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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1720
한자 文化遺産
영어음역 Munhwajae
영어의미역 Cultural Heritage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해준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에 있는 옛사람들이 남겨놓은 유·무형의 자산.

[개설]

공주 지역은 60여 년간 백제의 왕도로서 역사상 특별히 부각되고 있고, 공주 공산성이나 무령왕릉 같은 유적들이 그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공주의 역사는 비단 백제시대에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백제의 왕도였다는 사실에 비해 더 길고 오랜, 그리고 복잡한 역사의 흔적들이 공주 지역에 남아 있다. 공주는 조선시대 충청도의 감영이 위치했던 곳일 뿐만 아니라 그 이전 통일신라 때나 고려시대에도 공주의 역사는 끊임없이 이어져 왔던 것이다. 따라서 공주 지역의 문화재와 문화 유적은 매우 다양하다.

공주는 충청 지역 역사·문화의 중심지로서 문화, 교통, 물산의 중심 거점이었다. 따라서 각 시기마다 외침이나 사회 변화 같은 사건이 있었을 때 어김없이 그와 관련된 역사가 공주 지역에 많은 문화재를 남겼다. 공산성 쌍수정이괄의 난을 피해 왔던 인조의 유적이 있고, 천주교 신자들이 붙잡혀 죽은 황새바위 천주교도 순교지가 있으며, 동학 농민 혁명의 깃발이 우금치에서 드날렸던 것 모두가 공주의 문화재이자 역사인 것이다.

문화재는 공주 지역 전역에 골고루 퍼져 있다. 대체로 구석기 유적부터 근대 유적까지 망라되어 있는데, 이들은 종류별, 혹은 시간별로 나름의 분포 특성이 있다. 공주 지역의 문화재는 내용면서도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선사시대]

고마나루’, ‘곰나루’의 한자음인 웅진이란 지명은 백제의 천도 때 비로소 불린 것이라기보다 곰나루의 전설이 보여주듯, 그 이전부터 불렸던 것이며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이나, 청동기에서 초기 철기시대의 공주 지역의 문화 유적들도 그러한 전통을 말해주고 있다.

공주 지역에서 조사된 선사 유적은 지표상에서 구조물을 확인할 수 있는 고인돌이나 입석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도로 공사와 같은 개발이 진행되면서 이루어진 발굴 조사를 통하여 새로이 발견, 조사된 유적이 상당히 많아졌다.

무엇보다도 공주 지역의 선사 유적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과 장원리 신석기시대 유적이다. 이들 유적은 공주 지역에서 인류의 거주가 이루어진 시기를 구석기시대까지 올려놓았고, 이후에도 청동기시대의 유적은 주거지와 분묘, 그리고 입석 등의 자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 내용을 갖춘 유적으로 확인되어 공주 지역 선사 문화의 다양성을 살필 수 있는 구체적인 근거로 제시된다.

원삼국시대의 유적은 삼국시대의 기반이 되는 문화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주 지역에서 그 흔적은 많지 않다. 물론 조사의 미비에 원인이 있겠지만, 지금까지 확인된 것은 장기면하봉리 고분군, 이인면 이인리 토광묘, 분강·저석리 고분군, 그리고 최근에 조사된 정안면 장원리의 유적들이 있을 뿐이다. 조사 및 확인된 유적은 공주 전역에 분포되어 있었지만 수적으로 상대적 빈약성을 드러냈으며, 유적의 밀집성 또한 떨어질 뿐만 아니라 규모도 작은 편이다.

[삼국시대]

삼국시대의 유적은 백제의 것이 중심을 이루는데, 이는 삼국시대의 공주가 백제의 영역에 속하였기 때문이다. 공주 지역에 남아 있는 백제 유적은 생활 유적에서 매장 유적, 신앙 유적까지 종류가 다양하고, 질적인 면에서 우수성도 돋보인다. 매장 유적으로 무령왕릉을 비롯한 백제 고분군과 공주 공산성 내의 유적이 그것이다.

물론 공주 공산성의 유적이 당시의 왕궁이란 점에는 이견도 있다. 그러나 현재 상태로는 백제의 웅진 도읍 시기에 왕궁이 웅진성 내에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공주 공산성 내 백제시대의 건물지 등의 유적은 왕궁과 관련된 시설로 볼 수 있다.

백제 멸망 후에 조성된 유적은 대체로 시기별로 다양한 특성을 갖춘 채 존재한다. 예컨대 통일신라시대의 것은 지방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시설들, 그리고 그와 관련된 사람들에 의해 조영된 것들이 남아 있다. 또한 이 시기의 유적은 백제시대 유적 위에 중층으로 남아 있는 것이 많다. 통일신라 때의 유적은 불교 관련 시설이 크게 증가했다는 점이 주목되며, 이러한 현상은 고려시대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조선시대]

공주 지역의 유적 내용이 질적인 면에서나 양적인 면에서 크게 확대된 것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공주 지역의 불교 유적은 상대적으로 적어진 반면, 유교와 관련된 향교나 서원이 증대되었고, 그와 관련된 각종 묘비가 확대되어 유적의 숫자가 크게 증가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공주 지역의 문화 유적은 시기별, 혹은 내용별로 균형 있게 확인된다. 조선 후기의 향촌 세력을 점검하는 데 있어서 서원과 사우는 그 어느 유적보다 중요하다. 이러한 서원이나 사우, 정려의 건립은 사족 집안의 경우 단순한 도덕적, 윤리적 차원뿐 아니라 후손들의 사회적 명망이나 지위와도 관련이 있어 그 지역의 사족 세력의 추이와도 관련이 있다.

[특징]

공주 지역의 문화재 및 문화 유적은 양적인 면뿐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한 측면이 있다. 이는 국보, 혹은 보물로 지정된 것의 내용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공주 지역의 문화재는 국가 지정 문화재, 도 지정 문화재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특히 공주의 지정 문화재 중에는 주목받고 있는 국보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대부분 무령왕릉 출토품이라는 한계가 있기는 하다. 공주 의당금동보살입상을 제외하고 모두 무령왕릉 출토품이기 때문이다. 보물의 경우 불교 관련 유적과 유물이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시기적 다양성은 당연히 돋보인다. 이로 보아 공주 지역은 백제의 고도였음에도 백제와 관련된 유적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문화재의 질적 및 양적인 면에서 다양성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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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공주시지정문화재현황

[의의와 평가]

공주 지역의 문화재는 결국 공주의 역사, 나아가 공주 지역 사람들이 이곳을 터전으로 삼으면서 만들어낸 문화 유산이다. 이들 문화재는 공주 지역만의 특수성, 즉 공주 지역만이 가진 지정학적 조건을 그대로 함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삼국시대의 유적은 백제시대 때의 유적만 있다. 왕도였던 까닭에 그와 관련된 유적이 망라되어 남아 있다. 또한 백제 이후 공주 지역은 명실상부한 지방 거점으로 자리한다. 때문에 그와 관련된 유적들은 지방 수부로서의 역할과 관계된 것이 많이 있다.

특히 조선시대에 이르면 사회 규모의 확대나 통치 체제의 정비 등으로 지방별로 행정 수요가 증대되었고, 그에 따른 각종 시설이 확대되기에 이른다. 여기에 새롭게 유학이 사회의 지도 이념으로 자리하면서, 그와 관련된 시설도 적지않게 증가한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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