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4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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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湧興靑年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본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인식 |
[정의]
일제 강점기 서울특별시 동작구 본동에서 결성된 청년 단체.
[개설]
일제 강점기인 1927년 1월 4일 결성된 뒤, 노량진청년회와 함께 노량진 일대에서 양대 청년 단체로 활동하였으며, 무산아동 교육기관으로 용흥강습소를 개설하여 운용하였다.
[설립 목적]
1927년 1월 4일 지역 유지 서칠룡(徐七龍)[초대 회장] 등이 발기·창립하였으며, 경기도 시흥군(始興郡) 북면(北面) 노량진(鷺梁津) 본동리(本洞里)[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본동]에 위치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창립 이래 회관 건축에 주력하여 1,000여 원의 비용으로 이해 9월 초에 건평(建坪) 28평을 기공하였고, 11월 초순경에 준공한 뒤 23일에 낙성(落成)축하식을 개최하였다. 식을 마친 후에 주연(酒宴)이 있었고, 밤에는 장화홍련전 전8권의 활동사진(活動寫眞)[무성 영화 등을 지치]을 상연하고 독창·댄스·소인극(素人劇)[전문 배우가 아닌 사람들이 하는 연극]을 공연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기도하여 살인철교(殺人鐵橋)라고 불리는 한강철교의 인도교(人道橋)를 1928년 5월 16일 밤부터 청년회 회원들이 세 사람씩 교대로 순찰하여 9명을 구조하였다. 이해 6월 2일에는 오후 7시 30분부터 은로학교(恩露學校)[현 공립 은로초등학교의 전신, 1908년 11월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본동에 설립되었으나 1940년 7월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으로 이전] 강당에서 춘계(春季) 강연회를 개최하였는데, 강사는 이돈화(李敦化)·방정환(方定煥)·최의순(崔義順) 3명이었다. 1934년 8월에는 수해를 입은 삼남(三南) 지방의 이재민을 구호하기 위하여 의연금과 구제품을 모집하여 조선일보사에 기탁하기도 하였다.
용흥청년회는 창립 후 첫 사업으로 무산자(無産者)가 많이 거주하는 노량진에 야학강습소(夜學講習所)를 개설하기로 결정하고, 1927년 11월 무산아동들을 교육할 목적으로 용흥강습소(湧興講習所)를 개설한 뒤, 1928년 1월 10일부터 남녀 아동 19명을 모집하여 개학하였다. 교역자(敎役者)는 회원 가운데 소장 서칠룡을 비롯해 교사 김윤성(金允成) 등 모두 7인이 분담하였다. 1928년 11월 24일에는 용흥청년회관 제1회 낙성 기념 및 개강 1주년 기념으로 수백 명의 관중이 모인 가운데 100여 명의 남녀 아동이 학예회(學藝會)를 개최하고 무도(舞蹈)·창가(唱歌)·윤도체조(輪導體操) 등을 선보였고, 많은 의연금이 답지하였다. 1930년 3월 29일에는 제2회 졸업식을 거행하였고, 1931년 10월 17·18일 이틀 동안에도 강습소 후원(後園)에서 학예회를 개최하였다.
1932년 3월 26일에는 강습소장 이강호(李康灝)와 지방 유지들이 회집하여, 제4회 졸업식에 이어 강습소의 강사로 5개년 동안 근속한 서진룡(徐鎭龍)·성상운(成祥運)의 5개년 근속포창식(勤續褒彰式)을 거행하였다. 두 사람은 철도공장 직공으로 고단한 생활을 하면서 하루도 결근하지 않는 헌신을 보였다. 1933년 1월 17·18일 양일간에는 6백여 점의 아동 작품 전람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1935년 11월에는 남녀 1백 20여 명을 수용하여 교육하였으며, 이 달 4·5일 양일에도 강습소의 강당에서 연중행사인 아동학예회를 개최하고, 창가·유희(遊戲)·연설 등 40여 종목을 공연하여 900여 명이 관람하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의의와 평가]
1920년 9월 13일 경기도 용인군(龍仁郡)에서 발기인 총회를 개최한 용흥(龍興)청년회와는 한자명이 다른 별개의 단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