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주택지로서 ‘명수대’의 등장과 땅투기의 시작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012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경호

[정의]

일제 강점기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에 건립된 명수대 주택과 투기 양상.

[개설]

일제 강점기 주택 개발지로 지정되었던 명수대[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 일대]는 일본인 사업가에 의하여 개발되었고, 전시체제 이후에 토지를 자산화 하려고 하는 여러 인물들에 의하여 투기가 이어져 왔다. ‘명수대’라는 명칭은 일본인 부호의 별장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은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 일대가 전부 ‘명수대’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명수대(明水臺)의 유래]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에는 1988년에 지은 명수대현대라는 아파트가 있다. 1990년대 들어서 교회와 초등학교 등이 ‘명수대’라는 이름을 버리기 시작하였지만, 아직까지도 약국, 피자집, 편의점 등 여러 건물에 ‘명수대(明水臺)’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 그렇다면 이 명칭은 어떻게 유래되었을까?

이 지역은 1930년부터 1940년경까지 개발된 문화주택이 세워진 교외주택지였다. 서울지명 ‘명수대’는 『서울지명사전』에 의하면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에 있던 마을로서, ‘명수대’라고 하는 별장이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명수대는 서달산 꼭대기에 있던 건축물로 1920년 일본인 부호 기노시타 사카에[木下榮]가 이곳에 별장을 짓고 놀이터를 만든 다음, 맑은 한강물이 유유히 흐르는 경치 좋은 곳이라고 하여 붙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광복 후 이 건물은 철거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일본 히로시마[廣島] 국제대학의 수나모토 후미히코 교수는 이 지역에 오랫동안 살던 이들의 구술을 인용 “명수대가 서달산 정상에 위치한 별장건축 단체(單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에서 개발된 주택지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보면서 별장건축 단체가 아닌 이 일대 주택지를 ‘명수대’라고 연구한 바 있었다. 어쨌든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 일대가 ‘명수대’라는 이미지를 갖게 된 배경을 찾아보지 않을 수 없다.

[명수대 주택지의 개발 배경]

1920년대 중반부터 경성부 교외주택지개발이 시작되었다. 특히 노량진과 흑석은 한강을 건너오면 바로 도착하는 지역이었다. 교통 요지였던 한강 이남의 영등포와 노량진, 흑석은 일찍부터 주목받았지만, 영등포는 이미 공장지대가 들어서 주택지로는 그다지 적절하지가 못했다. 명수대주택지를 개발한 기노시타 사카에는 경성부회의원으로 당선되어 활동하던 인물이었는데, 경성의 도시개발계획에 이 일대가 포함되지 않자 경성부윤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는 왜 흑석리에 주택개발을 하려고 했을까? 이는 흑석리에 있는 한강신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기노시타 사카에는 시키 신타로[志岐信太郞]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시키구미[志岐組]라는 회사의 주임이었는데, 시키 신타로가 흑석리에 신사를 건립하자 기노시타 사카에는 이곳에 들르며 참배를 했고, 이 와중에 흑석리를 발견했다는 견해가 있어 주목된다. 기노시타 사카에는 “오사카에 살던 가족들이 명수대주택지로 오자 건강해졌다.”고 하였으며 명수대가 “평양의 모란대를 능가하는 아름다운 경치를 가졌다.”고 언급하였다.

[명수대주택지의 개발]

기노시타 사카에는 명수대주택지가 완성되는 1930년 이곳으로 이주했다. 이 당시 개발은 3기로 나누어 실시되었고, 30,000평→45,000평→80,000평으로 점차 늘려나갔다. 당시 ‘명수대주택지 및 유람지대 일람’이라는 배치도에는 이 주택지는 총 5개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1차와 2차는 현재 동양중학교 주변인 흑석동의 서쪽을, 3차는 서쪽 일부와 흑석3동 일대인 동쪽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차와 2차는 주택지 구획이 크고 이 지역에 석축이나 일본식 주택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또 하나의 특징적인 점은 전시체제기를 전후로 하여 1차와 2차, 3차 개발 당시 다른 점이 있다. 1기에는 문화주택, 일본식주택을 건설했다면 전시체제가 들어선 2기와 3기에는 군수물자 제조를 위한 공장이 들어서고 많은 사람들이 명수대로 오게 되자 개발 계획을 무시한 주택들이 들어섰다. 1938년 이후부터 해마다 10만 명씩 인구가 경성으로 유입되었고, 일본인보다 조선인의 비율이 더 높았다. 1940년대에 들어와서는 일본인 가구보다 조선인 가구가 더 많아졌다.

이곳은 단지 주택지만 들어섰던 것은 아니었다. 2차와 3차 분양이 진행된 1930년대 중반에는 많은 학교[유길준이 노량진에 창립한 사립학교인 은로학교, 중앙보육학교, 경성상공학교, 양복재봉학교]와 종교시설이 유치되었다.

그렇다면 이곳에는 어떤 집이 세워졌을까? 이경아의 『경성의 주택지』[집, 2019]에서 잡지 『조선의 건축』 21집 8호를 재인용한 것을 그대로 옮기면, 시미즈 카즈노리가 1942년에 지은 집에 대한 설명이 나와있다. '시미즈 카즈노리의[자선당제약(慈善堂製藥) 사장 김일영(金一泳)과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 집은 부지 210평, 연건평 55평의 2층 주택으로, 한강신사를 비롯하여 상류 한강 기슭 일대가 한눈에 보였다. 내부는 벽난로를 둔 양식 응접실, 온돌방인 안방, 다다미를 깐 침실과 객실을 둔 한-일-양 절충식 주택이라고 한다.'

[땅투기의 시작]

일제가 중국과의 전쟁을 일으킨 후 전시체제기에 들어서자, 1938년부터 일부 경성인들은 현금을 부동산화 하기위해 교외를 찾아갔고, 각종 교외주택지 광고에서는 주택지에 투자해야한다는 광고들로 가득했다. 명수대주택지 뿐만 아니라 1939년 경인시가지계획안 내 1억 평의 계획 구역 총 11개의 개발지구에 구로, 오류, 괴안, 소사, 부평 일대 많은 면적이 주택지 개발 예정이었다. 각종 언론에서는 이들의 토지 구입을 부추겼다. 말하자면 부동산 투기의 시초인 셈이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3.11.17 내용 변경 [명수대주택지의 개발] 이경아의 『경성의 주택지』[집, 2019]의 시미즈 카즈노리 관련 부연설명 수정 및 해당 출전의 인용구 구분
2022.07.19 내용 수정 문장 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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