성별 남성
대표 경력 대구노동자협의회 서기장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사회운동가이자 종교인.

[개설]

이재복(李在福)[1906-1949]은 1906년 12월 8일 경상북도 포항시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대구노동자협의회조선건국동맹 경북지부에서 활동하였고, 광복 후 사회주의 계열 정치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재철(李在哲)·이일도(李一道)·이재룡(李在龍)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였다.

[활동 사항]

이재복은 안동 협동학교에서 수학하였고, 사립 계성학교(啓聖學校)에 재학 중이던 1924년 6월 YMCA 종교부장을 맡았다. 1925년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京都] 도시샤중학[同志社中學] 4학년에 입학하여 1928년 3월 졸업하였다. 이재복은 같은 해 5월 이와테현[岩手縣] 모리오카[盛岡]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학비 부족으로 9월에 자퇴하였고, 1929년 3월 귀국하였다. 1930년 9월 다시 교토로 건너가 1931년 4월 도시샤대학 신학부에 입학하였으나 1932년 2월 자퇴하고 귀국하였다.

이재복은 1932년 9월 중순 유차을·조홍기 등과 함께 산업별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기로 협의하였고,. 이후 김병창·김호상·최문식·박몽득·박태숙을 동지로 포섭하였다. 이재복은 동지들과 함께 9월 20일 대구 남성로에 있던 학생기독청년회관 사무실에서 산업별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할 목적으로 대구노동자협의회(大邱勞動者協議會)를 결성하고 서기장을 맡아 정리부·종교부·소년부를 담당하였다. 12월 13일에 열린 제2회 집행위원회에서는 기관지 『대협(大協)』과 『연말 깜빠니아[대중투쟁]』를 발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이재복은 유차을·조홍기 등과 함께 인쇄된 기관지를 동지들에게 배포하였다. 『대협』과 『연말 깜빠니아[대중투쟁]』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 자본주의 타도, 공산주의 사회 실현을 위한 투쟁 등을 선전하였다. 이재복은 1933년 2월 상순 동지들과 함께 대구노동자협의회 집행위원회 및 연구회를 개최하고 기관지 출판 발행, 결사의 확대 강화, 공산주의 보급 등을 결의하였다. 1933년 1월에는 『연말 깜빠니아[대중투쟁]』 2호 발행에 참여하고 이를 조선어로 번역하여 동지들에게 배포하였다. 이재복은 1933년 2월 대구노동자협의회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11월 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4년형을 언도받았다.

이재복은 1936년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였고, 1937년 대구기독교청년회 이사와 1942년 애락원 원목을 역임하였다. 전시체제기에는 대구기독교전시보국회 위원이 되었고, 1943년 일본기독교 조선 장로교단 경북교구회가 결성되고 1944년에 새로 임원을 선출할 때 영천교회 목사로서 영천지교구장이 되었다. 이재복은 1945년 2월 24일 경북도청 회의실에서 결성된 조선전시종교보국회 경상북도지부의 이사로 참여하였다. 광복 직전에는 조선건국동맹 경북지부에 참여하였다.

이재복은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 결성에 참여하였다. 1945년 10월 경상북도인민위원회 결성에 참여하고 보안부장이 되었다. 12월에는 조선인민당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 참가하고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10월항쟁에 참여하였고, 여수·순천사건 때는 남로당 특별공작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이때 이재복에게는 17만 원의 현상금이 붙었다. 이재복은 1948년 12월 28일 밤 3시 서울 신당동에서 난투 끝에 국방부 제1연대 정보관 김창룡(金昌龍)에게 체포되었고, 1949년 5월 26일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총살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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