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5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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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永昌大君 |
이칭/별칭 | 이의(李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상면 태봉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근하 |
[정의]
경기도 가평군에 태실이 있는 조선 후기 왕족.
[가계]
영창대군(永昌大君)[1606~1614]의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이름은 이의(李㼁)이다. 아버지는 조선 제14대 국왕 선조이다. 어머니는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仁穆王后)로,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딸이다. 이복 형이자 정빈(貞嬪) 홍씨의 아들인 경창군(慶昌君)의 넷째 아들 창성군(昌城君)을 사후 양자로 지명하여 가계를 이어갔다.
[활동 사항]
영창대군은 선조의 아들 중 유일한 정비 소생이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공빈(恭嬪) 김씨의 소생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6년(선조 39)에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선조는 세자를 정비 소생인 영창대군으로 교체하고자 하였다.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유영경(柳永慶) 등의 소북파(小北派)가 선조의 생각에 동조하였으나, 1608년(선조 41)에 선조가 사망하면서 계획이 무산되었다. 선조는 죽으면서 한준겸(韓浚謙), 황신(黃愼), 박동량(朴東亮), 신흠(申欽), 서성(徐渻), 허욱(許頊), 한응인(韓應寅) 등 일곱 명의 대신에게 영창대군을 돌봐달라는 유교(遺敎)를 내려 뒷일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죽은 뒤 즉위한 광해군은 대북파인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 등을 등용하였다. 그리고 1613년(광해군 5) 박응서(朴應瑞), 서양갑(徐羊甲) 등 7명의 서출들이 역모를 꾸몄다는 ‘7서의 옥’이 일어났다. 당시 포도대장이었던 정항(鄭沆)과 한희길(韓希吉)은 이이첨 등에게 사주를 받아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이 중심이 되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하였다는 내용을 자백 받았다. 김제남은 사사되었고, 영창대군은 서인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죄인이 유배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가두는 형벌]되었다.
그 뒤 영창대군이 어린 아이이고 광해군의 형제라는 이유로 구원을 청하는 상소가 연이어 올라갔지만, 대북파의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1614년(광해군 6) 이이첨 등의 명을 받은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 살해되었다. 『광해군일기』에 의하면 정항이 영창대군의 밥을 끊고 온돌을 뜨겁게 달구어 증살(蒸殺)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인조실록』에는 광해군의 밀명을 받은 별장(別將) 이정표(李廷彪)가 음식에 잿물을 넣어 죽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대의 여러 문집에서도 영창대군의 죽음에 대해 이견이 많아 어느 기록이 정확한지 알기 어렵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직후 관작이 복구되었다. 경기도 가평군 상면 태봉리에 있는 태실이 영창대군의 태실로 전해지고 있다.
[묘소]
영창대군의 묘는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고은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