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594
한자 徐甄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오기승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369년 - 서견 문과에 병과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391년 12월 - 서견 사헌장령(司憲掌令)으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92년 - 서견 유배
추모 시기/일시 1575년 2월 - 서견 대사간(大司諫) 추증
추모 시기/일시 1658년 - 서견 삼현사(三賢祠)에 배향
추모 시기/일시 1676년 - 서견 배향지가 충현서원(忠賢書院)으로 사액
추모 시기/일시 1689년 10월 - 서견 정문(旌門) 재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70~1871년 - 서견 배향지 충현서원 철폐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8년 - 서견 묘소 이장
거주|이주지 금주(衿州)|금천(衿川) -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 지도보기
부임|활동지 개경(開京) - 경기도 개성시
묘소|단소 고려충신장령서견묘(高麗忠臣掌令徐甄墓) - 경기도 의왕시 포일동 산81-2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이천(利川)
대표 관직 사헌장령(司憲掌令)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지역에 거주하였던 고려 후기의 문신.

[개설]

서견(徐甄)[?~?]은 고려 공양왕대 사헌장령(司憲掌令)으로 있으면서 이성계 일파에 대항하였으나 실패하고 유배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에는 다시 직접 회수와 함께 장 70대를 맞고 유배되었으며, 이후 오늘날 서울특별시 동작구 서부를 포함한 지역인 금천(衿川)에 살았다. 조선 태종이 누차 벼슬길에 나설 것을 제의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였으며 종신토록 한양성을 마주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가계]

서견의 본관은 이천(利川)이며, 아버지는 서찬(徐瓚)이다. 고려 전기의 명신으로 일컬어지는 서눌(徐訥), 서희(徐熙) 부자의 후손이다.

[활동 사항]

서견은 1369년(공민왕 18)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391년(공양왕 3) 12월 사헌장령(司憲掌令)으로 임명되었다. 1392년(공양왕 4) 좌상시(左常侍) 김진양(金震陽)이 정몽주(鄭夢周)와 연계하여 우상시(右常侍) 이확(李擴) 등과 함께 이성계의 측근인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윤소종(尹紹宗) 등을 탄핵할 때, 사헌부의 일원으로서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강회백(姜淮伯), 집의(執義) 정희(鄭熙) 등과 함께 상소하여 이에 동조하였다.

그러나 정몽주가 살해되고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그해 4월 김진양 등과 함께 유배되었으며, 같은 해 7월 조선 태조의 즉위교서를 통해 다시 직첩 회수 및 장 70대 후 유배에 처해졌다. 풀려난 이후 금주(衿州)에 거주하였다. 옛 묘소의 위치로 보아 오늘날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 일대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정확한 생몰년은 전해지지 않으나 1412년(태종 12) 서견을 힐문(詰問)하자는 신하들의 건의를 태종이 거부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있으므로 몰년은 1412년 이후인 것으로 볼 수 있다.

[학문과 저술]

고려를 사모하는 내용을 담았다는 이유로 1412년 힐문 요청 사건의 원인이 되었던 시가 『조선왕조실록』 및 『동문선(東文選)』 등에 전한다.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일대에 거주하던 시기에 지은 것으로,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천 년의 새 도읍이 한강 너머에 있는데[千載新都隔漢江]

충량한 신하들이 많이 나서서 밝은 임금을 돕는구나[忠良濟濟佐明王]

삼한을 하나로 만든 공이 어디에 있는가![統三爲一功安在]

도리어 전조(고려)의 왕업이 길지 못한 것을 한하노라[却恨前朝業不長]

이외에 본인을 눈 속의 외로운 대나무[雪中 孤竹]로 비유한 시조 한 수가 『청구영언(靑丘永言)』의 낙시조(樂時調) 단락에 서견의 작품으로 전해지고 있다.

[묘소]

서견의 묘소는 본래 서울 성남고등학교[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길 74] 자리에 있었으나, 성남고등학교의 건립으로 인하여 1938년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의왕시 포일동 산81-2에 있으며, 안동 김씨 서운관정공파 묘역에 속해 있다.

[상훈과 추모]

1575년(선조 8) 대사간(大司諫)으로 추증되었으며 같은 시기 정문(旌門)이 건립되었다. 1658년(효종 9) 강감찬, 이원익과 함께 금천현(衿川縣) 한천동(寒泉洞)의 삼현사(三賢祠)에 배향되었으며, 1676년(숙종 2) 삼현사가 충현서원(忠賢書院)으로 사액을 받았다. 1689년(숙종 15)에는 병자호란 당시 파괴되었던 서견의 정문을 다시 세우도록 하였다. 또한 1690년(숙종 16)에는 수진궁(壽進宮)에 속한 시장(柴場) 일부를 갈라서 그 자리에 충현서원을 옮겨 짓도록 하였다.

흥선대원군 집권기의 서원철폐 과정에서 1870, 1871년에는 사액서원에 대해서도 철폐조치를 취하였기에 충현서원도 이 시기 철폐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로 인해 충현서원 건물은 현존하지 않는다. 오늘날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939-11 일대가 한때 충현서원 터로 지목되어 1985년 6월 28일 경기도 기념물 제80호로 지정되었던 바 있으나, 정밀조사 결과 원 충현서원 터가 아님이 밝혀져 2010년 7월 16일 문화재 지정이 해제되었다.

[수정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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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일 제목 내용
2023.07.19 내용변경 [개설] 조선이 건국된 뒤에는 관직을 버리고 오늘날 서울특별시 동작구 서부를 포함한 지역인 금천(衿川)에 살았다. → 조선이 건국된 뒤에는 다시 직접 회수와 함께 장 70대를 맞고 유배되었으며, 이후 오늘날 서울특별시 동작구 서부를 포함한 지역인 금천(衿川)에 살았다. [활동사항] 그러나 정몽주가 살해되고 이성계 일파가 집권하면서 그해 4월 김진양 등과 함께 유배되었으며, 같은 해 7월 조선 태조의 즉위교서에서 다시 직첩 회수 및 장 70대 후 유배에 처해졌다. 풀려난 이후 벼슬길에서 물러나 금주(衿州)에 거주하였다. → 그러나 정몽주가 살해되고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그해 4월 김진양 등과 함께 유배되었으며, 같은 해 7월 조선 태조의 즉위교서를 통해 다시 직첩 회수 및 장 70대 후 유배에 처해졌다. 풀려난 이후 금주(衿州)에 거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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