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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동면 3·1 만세시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0387
한자 雙洞面三-一萬歲示威
영어의미역 Independence Movement in Ssangdong-mye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매촌리|신촌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919년 3월 하순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매촌리|신촌리지도보기
관련인물/단체 최경현|오성열|서병직|이준이|최홍석|전하성

[정의]

1919년 3월 하순 경상북도 고령군 쌍동면[현 고령군 쌍림면]에서 계획한 만세 시위.

[역사적 배경]

3·1운동은 국내외의 긴박한 정세에서 발생의 배경을 찾을 수 있다. 1914년 일어난 제1차 세계 대전과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변화된 세계정세는 민족 문제에 대한 자각을 높이고 한반도를 비롯한 피압박 약소민족의 해방을 고무시켰다. 1918년 1월 제1차 세계 대전을 마무리하는 원칙으로 미국 윌슨 대통령이 내걸은 민족 자결 주의도 식민지 피억압 민족에게 독립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일제는 강제적으로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뒤 ‘군사적 제국주의’ 차원의 폭력성이 내포된 무단 통치를 실시하였다. 일제는 식민지 수탈 구조의 구축 작업을 추진하였는데, 먼저 식민지 조선의 금융 지배를 위해 화폐 정리 사업을 착수하였다. 근대적 운송망의 구축 역시 일제가 일찍부터 착수한 것인데, 경부선 철도의 부설이 그것이다. 이에 고령은 낙동강 수운을 통한 경제 활동에 타격을 입게 되었다.

또 일제는 토지 조사 사업을 실시해 일제 자본의 자유로운 농촌 침투와 그 지배를 실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령 지역의 많은 토지 소유권이 일제로 바뀌는 결과를 낳음과 동시에 식민지 지주제가 관철되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는 이런 정책의 온전한 수행을 위해 모든 행정력과 경찰력을 동원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제의 폭압성과 강제력이 자행되어 지역민은 수탈과 지배를 받는 고통을 겪게 되었다.

[경과]

3·1운동 만세 시위가 전국으로 번져 나갈 때, 고령군 쌍동면 매촌리에 사는 최경현(崔卿鉉)은 3월 24일 서당을 운영하고 있던 오성열(吳聖烈)의 집에서 서병직(徐丙稷)을 만나 일제의 폭압적 지배와 수탈 구조의 부당함과 민족 독립의 의지를 확인하였다. 이들은 추후 전 군민이 참여하는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고, 함께 할 동지를 확보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기로 하였다. 3월 27일 이준이(李俊伊)와 최홍석(崔洪錫)에게 만세 시위의 계획을 알리고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또 3월 28일 쌍동면 신촌리에 사는 전하성(全夏盛)을 만나 같은 취지의 만세 시위 계획을 설명하고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쌍동면의 만세 시위 계획은 차츰 동지를 확보하는 가운데 실행만 남겨 두게 되었다. 그러나 계획이 도중에 탄로되어 최경현이 일제 관헌에 체포되었다. 이로써 쌍동면의 만세 시위는 중단되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쌍동면 3·1 만세시위는 거사가 탄로나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였지만, 고령 지역의 첫 번째 만세 운동으로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또한 고령군에서 만세 시위운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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