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743 |
---|---|
한자 | 李忠應 |
영어공식명칭 | I Chungeung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조성운 |
출생 시기/일시 | 1856년 6월 3일 - 이충응 출생 |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895년 - 을미사변 발생 |
활동 시기/일시 | 1896년 - 이충응 보납산 전투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896년 6월 15일 - 이충응 사망 |
출생지 | 이충응 출생지 -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승안리 |
거주|이주지 | 이충응 이주지 -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승안리 |
활동지 | 이충응 의병 활동지 - 경기도 가평군 |
성격 | 의병장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춘천의병 아장 |
[정의]
개항기 경기도 가평 출신의 의병장.
[가계]
이충응(李忠應)[1856~1896]의 아버지는 이인화(李寅和)이며, 1856년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승안리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신재조(申在朝)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충응(李忠應)은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발표되자 분개하여 처삼촌인 신재희(申在熹)와 함께 거의(擧義)하여 의병장이 되었다. 신재희(申在熹), 신경홍(申敬弘) 등은 가평의 고을마다 방문을 붙이고 사발통문을 보내어 춘천의병에 합류하여 일제에 저항하자며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때 이충응 휘하에서 의병에 참여한 인물은 정문위(鄭文緯), 이관구(李觀九), 이범구(李範九), 박래병(朴來秉) 등이었다. 이충응은 1896년 1월 20일 이소응(李昭應)이 이끄는 춘천의병(春川義兵)에 합류하여 아장(亞將)으로 활동하였다.
1896년 음력 2월 1일 이충응이 합류한 춘천의병은 서울로 향하였는데, 이때의 광경을 목격한 수춘산인(壽春山人)은 “각색대장(各色大將)은 아관박대(峨冠博帶)로 사인교(四人橋)에 일산(日傘)을 밧고 압뒤에 병정과 포수가 옹호하고 가며 기외(其外) 장교는 대개 말과 노새 당나귀 등을 탓는데 그 중 당나귀가 제일 만어서 울 때이면 이 곳에서도 ‘꿍까꿍까’ 저곳에서도 ‘꿍까꿍까’ 하고 깃발은 마치 서낭때 같은 기에다 도적토벌(圖賊討伐), 국모보수(國母報酬), 배양(排洋)[이자략(二字略)-원문] 단발불복(斷髮不服) 등 기기문자(奇奇文字)를 써서 들었고 앞에는 나팔, 북, 삼현 육각(六角) 등을 불고 두드리며 나아가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창검(槍劍)은 일월을 희롱하는 듯 하였다. 군병을 위시하야 군량(軍糧)하는 마견(馬䭾)까지 어찌 수가 많았던지 춘천읍(春川邑)에서 7, 8인(人) 내지 십수인(十數人)식 일렬을 지은 것이 가평군경(加平郡境)까지 약 50리의 장사진(長蛇陣)을 쳤었다. 그 때의 기세로 말하면 서울은 그만두고 천하라도 다 집어 칠 것 같았다.”고 묘사하였다.
그러나 2월 28일 이충응의 부대는 가평 보납산 전투에서 관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기후가 고르지 못하고 훈련 부족으로 패해 가평 북면으로 일시 이동하였다. 같은 해 4월 9일에는 춘천으로 진군하던 경군(京軍)을 매복 공격하여 20여 명을 사살하고 20여정의 신식총을 비롯한 다수의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7월 25일[음력 6월 15일]에는 포수 신경홍으로 하여금 관군의 상황을 정탐하게 한 후 가평에 주둔하고 있는 관군을 토벌하기 위해 18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가평군청을 기습하여 초반에 승기를 잡았다. 그러나 신식무기로 무장한 관군의 역습으로 실패한 후 곧이어 벌어진 대곡리 전투에서 의병 20여명이 전사하였으며 이충응은 부대장 신재희와 함께 관군에 생포되어 처형되었다. 관군은 이충응을 처형하기 직전에 회유하였으나 이충응은 “나는 나라를 위해 의병이 되었거늘 어찌 너희들 적자(賊子)들에게 항복한단 말인가. 내 목을 베지 않으려거든 차라리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어야 마땅하리라.” 하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이충응은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