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32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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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族譜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집필자 | 이규대 |
[정의]
본관을 같이 하는 성씨의 계통과 혈통 관계를 밝혀 놓은 씨족의 역사책.
[개설]
‘동조분파왈족(同祖分派曰族)’요 ‘소성고족왈보(昭姓考族曰譜)’라고 한다. 우리 역사에서 성씨(姓氏)가 보편화되는 시기는 고려 초기로 본다. 이 시기에 본관제(本貫制)가 시행되는 것에 근거한다고 보겠다. 이 시기에 그동안의 세거지(世居地)가 본관(本貫)이 되었고, 본관제의 시행은 중앙의 지방 통제책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씨와 본관제가 보편화되었다고 하여 족보(族譜)가 편찬되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이른바 관혼상제에서 불교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양측적 친족 관계가 유지되는 양상이었고, 이로 보면 고려 초기는 가부장적 친족 질서 내지 부계 중심의 종족 관념이 발달한 시기는 아니었다고 하겠다.
[족보 편찬]
족보의 편찬은 1476년(성종 7) 『안동 권씨 성화보(成化譜)』와 1562년(명종 17) 『문화 유씨 가정보(嘉靖譜)』, 그리고 1565년(명종 20) 『강릉 김씨 을축보(乙丑譜)』에서 그 시원을 찾는다. 이로 보면 족보가 편찬되는 시기는 조선 초기로 보아야 한다. 다만 조선이 건국되고도 한 세기 정도 경과하면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이 시기의 족보는 그 기재 양식을 통해 당시의 종족 관념과 이에 토대한 사회상의 변화를 규명할 수 있는 자료로서 주목되기도 한다.
족보는 성리학에 기초한 종법(宗法) 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말에 성리학이 수입되었고, 이 신유학을 건국 이념으로 수용하면서 조선이 건국되었지만 새로운 건국 이념이 전국 지방 사회에 정착되기까지의 과도기가 설정된다. 이로써 가장 이른 시기에 편찬되는 족보라고 하더라도 이 과도기를 경과하면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순리적이라고 하겠다.
족보의 편찬은 17세기에 활발해졌다면, 18~19세기에는 보편적 양상이었다고 정리될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가부장적 사회 질서의 정립과 맞물려 있다. 16~17세기에 동족 마을 내지 집성촌의 형성이 활발해지는 것도 이러한 종족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하겠고, 이러한 종족 관념에 근거하여 관혼상제의 생활 양태가 변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족보 편찬이 보편화되는 것은 이러한 생활 양태의 변화와 병행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족보의 기재 양식은 정형화된다. 종적으로 세계(世系) 즉 부자(父子) 관계를 설정하고 횡적으로 같은 세대를 장자(長子) 우선순위로 설정하는 형태로 고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도 시대별 변화상을 짚어 볼 수 있다. 가장 주목되는 점이 양자(養子) 제도이다. 이른 시기에 편찬된 족보상에서 양자가 영입되는 양상은 파악되지 않는다. 이 점을 가계(家系) 내지 혈통 계승 의식이 보편화되지 않은 상태를 반영하는 것으로 본다면, 후기에 파악되는 양자 제도는 또 한 시기를 경과하여 도입되는 종족 관념, 즉 혈통 계승 의식의 산물로 볼 수 있겠다.
족보의 종류도 후대에 이르면서 다양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당초에는 본관지에서 토성(土姓)을 중심으로 편찬되기 시작하였다면, 후대에 오면서 현조(顯祖)를 중심으로 이른바 파보(派譜)가 편찬되는 추이를 살필 수 있다. 이를 위해 가호마다 자신들의 계보를 정리한 가승(家乘)의 작성이 보편화된다. 이로써 족보는 대동보(大同譜)와 파보로 대별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추이에 따라 족보 편찬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는 족회(族會) 또한 대종회(大宗會)·대문중(大門中)과 소문중(小門中)으로 대별될 수 있다.
[문중 조직]
문중 조직의 중심에는 족장(族長)과 종손(宗孫)이 존재하였다. 문중 조직의 회의체로서 문회(門會) 내지 종회(宗會)를 이끌어 가는 역할을 족장이 수행하였다면, 종손은 씨족의 종가(宗家)를 계승하면서 씨족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역할은 상호 보완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선조의 시묘(侍墓)와 시제(時祭)를 주관하고, 족보·문집(文集)·행장(行狀)을 편찬하고, 사당(祠堂)과 재실(齋室) 등을 건축하여 관리 운영하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씨족의 결속과 화합을 도모하였다.
한편으로 문장(門長)과 종손 사이에는 갈등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문중의 재산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두드러진다. 문중 조직의 특성상 각종 명목의 위답(位畓)이 형성되었는데, 이러한 공동 재산의 운영을 둘러싸고 조직의 구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자들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갈등은 주로 문회 내지 종회에서 야기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문회 내지 종회는 회의체로서 문중 조직의 공론을 형성하는 기능을 하였고, 이러한 공론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그 주도적 역할을 이행하는 자들 사이에서 갈등이 야기되는 것이다. 특히 조선 후기에 들어서 문중 조직에서 문중 서원(門中 書院)을 구성하여 운영하거나, 지방 사회의 각종 공공 기구의 운영권을 주도하기 위한 문중 간의 대립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문중 조직의 내부적 갈등이 두드러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갈등은 각종 사안의 사체(事體), 즉 사리(事理)와 체면(體面)을 중시하는 것으로서 지방 사회에서 야기되는 이른바 전례 논쟁(典例 論爭)의 성격을 가진다.
[강릉 지방의 족도]
강릉 지방에서 족보가 편찬되기 이전의 형태로 족도(族圖)가 전승되었다. 이것은 강릉 부사를 역임한 이신효(李愼孝)가 작도(作圖)하였다고 전한다. 이신효는 1476년(성종 7)에 강릉 부사를 역임하였고, 이 무렵 그는 강릉 김씨의 외손으로서 강릉 지방의 족도를 편찬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족도는 읍리(邑吏)들이 부사(府司)에 보관하여 전승하였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부사는 호장(戶長)이 근무하는 관청이라고 보면 그 전승 상황은 고려 시대의 유풍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족도는 훗날 족보가 편찬되는 시기에 이르러 소중한 자료로 활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강릉 지방 족보의 편찬 시기]
강릉 지방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편찬되는 족보는 강릉 김씨의 을축보이다. 즉 1565년에 편찬되었는데, 당시 강릉 부사로 재직하였던 김첨경(金添慶)이 족인으로서 족보 편찬의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한다. 김첨경은 1561년(명종 16)부터 1565년까지 강릉 부사로 재임하였으니, 그의 재직 말년에 완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족보는 전국적인 족보 편찬 추이에서 보면 그 초기에 편찬되는 족보로서 평가되며, 이러한 양상은 강릉 지방에 이른바 종법(宗法) 의식이 일찍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강릉 지방 족보의 편찬 추이]
『강릉 김씨 을축보』에 이어서 편찬되는 족보는 최문한(崔文漢)을 시조로 하는 강릉 최씨의 기해보(己亥譜)이다. 즉 1659년(효종 10)에 편찬되었다. 이로써 이 지방의 최초의 족보와 두 번째 족보의 편찬 시기는 무려 94년의 시차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강릉 지방에서 세거하는 성씨들의 족보는 18세기에 집중적으로 편찬되고 있다. 이 시기까지의 편찬된 족보 14건 중에서 12건이 18세기에 편찬되고 있다. 여기에는 물론 창시보를 비롯해 연찬되는 족보들이 포함된다. 이로써 보면 이른바 ‘족보의 시대’라고 하면 18세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방사적 의미]
16세기에 족보가 편찬되었다는 사실은 이 시기에 이미 종법(宗法) 의식이 지방 사회에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 준다. 다만 이 시기의 족보 기재 양식이 어떤 양상이었는가는 좀 더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현재 『강릉 김씨 을축보』는 새로이 출간되어 족인들이 소장하고 있으나, 새로이 편집된 것이지 아니면 옛 것을 그대로 복제한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강릉 지방에 세거하는 성씨들의 창시보는 상계(上系)를 파악하고 확인하는 데 주안점이 두어졌다면, 이어서 연찬되는 족보나 18세기에 편찬되는 족보에서는 각 성씨의 현조(顯祖)와 그들의 업적을 강조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사회적으로 족보에 대한 인식이 변모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