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3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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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楊廣道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오기승 |
제정 시기/일시 | 1106년 -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 설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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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 시기/일시 | 1171년 - 양광주도, 충청주도로 분할 |
개정 시기/일시 | 1314년 - 양광도를 정식 명칭으로 정함 |
개정 시기/일시 | 1356년 - 양광도에서 충청도로 개칭 |
폐지 시기/일시 | 1395년 - 양광도에서 충청도로 개칭 |
관할 지역 | 양광도 금주 -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 |신대방동|상도동 |
관할 지역 | 양광도 과주 -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 |본동|흑석동|동작동|사당동 |
[정의]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영역을 포함한 지역을 관할하였던 고려 시대 금주와 과주의 상위 지방 행정구역.
[개설]
고려의 5도 양계 체제 지방행정구획에서 5도 중 하나이며, 현재의 동작구 영역을 포함한 서울특별시 남부 일대와 경기도 중남부 및 충청남북도의 대부분과 강원도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해당된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고려에서 계수관 제도가 확립되면서, 성종 대에 제정한 10도의 기능은 점차 약화되고 한편으로 지방에 대한 안찰사(按察使)의 파견이 정례화되었다. 이에 따라 고려 중남부 지역에서는 안찰사를 위시한 사신의 파견 영역에 따라 새로이 각 도의 영역이 설정되어 갔으며, 이 과정에서 1106년(예종 1) 성종 대의 10도 중 관내도(關內道) 남부 지역 및 중원도(中原道), 하남도(河南道) 지역을 통합한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는 해당 지역의 주요 계수관인 양주(楊州)·광주(廣州)·충주(忠州)·청주(淸州)의 이름을 연결한 것이다.
[관련 기록]
『고려사(高麗史)』 권56, 지10, 지리1, 양광도,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권12, 명종1, 명종 1년 7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6, 광주목,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0, 과천현, 『태조실록(太祖實錄)』 권7, 태조 4년 6월 13일, 『세종실록(世宗實錄)』 권148 지리지, 경기에서 양광도 관련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내용]
양광도의 영역에는 경(京)이 1개, 목(牧)이 3개, 부(府)가 2개, 군(郡)이 27개, 현(縣)이 78개 편제되어 있다. 그 중 군현으로는 영군(領郡)이 5개, 속군(屬郡)이 22개이며, 영현(領縣)이 3개, 속현(屬縣)이 75개였다. 이 중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 영역을 포함하는 금주(衿州)와 과주(果州)는 각각 금주가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 수주(樹州) 아래에, 과주가 광주목(廣州牧) 아래에 편제되어 있었다.
[변천]
1106년(예종 1) 설치된 양광충청주도는 1171년(명종 1) 양광주도와 충청주도로 분리되었다가 곧 다시 합쳐졌으며 이후 ‘양광도’ 명칭과 ‘충청도’ 명칭이 상황에 따라 병행하여 사용되었다. 1314년(충숙왕 1)에는 정식 명칭을 양광도로 정하였다. 1356년(공민왕 5)에 충청도로 바꾸었으나, 이후의 기록에서도 양광도 명칭이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곧 양광도 명칭이 부활한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건국 이후 현재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영역을 포함한 양주와 광주 지역이 경기도에 완전히 편입되어 양광도 명칭의 근거가 사라졌기 때문에 1395년(조선 태조 4) 양광도의 남은 영역은 충청도로 개칭되었다.
[의의와 평가]
양광도를 위시한 5도는 설치 초기에는 행정구역보다 감찰구역으로서의 성격이 강했으나, 고려 후기로 갈수록 지방관 파견의 진전과 맞물려 점차 상급 행정단위로서의 성격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왕조 교체 이후로도 이어져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최고 행정구획인 도를 중심으로 한 지방제도의 완성으로 이어지게 된다. 수주와 광주의 속군현이었던 금주와 과주에 지방관인 감무(監務)가 파견되었던 것 역시 이러한 흐름의 일부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