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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고종31) 백부걸을 별군관에 임명하고 출두를 명한 전령. 1894년 소모사(召募使)가 업무(業武) 백부걸을 별군관에 임명하고 소모영에 출두할 것을 명하는 전령이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동학군을 토벌하기 위해 설치한 소모영을 별도로 설치하고 소모사를 파견하였다. 본 문서는 소모영에서 백문걸을 별군관으로 임명하고 출두를 종용한 전령이다. 동학농민전쟁과 관련한 자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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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고종 5) 장봉규(張鳳逵)가 자신의 이름을 장석봉(張錫鳳)으로 개명하는 이조(吏曹)의 초기(草記). 장석봉의 자는 기백(紀百), 호는 오하(梧下)이다. 인동장씨 여헌 장현광의 후손이고, 사호옹(四好翁) 장학추(張學樞)의 아들이다. 1840년(헌종 6)에 식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장릉참봉, 휘릉령, 청안현감, 천안군수, 전주부판관, 청주진병마첨절제사를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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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운동 시 경상북도 구미 지역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구미 지역의 3·1운동은 3월 12일 진평동에서 시작되어 약 한 달 동안 전개되었다. 진평동 독립만세운동은 3월 12일부터 14일까지 3일 동안 4차례에 걸쳐 적게는 20~30명에서부터 많게는 200여 명이 참여했으며, 체포되어 6개월 이상 감옥 생활을 한 인사만도 25명이나 되었다. 또 4월 3일 해평면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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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구미 출신의 문신. 본관은 신천(信川). 아버지는 강익연(康翼然)이다. 강시갑(康始甲)은 1889년(고종 26) 알성시에 급제하였으며, 가주서(假注書)에 등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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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월호리에 있던 조선 말 유곡찰방(幽谷察訪) 고영석(高永錫)의 송덕비. 선산 지역 내에는 구미(仇尾), 안곡(安谷), 연향(延香), 상림(上林) 등 4역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이 역들은 유곡찰방의 관할 하에 있었다. 이에 따라 옛 연향역이 있었던 해평에 유곡찰방인 고영석의 선정비가 세워졌다. 구미시 해평면 해평리 해평중학교 내 운동장 담장 아래에 장한 효자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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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구포동에 있는 조선 말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 조선 말 흥선대원군이 1866년(고종 3)의 병인양요와 1871년(고종 8)의 신미양요를 겪은 이후 내부적으로 쇄국의 의지를 다지고 외세의 침입을 경계하면서 온 나라에 경고하기 위하여 서울 종로와 전국의 주요 도로변에 건립하였다. 구미 척화비의 경우 칠곡 사람들이 서울로 드나드는 길목인 지금의 위치에 건립하였다.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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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경보는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을 때, 이상백 등과 함께 진평동의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7일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학생 이영식(李永植)이 독립선언서 20매를 가져와 마을의 유지 이상백 등에게 전달하였는데, 권경보는 이상백 의 만세 운동 권유를 받아들여 거사일을 3월 12일로 정하고, 3월 11일에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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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권영해는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을 때, 이상백 등과 함께 진평동의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7일 대구 계성학교 학생 이영식(李永植)이 독립선언서 약 20매를 가지고 진평동에 사는 이상백(李相柏)의 집으로 찾아왔는데, 권영해는 이상백의 권유를 받고 이범성(李範成)·이내성(李乃成)·이영래(李榮來)·임점석(林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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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아버지는 권영우(權寧禹)이며, 경상북도 구미시 도개면 도개리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권오환(權五煥)은 1919년 4월 12일 선산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고향인 선산(善山)에서는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지 않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4월 12일 선산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 운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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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아버지는 권상근(權相瑾)이며, 경상북도 구미시 시미동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권쾌복은 대구사범학교에 다니던 1941년 2월 15일 같은 학교 학생 문홍의(文洪義)·배학보(裴鶴甫) 등과 함께 항일 결사 다혁당(茶革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다혁당은 대구사범학교에 조직되어 있던 비밀결사 문예부·연구회의 항일 정신을 계승하였을 뿐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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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이후부터 현대까지 경상북도 구미시의 역사. 구미 지역은 1895년 지방제도의 개편 때 선산군·인동군으로 설립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선산군은 선산면과 고아면으로 분리되고, 인동군은 폐지되어 칠곡군에 병합되었다. 해방 후 1963년 선산군의 구미면이 구미읍으로 승격되었고, 1978년에는 구미읍과 인동면이 통합하여 구미시로 승격하면서 선산면에서 분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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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에 있는 조선 말 흥선대원군이 금오산성을 수축한 후 세운 송덕비. 조선 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1866년(고종 3)의 병인양요 후 유비무환의 자세로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전국의 여러 산성을 수축할 때, 금오산성도 함께 수축되었다. 송공비에 따르면 이때 내성을 수축했는데 누각 규모가 100여 칸에 이르렀고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관아와 군창을 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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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관묵(金寬默)은 김태동(金太東)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자는 직부(直夫), 호는 경재(敬齋)이다.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읍 원호리에서 태어나서 자라다가 15세 때 아버지를 따라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으로 이사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자, 가조면에서도 3월 20일 장기리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 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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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언론인이자 학자. 김규환(金圭煥)은 제4대 국회의원을 지낸 아버지 매암(梅巖) 김동석(金東錫)과 어머니 의성김씨(義城金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본에 유학하여 신문학을 전공하고 돌아와 서울대학교 신문학과 교수로서 학계뿐 아니라 한국신문학회와 국제신문인협회 등에 관계하여 한국의 언론계의 발전을 주도하였다. 김규환은 1947년 서울대학교 예과를 수료하였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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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도길(金道吉)은 1919년 3월 14일 경상북도 구미시 진평동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진평동의 만세 운동은 1919년 3월 7일 대구 계성학교 학생 이영식(李永植)이 독립선언서 20매를 가져와 마을 유지 이상백(李相柏)과 상의하면서 추진되었다. 이상백과 김도길 등은 3월 12일 오후 8시 200여 명의 주민들을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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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동석(金東錫)은 호가 매암(梅巖)이며, 순충공(順忠公) 김선궁(金宣弓)의 32세손이다. 고조할아버지는 장사랑 김지복(金志複)이고, 증조할아버지는 호조참판 김기열(金基烈)이다. 할아버지는 숭인전참봉 김진규(金鎭奎)이며, 아버지는 농산중추원참의관 김희수(金熙洙)이며, 어머니는 단양장씨(丹陽張氏) 장옥선(張玉善)이다. 김동석은 대구협성학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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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무을면 송삼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때의 김동태와 아들 김문환의 송덕비. 참봉 김동태와 그 아들인 김문환은 대를 이어서 지역의 주민들에게 많은 덕을 베풀어 주었으며, 주민들이 그 공을 기려서 비를 세웠다. 구미시 무을면 송삼리 지방도 68호선 변에 3기의 선정비와 함께 세워져 있다. 비석은 높이 100㎝, 너비 34㎝, 두께 14㎝의 비신에 높이 36㎝, 너비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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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독동리에 있는 개항기 인물 김명진에 대한 선정비. ‘순찰사김상국명진청덕선정비(巡察使金相國明鎭淸德善政碑)’는 1888년(고종 25)에 경상도관찰사로서 군비 태세를 살피는 순찰사를 겸직하여 도내를 순력하였으며, 이 해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해지자 이를 진휼(賑恤)하고 조세를 감면해 주도록 하였다. 경상도관찰사로서 치적을 쌓은 것을 기려 백성들이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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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내고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때 인물 김봉수의 송덕비(頌德碑). 김봉수는 농경지에 물을 대기 위하여 소규모의 둑을 쌓고 흐르는 냇물을 막아두는 저수 시설인 낙성보의 도감으로서 35년간 노력을 다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혜택을 받은 백성들이 이를 기려서 비를 세웠다. 구미시 선산읍 내고리 매실교 북편 산기슭 아래의 비각 안에 있다. 팔작지붕 덮개돌의 높이는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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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원리에 있는 조선 말의 선산부사 김사철 송덕비. 김사철의 자는 자유(子由)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경기도 수원 출신으로 1878년(고종 15) 문과에 급제한 뒤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거쳤다. 1890년(고종 27) 9월 선산부사로 도임하여 1892년(고종 29) 8월 이임하였다. 1910년 일제에 병탄당한 뒤 일제로부터 남작 작호를 받았다. 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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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성윤은 이영식, 이상백 등과 독립 만세 운동을 하기로 결정하고, 3월 11일에 진평동 이상백 의 집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하였다. 3월 12일 밤 8시경 동민 200여 명과 함께 마을 뒷산에서 만세 시위를 일으켰으나, 일본 경찰의 탄압으로 주동 인물 일부가 체포되면서 해산되었다. 그러나 3월 13일 오후 4시경 같은 장소에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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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무을면 웅곡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때의 도감(都監) 김수령의 송덕비. 김봉수는 농경지에 물을 대기 위한 저수 시설인 웅곡지의 도감으로서, 못의 축조에 기여한 공로와 혜택을 입은 몽리자(蒙利者)들의 발의로 비석을 건립하게 되었다. 구미시 무을면 웅곡리 지방도 920호선 변 경사면에 세워져 있다. 높이 80㎝, 너비 34㎝, 두께 9.5㎝의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팔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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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일선. 자는 응종(應鐘)이고, 호는 동은(東隱). 찰방 김취련(金就鍊)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김재돈(金載敦)이다. 김수호는 동지들과 신간회(新幹會)를 만들어 항일운동을 주도하였고, 일본 경찰의 주요 감시 대상 인물로 지목되었다. 광복 후에는 분열된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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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항일운동가. 김영득은 호는 유영(幽影)이며, 아버지는 김현묵(金賢默)이다. 김영득은 구미보통학교를 거쳐 대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대구고등보통학교에서 이갑기 등 학우들과 독서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에 앞장섰다가 퇴학을 당하였다. 다시 보성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여 1925년 3월 졸업하였으며, 이후 문예 활동을 통한 민중 계몽 운동에 전념하였다. 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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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화가이자 학자. 1904년 구미시 선산 지역에서 태어났다. 호는 근원, 선부, 검려, 우산, 노시산방주인 등이다. 김용준은 1925년 경성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31년 일본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학창 시절부터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는 등 재능을 나타내었고, 동경미술학교에 유학하여 서양화를 공부하고 돌아온 1933년부터 1938년까지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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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정치가. 김윤환은 경북고등학교와 경북대학교 영문학과를 거쳐 미국 오하이오대학교 신문대학원을 수료하였다. 1955년부터 대구일보사를 시작으로 동화통신을 거쳐 조선일보사의 기자로 활동하였다. 이후 주일·주미 특파원으로 활동하였고, 1975년부터 조선일보사의 편집국장을 역임하였다. 1979년 제10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이후 11·13·14·15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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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의경(金義景)은 권오환(權五煥)·이원길(李元吉)·박희목(朴喜穆)·전용신(田容信) 등과 함께 독립 만세 운동을 펼칠 것을 계획하였다. 1919년 4월 12일 선산읍 장터에서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독립 만세 운동을 이끌었다. 이로 인해 체포되어 1919년 5월 2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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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정치가. 김재규는 1945년 경북사범대학교 중등교원 양성소를 수료하고 김천중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다가 1946년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 1952년 육군대학을 졸업하였고, 1954년 연대장을 거쳐 1957년 육군대학 부학장을 지냈다.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호남비료 사장으로 임명되었고, 1964년 6·3사태 때에는 준장으로 계엄군을 지휘하였으며,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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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정묵(金正默)은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14년 북경서성중국대학(北京西城中國大學) 정치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15년 항일투쟁을 목적으로 중국 동삼성(東三省) 장작림(張作霖) 휘하 곽송령(郭松齡) 부대에 입대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1918년 밀입국하여 장진홍(張鎭弘)과 독립운동 방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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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종철(金鍾哲)은 도개면 다곡리에서 태어났다. 대구농림학교 졸업 후 1944년 9월 20일 일본군에 강제 징병되어 평양에 주재하는 일본군 제44부대에 배속되었다. 이후 일본군 회부대(檜部隊)의 보충병으로 중국 한구(漢口)로 이동 배치되었다. 일본군을 탈출하기 위해 은밀히 중국어를 익히고 주변 지리를 파악하며 탈출 계획을 준비하였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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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독동리에 있는 조선 말 김호겸의 선정비. 김호겸(金好謙)은 1888년(고종 25) 선산부사로 부임하여 1890년(고종 27)에 황주목사(黃州牧使)로 이임하였다. 선산부사로 재임하고 있던 1889년(고종 26) 춘분에 공곡(公穀)으로 굶주린 백성을 진휼(賑恤)하는 공진(公賑)을 행하여 헐벗고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였으며, 고종으로부터 이 공으로 숙마(熟馬)를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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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의령(宜寧). 호는 흑구(黑鷗). 아버지는 남경희(南景熙)이며, 어머니는 용궁전씨(龍宮全氏)이다. 남상순(南相淳)은 무을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40년 1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부설 대판중학교(大阪中學校)에 입학하였다. 1941년 9월 전영수(田永秀)가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조선청년학생이 주동이 되어 독립을 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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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 도선굴 암벽 두 곳에 새겨진 글자. 남통동 도선굴 통로 기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천석통로(穿石通路)라는 내용의 도선굴 통로 왼쪽 수직 암벽에 새긴 암각문이고, 다른 하나는 도선굴 내부 돌출된 벽 위에 고정시킨 금오산 굴 통로기(金烏山窟通路記)라는 제목의 직사각형 판석(板石)의 명문(銘文)이다. 금오산 굴은 금오산의 빼어난 경치를 한눈에 바라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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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안강(安康). 자는 사국(士國), 호는 의산(義山). 아버지는 노원엽(盧元燁)이며, 부인은 선산김씨(善山金氏)로 김철묵(金哲黙)의 딸이다. 노명일(盧明一)은 대구공업학교를 졸업한 뒤 인천 조선기계제작소에 취직하였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도를 더해가자 임상빈(任相彬)·박태일(朴泰一)·이도열(李道烈) 등과 함께 조선독립궐기를 내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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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독동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수리계장 노주한의 선정비. 수리계장은 수리계의 대표로서, 주로 저수지 관리를 하던 사람으로서 노주한은 선산군수로 부임한 이학귀가 시행한 독동들의 관개 및 수리 시설의 확충 과정에 수리계의 대표로서 많은 공을 세웠는데, 이를 기려 1939년에 비석을 세웠다. 비석은 높이 108㎝, 너비 37.5㎝, 두께 10.5㎝의 비신에 높이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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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진평동에 있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다카키 쇼오지[高木昌治]의 칭송비. 다카키 쇼우지는 일본인으로서 인동우체국 근처에서 살았다. 인동 지방에서 최초로 자전거를 탄 사람으로 잘 알려진 그는 곡물상을 운영하였는데, 특히 함경도까지 왕래하면서 조를 많이 취급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26년부터 흉년이 계속 들어 기근이 심했을 때, 곳간을 열어 빈민들을 구제해 주었다.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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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6월 최재화가 주동이 되어 경상북도 청년들을 만주 신흥무관학교로 보낸 사건.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각지의 뜻있는 인사들은 새로운 투쟁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해평 산양리의 최재화(崔載華, 1892~1962)는 1919년 4월 2일 밤 동민들을 이끌고 고향인 해평경찰서(海平警察署) 주재소(駐在所)를 습격하였다. 또한 대구로 나가 계성학교(啓聖學校) 학생 김수길(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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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독동리에 있는 조선 후기 인물 민치서의 선정비. 민치서(閔致序)는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1862년(철종 13) 장흥부사(長興府使)에서 선산부사로 부임하였으며, 1864년(고종 1) 공주판관이 되어 이임한 인물로서 선산부사로서 베풀었던 선정을 기려 백성들이 비석을 세웠다. 구미시 선산읍 독동리 영남유교문화진흥원 안으로 150m 정도 올라가면 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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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옥성면 주아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인물 박근석의 송덕비(頌德碑). 박근석은 조선 말 중추원의관을 지낸 인물로서 여러 모로 백성들에게 시혜를 베풀었기에 주민들이 이를 기려 선정비를 세웠다. 구미시 옥성면사무소 앞 공터에 박태훈 기념비와 함께 세워져 있다. 높이 143㎝, 너비 45.5㎝, 두께 15.5㎝의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의 덮개돌을 얹은 형태다. 덮개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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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박근술(朴根述)은 1919년 3월 12일과 3월 14일 두 차례에 걸쳐 칠곡군 인동면(仁同面)에서 이상백(李相柏)을 비롯한 주민 3백여 명과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인동면 진평동에서의 만세 운동은 3월 7일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학생 이영식(李永植)이 선언서 20매를 이 마을의 유지 이상백에게 전달하면서 추진되었다. 이들은 거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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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지산동에 있는 일제강점기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낸 박도환의 송덕비(頌德碑). 구미시 지산동에 소재하는 계선각(繼善閣)은 중추원의관 박도환, 혜민원참서관(惠民院參書官) 박효달(朴孝達), 유학(幼學) 박조용(朴詔鏞) 등 3대에 걸쳐 자선을 베푼 밀양박씨 문중 세 인물의 송덕비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비각이다. 계선각이 세워진 후 신평동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학생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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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지산동에 있는 조선 말 인물 박동보의 송덕비. 구미시 지산동에 소재하는 계선각(繼善閣)은 중추원의관 박도환, 혜민원참서관(惠民院參書官) 박효달(朴孝達), 유학(幼學) 박조용(朴詔鏞) 등 3대에 걸쳐 자선을 베푼 밀양박씨 문중의 세 인물의 송덕비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비각이다. 계선각이 세워진 후 신평동에서 현재 위치로 옮겨온 ‘학생박동보구황비(學生朴東輔救荒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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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봉곡동에 있는 조선 말 박래민의 송덕비. 박래민은 본관이 밀양으로, 자는 숙후(叔厚), 호는 월파(月坡)이며, 1888년(고종 25) 무과에 급제하여 용양위부사과를 지낸 인물로서, 충과 효를 겸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박래민은 구미 지역 출신으로서 1903년(고종 40)에 인근 주민들이 곤궁한 지경에 처하자 집안 창고에 들어 있던 곡식을 내어줌으로써 굶주림을 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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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판소리 명창. 박록주(朴綠珠, 1905~1976)는 동편제 「흥보가」의 인간문화재로서 정통 판소리 보존과 후진 양성 등을 통해 판소리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박록주는 12세 때 박기홍(朴基洪)에게 판소리의 기본을 배운 뒤 김창환, 송만갑, 김정문, 정정렬, 유성준 명창으로부터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등을 배워 일가를 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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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구포동에 있는 일제강점기 인물 박명수의 송덕비. 낙동강은 영남의 젖줄이 되는 하천으로서 강의 연안에 해당하는 부분은 홍수 등의 재난을 예방하기 위하여 항상 수로의 정비와 제방의 축조, 수리가 수반된다. 박명수 송덕비는 이러한 수로 정비와 제방 축조에 공헌한 박명수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구미시 구포동의 천해사 아래 산록의 비각 안에 박명수 기념불망비와 함께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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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박명언(朴明彦)은 1919년 칠곡군 인동면(仁同面) 진평동에서 이상백(李相柏)을 중심으로 이영식(李永植)·이내성(李乃成) 등과 함께 독립 만세 운동에 참가하였다. 1919년 3월 7일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학생 이영식은 독립선언서 20매를 가지고 이상백을 찾아와 동지를 모이게 하여 상의하고 태극기를 만들었다. 박명언은 마을에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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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박명출(朴命出)은 1919년 3월 12일부터 14일까지 이내성, 박근술, 박명언, 박삼봉, 박순석 등과 함께 진평동에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어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고 마을 뒷산에 올라가서 2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다. 1919년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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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몽득(朴夢得)은 1939년 10월 25일 왜관에서 청년동지회를 조직하여 농민계몽을 통한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서 붙잡혔다. 1942년 2월 2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l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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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밀양(密陽). 아버지는 박우준이다. 박봉술(朴鳳述)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공로를 인정받아 1983년 대통령 표창이 수여되었으며, 경상북도 구미시 황상동에 묘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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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삼봉(朴三鳳)은 1919년 3월 14일 인동면(仁同面) 진평동에서 이상백(李相栢), 이내성, 박근술, 박명언 등이 주도한 만세 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들은 마을 뒷산에서 시위 군중 약 200명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 행진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다. 1919년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6개월 형을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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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박순석(朴順石)은 1919년 3월 12일 인동면(仁同面) 진평동에서 이상백(李相栢), 이내성, 박근술, 박명언 등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만들어 독립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한 후 3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 행진을 하고, 2차로 3월 12일에는 약목(若木) 장날에 2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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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출신의 군인이며 정치가. 박정희는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현 구미시 상모동) 출신의 군인·정치가로, 호는 중수(中樹)이다.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이래 대한민국 제5대·제6대·제7대·제8대·제9대 대통령을 역임하여 18여 년간을 집권하였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오래 집권한 박정희가 재임 기간 중 이룩한 성과에 대해서는 상반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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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옥성면 주아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때 옥성면장을 지낸 박태훈의 송덕비. 박태훈은 일제강점기 때 행정의 최하부 단위인 옥성면의 면장을 지낸 인물로서, 면장으로서의 치적과 공덕에 대하여 기념하기 위하여 주민들이 비석을 세웠다. 구미시 옥성면사무소 앞 공터에 박근석 실혜비와 함께 세워져 있다. 높이 144㎝, 너비 47㎝, 두께 17.5㎝의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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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지산동에 있는 일제강점기 때 인물 박효달의 송덕비. 구미시 지산동에 소재하는 계선각(繼善閣)은 중추원의관 박도환, 혜민원참서관(惠民院參書官) 박효달(朴孝達), 유학(幼學) 박조용(朴詔鏞) 등 3대에 걸쳐 자선을 베푼 밀양박씨 문중 세 인물의 송덕비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비각이다. 박효달은 고종 때 큰 흉년이 들자 백성들을 구제한 유학 박동보, 중추원의관 박도환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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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희광의 별명은 박상만(朴相萬)이다. 경주부윤 박수홍(朴守弘)의 10세손이며, 아버지는 박윤하(朴胤夏)이다. 박희광은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8세의 나이로 부친을 따라 만주로 갔다. 16세 때 봉천성(奉天省) 남성자학교(南省子學校)를 졸업하고 오동진(吳東鎭) 휘하 통의부(統義府)에 자진 입대하여 6개월간 군사 훈련을 받았다.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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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희목은 밀양박씨(密陽朴氏)로서 자는 문여(文如)이다. 경주부윤을 역임한 박수홍(朴守弘)의 11세손으로서 아버지는 박동하(朴東夏), 어머니는 황한태(黃漢泰)의 딸로서 장수황씨(長水黃氏)이다. 박희목은 유학자의 지조와 절개를 숭상해 온 집안에서 자랐으며 조부의 슬하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권오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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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방하영은 1932년 일제의 한글 말살 정책에 대항하기 위하여 왜관에서 이창기(李暢基) 등과 함께 청년동지회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1938년 10월 청년동지회의 활동의 일환으로 농민에게 한글을 지도하며 문맹 퇴치에 주력하는 등 농민 계몽을 통한 항일 운동을 전개하다가 동지 100여 명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41년 3월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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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무을면 무수리에 있는 조선 말의 인물 백용기 선정비. 백용기는 19세기말인 1889년(고종 26)에 통정대부 돈녕부도정에 임명된 바 있는 인물로서, 자신의 사재를 털어서 빈민을 구제하고 불가에 시주하는 등의 공로를 기려 백성들이 비를 세웠다. 구미시 무을면 무수리 무수골의 새마을회관 뒤쪽에 있다. 높이 112㎝, 너비 40.5㎝, 두께 16.5㎝의 비신을 세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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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8월 6·25전쟁 시 국군이 북한군의 낙동강 도하(渡河)를 저지하기 위해 비산진에서 벌인 전투.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6월 28일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7월 20일 대전(大田)을 장악한 뒤, 8월 15일까지는 낙동강 선을 넘으려는 작전을 계획하였다. 따라서 7월 말 북한군 제15사단(총병력 약 5,000명)은 낙동강으로 진출하기 위해 상주(尙州) 정면에서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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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3·1운동이 일어나자 진평동에서 애국지사들은 만세 시위를 결의하였는데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대구 계성학교 학생이던 이영식이 「기미독립선언서」 20매를 가지고 이상백의 집을 찾아가 취지를 설명하고 이범성, 이내성(李乃成) 등과 만세 시위를 모의하였다. 여기에 동리 유지들이 동참하여 3월 12일에 거사하기로 하고 「기미독립선언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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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3·1운동이 일어나자 진평동에서도 만세 시위를 결의하였다. 대구 계성학교 학생이던 이영식이 「기미독립선언서」 20매를 가지고 이상백의 집을 찾아가 취지를 설명하고 이범성, 이내성(李乃成) 등과 만세 시위를 모의하였다. 여기에 동리 유지들이 동참하여 3월 12일에 거사하기로 하고 「기미독립선언서」를 필사하고 태극기를 만든 뒤 거사 당일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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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진평동에 있는 일제강점기 때의 인물 서현주의 선정비. 서현주는 인동 출신으로서 가뭄이 극심한 해에 양곡을 풀어 가난한 주민을 구제하였는데, 이때 혜택을 입은 주민들이 이를 기려 비석을 세웠다. 비석은 팔작지붕의 덮개돌에 귀부를 갖춘 형태이다. 비신은 높이 126㎝, 너비 38㎝, 두께 18.5㎝이며, 덮개돌은 높이 43㎝, 너비 76㎝, 두께 56㎝이다. 귀부는 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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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12일 경상북도 구미 선산장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3·1운동은 일제하 최대의 항일 민족항쟁으로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선산에서는 선산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3월 13일 만세 계획이 있었으나 실패로 끝나고 4월 12일 권오환(權五煥)을 중심으로 선산장터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경상북도 지역에서는 3월 8일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학생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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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의병. 송병우는 은진송씨(恩津宋氏)로서 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선기동에서 송경수(宋敬洙)의 아들로 태어났다. 평소 애국심이 투철하고 천성이 강직하였으며 한학을 닦아 문장이 지역에 널리 알려졌다. 일본군에 항거하기 위해 참찬(參贊)에서 물러난 뒤 왕산(旺山) 허위(許蔿)와 함께 의병 모집에 나서 소모장(召募將)이 되어 의병을 규합하였다. 19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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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송세호는 여산송씨(礪山宋氏)로서 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에서 태어났다. 출가하여 강원도 오대산(五台山)의 월정사(月精寺)에 머물렀다. 일찍이 상해로 망명하여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4월 13일 임시정부의정원 강원도대표위원에 선출되어 의정 활동을 하는 한편 재무부 재무위원에 임명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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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경상북도 구미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양제안은 남원양씨(南原梁氏)로서 호는 벽도(碧濤)이다. 양제안은 1876년(고종 13) 병인양요 때 격문을 만들어 척양(斥洋)과 척왜(斥倭)를 주장하였으며, 1894년 충청북도 진천에 의병 총본영을 설치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훈련시켰다. 이듬해인 1895년 이기찬(李起燦) 의병진의 중대장으로 선산 출신의 허위(許蔿) 등과 청산·보은·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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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독동리에 있는 조선 말의 인물 엄세영 불망비. 엄세영은 동학 농민 전쟁 때, 수령들의 정사를 살피고 백성들의 고통을 돌보는 임무를 맡은 삼남염찰사, 선무사(宣撫使)로 임명되어 민심을 수습하고 안집하는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이 시기에 민폐를 많이 시정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엄세영의 선정에 보답하기 위하여 비가 세워졌다. 비석은 덮개돌과 비좌 없이 윗부분이 평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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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독동리에 있는 조선 말기 인물 오일영의 선정비. 오일영(吳鎰泳)은 1887년(고종 24) 5월에 선산부사로 부임하여 그 해 12월에 관아에서 죽었던 인물로서, 백성들이 그를 기려서 일명 ‘타루비(墮淚碑)’라 하는 선정비를 세웠다. 구미시 선산읍 독동리 영남유교문화진흥원 안으로 150m 정도 올라가면 십이지신상 앞에 세워져 있다. 높이 144㎝, 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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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무을면 송삼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때 선산군수 오재순의 선정비. 군수는 도(道)의 관할에 속하는 하급 지방자치단체인 군(郡)을 대표하고, 그 행정을 책임지는 장(長)으로서, 오재순은 일제강점기인 1924년에 선산군수로 부임하여 군수의 직임을 수행하였다. 군수로서 선산군의 행정을 책임지던 오재순이 6년간 재임한 후 영덕군수로 이임하자 주민들이 그의 공로를 기려 비를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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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 대표적 의병장 허위는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 출신이다. 한말과 일제강점기를 통해 허위 가문은 수많은 항일운동가를 배출하였다. 허위의 맏형 허훈은 진보의진의 창의장이었고, 셋째 형 허겸은 형과 아우를 도와 의병 투쟁에 참여하였다. 1910년 국권 상실 이후에는 허겸·허형·허필은 그 일가를 이끌고 만주와 노령으로 망명하여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허위는 한말에 거유(巨儒)로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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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육홍균의 본관은 옥천(沃川)으로 아버지 육병형(陸炳亨)과 어머니 예천임씨(醴泉林氏) 사이의 독자이다. 선산 옥성 주아리에서 태어났다. 슬하에 육철(育轍), 육종서(育鍾瑞), 육종국(育鍾局) 3형제를 두었다. 육홍균은 수원고등농림학교(현 서울대 농대)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日本大學) 문과에 재학 중이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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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원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때의 수리계장 윤배억의 선정비. 구장은 일제강점기 동이나 리의 사무를 관장하던 직이며, 수리계장은 수리계의 대표로서 주로 저수지 관리 역할을 했던 사람으로서, 윤배억은 일제강점기에 원리의 구장 및 수리계장으로서 많은 공을 세웠는데, 이를 기려서 1945년에 비석을 세웠다. 구미시 선산읍 원리 장아질마을 초입의 도로변에 윤병호 불망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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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원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인물 윤병호의 선정비. 윤병호는 지역에 거주하면서 주민들을 위한 학문 장려와 수리 사업을 주도하여 이익되는 혜택을 주는 등 많은 공을 세웠는데, 이를 기려 지역 주민들이 발의하여 1932년에 비석을 세웠다.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원리 장아질마을 초입의 도로변에 윤배억 송덕비와 함께 서 있다. 비석은 높이 87㎝, 너비 30.5㎝,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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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구미 출신의 문신.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경규(景圭), 호는 자유재(自有齋). 아버지는 문헌공(文獻公) 윤치희(尹致羲)이다. 윤용선은 1885년(고종 22) 증광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 직후 성립된 친러 정부에 보수 세력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으로 있다가, 4월 22일 내각 총리대신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9월 관제를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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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인동도호부사와 선산군수를 역임한 무신. 이교준은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871년(고종 8) 3월 26일 인동도호부사(仁同都護府使)로 부임하여 1875년 7월 24일 도정(都政)에 의하여 대흥중군(大興中軍)으로 옮겼다. 1895년 3월 충청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으며 같은 해 6월 18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선산군이 신설되자 7월 21일 초대 선산군수(善山郡守)로 부임하였고,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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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임수동에 있는 조선 말 인동부사를 역임했던 이교준의 선정비. 이교준은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진출, 1871년(고종 8) 인동부사로 부임하여 1875년(고종 12)에 이임하였다. 그는 4년 동안 인동부사로 있으면서 도목정(都目政)에 따라 이배되었으며, 백성들이 인동부사로서 베푼 선정을 기려 2기의 영세불망비를 세웠다. 비석의 윗부분이 평평하고 모서리에 각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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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내성은 경주이씨(慶州李氏)로서 이만우(李晩雨)로도 불렸다. 1892년 4월 l일 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진평동 543번지에서 이성률(李成律)의 5남으로 태어났다. 이만우는 17세 때 계성학교를 중퇴하고 동향 동지인 장진홍(張鎭弘)과 함께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에 입대하여 훈련을 받았고 제대 후 광복회(光復會)에 가입하여 독립 투쟁을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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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경상북도 구미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1879년(고종 18) 경상좌도암행어사로서 인동부(仁同府)의 민폐를 시정하고 조세를 감면하여 부민의 고통을 덜어주었다. 이후 1884년 성균관대사성, 1885년 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879년(고종 16) 5월 인동읍민에 의해 수의이공만식영세불망비(繡衣李公萬植永世不忘碑)가 세워졌으며 현재 경상북도 구미시 임수동 409-3번지[수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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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임수동에 있는 조선 말의 암행어사 이만식 송덕비. 암행어사는 조선시대 왕명을 받고 비밀리에 지방을 순행하면서 악정(惡政)을 규명하고 민정을 살핀 임시 관직으로서, 이만식은 1879년(고종 16)에 경상좌도암행어사가 되어 인동부에 와서 민폐를 시정하고, 조세를 감면하는 등 백성들의 애로 사항을 덜어주는 선정을 베풀었기에 백성들이 이를 기려 비석을 세웠다. 윗부분이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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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경상북도 구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상백(李相栢)은 1919년 3월 12일 인동면(仁同面) 진평동의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동하였다. 당시 인동교회의 목사로서 대구 서문외(西門外) 시장의 독립 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3월 7일 이곳에 온 대구 계성학교 학생 이영식(李永植)과 만나 독립선언서 20매를 전해받고 함께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동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상백은 자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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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독동리에 있는 조선 말의 군수 이소영 선정비. 이소영은 문과 출신으로 1896년(고종 33) 선산군수로 부임하여 1899년(고종 36) 예천군수로 이배되어 떠났다. 거사비(去思碑)는 수령이 갈릴 때 전임자의 선정(善政)을 기리어 고을의 백성들이 세우는 비이지만 이소영의 재임 기간 동안 선정에 대한 별다른 기록은 없으며, 객사 남쪽에 있던 찰미루(察眉樓)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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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 계성학교 학생이던 이영식은 「기미독립선언서」 20매를 가지고 인동면 진평동에 있는 이상백의 집을 찾아가 취지를 설명하고 이범성, 이내성(李乃成) 등과 만세 시위를 모의하였다. 여기에 동리 유지들이 동참하여 3월 12일에 거사하기로 하고 「기미독립선언서」를 필사하고 태극기를 만든 뒤 거사 당일 오후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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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옥성면 대원리에 있는 조선 말 이용직의 선정비. 암행어사는 조선시대에 왕명을 받고 비밀리에 지방을 순행하면서 악정(惡政)을 규명하고 민정을 살핀 임시 관직으로서, 이용직은 1868년(고종 5)에 경상도암행어사가 되어 현재 중부내륙고속도로 선산휴게소 부근에 있었던 역원인 죽현원의 폐단을 시정하여 백성들이 편안히 살도록 해주었는데, 이를 기려서 비석을 세웠다. 구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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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덕수(德水). 다른 이름은 이균희(李均憙)·이해봉(李海奉), 자는 덕경(德卿), 호는 도촌(桃村). 아버지는 이종매(李種邁)이다. 도개면 도개리에서 출생하였다. 이원길은 성품이 강직하였으며 가풍에 따라 유가의 규범을 익히며 청운의 뜻을 품고 학문에 전념하여 입신양명을 도모하였으나,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나라 잃은 한을 품고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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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3·1운동이 일어나자 진평동의 애국지사들은 만세 시위를 결의하는데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대구 계성학교 학생이던 이영식이 「기미독립선언서」 20매를 가지고 이상백의 집을 찾아가 취지를 설명하고 이범성, 이내성(李乃成) 등과 만세 시위를 모의하였다. 여기에 마을 유지들이 동참하여 3월 12일에 거사하기로 하고 「기미독립선언서」를 필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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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임용의 자는 종식(鍾植), 호는 월호(月湖)이다. 아버지는 이희원(李希元)이다. 이임용은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칠곡공립보통학교에서 3년간 교직 생활을 하다가 대구 동산병원으로 직장을 옮겨 4년간 근무하였다.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 장날을 기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김수길·이영식·이영옥·김삼도 등과 함께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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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무을면 송삼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선산군수를 지낸 이종수와 무을면장을 지낸 김영진의 선정비. 군수는 도(道)의 관할에 속하는 하급 지방자치단체인 군(郡)을 대표하고 그 행정을 책임지는 장(長)으로서, 이종수는 일제강점기인 1922년에 선산군수로 부임하여 군수의 직임을 수행하였고, 김영진은 이 시기에 무을면장이었다. 군수로서 선산군의 행정을 책임지고 있던 이종수가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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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임수동에 있는 조선 말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했던 이탄의 선정비. 이탄은 1892년(고종 29)에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어 도정에 진력하였는데, 1894년(고종 31)에 순력 중 인동부에 와서 선정을 베풀었기에 백성들이 이를 기려 비석을 세웠다. 윗부분이 평평하고 모서리가 각이 있는 직수(直首) 형태의 비신만이 남아 있으며, 비신은 높이 146㎝, 너비 53㎝, 두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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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독동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선산군수를 지낸 이한귀의 선정비. 군수는 도(道)의 관할에 속하는 하급 지방자치단체인 군(郡)을 대표하고, 그 행정을 책임지는 장(長)으로서, 이한귀는 선산군수로 부임하여 지금의 선산읍 독동들의 관개, 수리 시설을 확충하여 당시 주민들이 농사를 짓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이를 기려 1939년 비석이 세워졌다. 비석은 높이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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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이문리에 있는 조선 말 상주군수 이한응의 송덕비. 이한응은 관립 영어 학교를 졸업하고 외교관으로서 주로 활약하였는데, 제1차 한일 협약이 맺어져 나라의 형세가 위축되고 대외적으로는 영일 동맹으로 정부의 지위가 떨어지자 이를 개탄하여 1905년 5월 12일 음독 자결한 인물이다. 이한응이 상주군수로 도임하여 있던 중 1902년(고종 39) 12월에 선산군수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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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이문리에 있는 조선 말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한 이헌영의 선정비. 이헌영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신사유람단에 포함되는 등 개화파 관료로서 성장하였다. 벼슬이 경효전제조(景孝殿提調)에 이르렀다. 1902년(고종 39)에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어 도내를 순력하였으며, 당시의 선산군에도 들러 백성들을 보살피는 등 경상도관찰사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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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독동리에 있는 조선 말기 선산부사 이호숙의 선정비. 이호숙(李鎬肅)은 음사로 벼슬길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거친 후 문경현감(聞慶縣監)으로 있다가 1874년(고종 11)에 선산부사로 부임하였으며, 암행어사가 민정을 살핀 후 상을 줄 것을 청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1876년(고종 13)에 선산부사에서 이임하였는데, 청주목사(淸州牧使)로 승진하였던 것으로 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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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3·1운동이 일어나자 진평동의 애국지사들은 만세 시위를 결의하는데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대구 계성학교 학생이던 이영식이 「기미독립선언서」 20매를 가지고 이상백의 집을 찾아가 취지를 설명하고 임삼선, 이범성, 이내성(李乃成) 등과 만세 시위를 모의하였다. 여기에 마을 유지들이 동참하여 3월 12일에 거사하기로 하고 「기미독립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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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임용섭은인동면(仁同面) 진평동에서 이상백, 이내성(李乃成) 그리고 대구(大邱)에서 온 이영식(李永植)과 함께 독립 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기미독립선언서」를 필사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동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919년 3월 14일 마을 뒷산에 모인 시위 군중 20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인동주재소로 행진하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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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8일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3·1운동은 일제하 최대의 항일 민족항쟁으로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났다. 한말 의병장 허위(許蔿)의 출신지인 구미시 임은동은 항일의 기풍이 강한 곳으로, 1919년 4월 8일 강용준(姜龍俊)·유시동(劉時東)을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경상북도 지역에서는 3월 8일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학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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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임점석은 진평동 독립 만세 운동의 주동자로 진평동의 만세 시위를 결의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대구 계성학교 학생이던 이영식이 「기미독립선언서」 20매를 가지고 이상백의 집을 찾아가 취지를 설명하고 이범성, 이내성(李乃成) 등과 만세 시위를 모의하였다. 여기에 마을 유지들이 동참하여 3월 12일에 거사하기로 하고 「기미독립선언서」를 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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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구평동에 있는 일제강점기 인물 장극상의 송덕비. 학서지는 구미시 구평동에 소재하는 못으로서 1931년경에 축조되었다. 본관이 인동인 장극상이 못을 축조할 때에 많은 토지를 희사하였는데, 해방 후인 1948년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비가 세워졌다. 구미시 구평동의 학서지 제방에 장돈상 송덕비와 함께 세워져 있다. 비석은 높이 108㎝, 너비 48.5㎝이고, 팔작지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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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구평동에 있는 일제강점기 장돈상의 송덕비. 지역민을 위해 여러모로 노력을 기울인 장돈상의 공을 기려 1922년에 건립하였다. 구미시 구평동의 학서지 제방에 장극상 불망비와 함께 세워져 있다. 비석은 높이 126㎝, 너비 41㎝이고, 팔작지붕의 덮개돌은 높이 29㎝, 너비 57㎝, 두께 42㎝이며, 비좌는 높이 5㎝, 너비 90㎝, 두께 65㎝이다. 비문은 건립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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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구미 출신의 문신.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공유(公裕), 호는 운정(雲庭). 장금용(張金用)계로서 산음현감 장옥(張鈺)의 8대손이다. 할아버지는 사호옹(四好翁) 장학추(張學樞), 아버지는 장석구(張錫龜)이다. 14세 때 중부인 장석용(張錫龍)에게 입양되었다. 백부는 장석봉(張錫鳳)이다. 장승원은 1885년(고종 22) 증광 문과에 급제한 후 승정원주서를 시작으로 홍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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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장재상은 본관이 인동(仁同)이고 호는 원봉(園峰)이며 아버지는 장병희(張炳熙)이다. 장재성은 엄격한 가정 환경에서 성장하였으며 선산보통학교(현 선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배재학당을 거쳐 청운의 뜻을 품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고수중학을 졸업하고 동경의 일본대학(日本大學) 법과에서 공부하던 중 민족 해방과 독립 운동에 헌신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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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장주서는 1919년 3월 12일과 3월 14일 두 차례에 걸쳐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 진평동에서 이상백(李相柏)을 비롯한 주민 3백여 명과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의 계성학교 학생이던 이영식이 「독립선언서」 20매를 가지고 이상백의 집을 찾아가 취지를 설명하자, 이상백(李相栢)·이범성·이내성·이영래 등이 적극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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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1910년 조선이 일제에 강점될 때 이상백(李相栢)·이범성·이내성 등은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 진평동에 살고 있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의 계성학교 학생이던 이영식이 「독립선언서」 20매를 가지고 이상백(李相栢)의 집을 찾아가 취지를 설명하자, 이상백(李相栢)·이범성·이내성·이영래 등이 적극적으로 찬동하였다. 동리의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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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와 일제 강점기에 경상북도 구미에서 활동한 언론인이자 학자. 장지연은 1864년(고종 1) 경상도 상주목 목내면 동곽리에서 출생하였다. 처음 이름은 장지윤(張志尹)이고 호는 위암(韋庵) 또는 숭양산인(崇陽山人)이다. 소매당 장영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운소(雲沼) 장용상(張龍相)이고, 장석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세 때 경상북도 구미시 오태동으로 이거했다가 20세 때 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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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장진홍(張鎭弘)은 자는 준극(俊極), 호는 창여(滄旅)이며,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1894년(고종 31년) 6월 6일 인동의 옥계동 문림리 352번지에서 태어나 조국 광복을 위해 투쟁을 벌이다가 1930년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장진홍은 1907년 4월 1일 현 인동초등학교의 전신인 인명학교(仁明學校)를 졸업하였다. 특히 인명학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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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정치가. 창랑(滄浪) 장택상(張澤相)은 일제강점기에 영국 에딘버러대학교에 유학하여 정치학을 전공하고 귀국하여 항일 운동을 했다. 1945년 해방 이후 영국에서 교육받은 경력과 영어에 능통한 점을 인정받아 미군정 때 수도경찰청장을 맡아 좌익 세력 타도에 앞장섰다. 이승만 정권 출범과 함께 초대 외무부장관을 지냈으며, 1950년에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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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전재덕(全在德)의 본관은 옥천이며, 1924년 3월 1일 지금의 구미시 장천면 상장리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전장호이고 어머니는 김월선이다. 전재덕은 장천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안동성립(安東省立) 봉성농업학교에 재직중 만주국 관비 유학 시험에 합격하여 일본 추전일만공업학교에 유학하였다. 그 후 만주 봉천 군수 공장에 배치되어 있던 중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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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 구미 지역에서 활동한 무신. 무과에 급제하였다. 인동부사로 도임 후 어사를 통해서 임금에게 상주하여 백성들이 제때 내지 못하여 누적된 조세를 면제 또는 감면해서 민생고를 덜어 주었다. 인동부민들이 고종 때 세운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인동향교 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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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임수동에 있는 조선 말 인동부사를 역임했던 정옥의 선정비. 정옥은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진출하였으며, 인동부사의 도임 및 이임의 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그는 인동부사로 재임하면서 백성들이 제때 내지 못하여 누적된 조세를 면제, 또는 감면해서 민생고를 덜어주는 등 선정을 베풀었으며, 백성들이 이를 기려 선정비를 세웠다. 윗부분이 평평하고 모서리에 각이 있는 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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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진평동에 있는 조선 말 인동부사를 역임했던 정홍채의 선정비. 정홍채는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진출하였으며, 1878년(고종 15) 인동부사로 부임하여 1882년(고종 19)에 임기가 만료되어 이임하였다. 그는 인동부사로 재임하면서 특히 백성들을 애정으로서 보살피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선정을 베풀었기에 백성들이 이를 기려 선정비를 세웠다. 비석은 덮개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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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임수동에 있는 조선 후기 인동부사를 역임했던 정홍채의 선정비. 정홍채는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진출하였으며, 1878년(고종 15) 인동부사로 부임하여 1882년(고종 19)에 임기가 만료되어 이임하였다. 그는 인동부사로 재임하면서 특히 백성들을 애정으로서 보살피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선정을 베풀었기에 백성들이 이를 기려 선정비를 세웠다. 비석은 덮개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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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독동리에 있는 조선 말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한 조강하(趙康夏, 1841~1892)의 선정비. 조강하는 외척인 풍양조씨 문중의 인물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예조판서, 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에 이르렀다. 1883년(고종 20)에 경상도관찰사로서 군비 태세를 살피는 순찰사를 겸직하였다. 경상도의 진휼을 위하여 내탕전(內帑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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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10월 18일 장진홍이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발물을 배달시켜 폭발토록 만든 사건. 3·1운동에 나타난 만세시위 위주의 평화적·수세적 방식으로는 독립이 요원해지자, 1920년대에는 독립운동이 행동적·공세적인 방식으로 변해갔다. 이에 따라 국내에서 많은 비밀결사체가 조직되고, 독립운동의 전선도 사상이나 이념에 따라 커다란 변화를 보이게 되었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발사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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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독동리에 있는 조선 말 선산부사 조준구의 선정비. 조준구(趙駿九)는 1883년(고종 20)에 선산부사로 부임하여 1885년(고종 22)에 이임하였다가 1890년(고종 27)에 다시 선산부사로 부임, 같은 해 9월에 이임한 인물로서 선산부사로 베푼 선정을 기려 백성들이 비석을 세웠다. 구미시 선산읍 독동리 영남유교문화진흥원 안으로 150m 정도 올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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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2일과 14일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 진평동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3·1운동은 일제하 최대의 항일 민족항쟁으로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인동 진평동에서는 3월 12일과 14일 두 번에 걸쳐 학생과 지역 유지들이 결합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경상북도 지역에서는 3월 8일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학생의거를 시발로 비안·김천·포항을 거쳐 안동·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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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목사. 최재화의 호는 백은(白恩), 본관은 경주이다.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산양리에서 최도원(崔道源)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이명으로 최재하(崔在河), 최동수(崔東秀)를 사용하였다. 최재화는 서울 경신중학교를 졸업하고 해평면 산양동에 내려와 신앙 활동을 하고 있었다. 1919년 만세 시위가 전국에서 일어나자 4월 3일 해평면 해평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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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 구미 지역에서 활동한 무신. 서울에 거주하였으며 무과에 급제하였다. 1867년(고종 4) 9월 20일에 인동부사로 부임하여 1870년(고종 7) 12월 고과 점수가 높아 전주영장(全州營將)으로 승진 임명되었다. 1871년(고종 8) 1월에 인동부민이 세운 흥학선정비(興學善政碑)가 경상북도 구미시 임수동의 인동향교 내에 소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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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임수동에 있는 조선 말 인동부사를 역임했던 한홍열의 선정비. 한홍열은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진출하였으며, 1867년(고종 4) 인동부사로 부임하여 1870년(고종 7)에 도목정(都目政)에 따라 승진하여 이임하였다. 그는 인동부사로 재임하면서 특히 교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선정을 베풀었기에 백성들이 이를 기려 선정비를 세웠다. 비석은 덮개돌과 비좌 없이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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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허겸(許蒹)의 호는 성산(性山)이다. 아버지는 청추헌(聽秋軒) 허조(許祚), 어머니는 진성이씨이고, 방산 허훈의 동생이자 왕산 허위의 형이다. 허겸은 다른 이름으로 허혁(許爀)·허환(許煥)·허노(許魯)를 같이 사용하였다. 허겸은 1896년 3월 아우인 허위가 김산에서 이기찬을 대장으로 추대하여 의진을 일으키자 찬획으로 참여하였다.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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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허위(許蔿)가 활동하던 시기는 조선 왕조 말기로, 1895년 명성왕후 시해사건,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과 그에 따른 을사의병(乙巳義兵), 1907년 해이그밀사사건과 고종의 강제 퇴위, 군대해산으로 이어지면서 조선은 국가로서의 주권을 서서히 상실해가고 있었다. 허위는 이러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막대한 재산을 내어 의병을 결성하여 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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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일본의 주권침략에 대항하여 싸운 허위의 구국 의병투쟁.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에서 그들의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키는가 하면, 조선인들의 고유한 문화적 전통과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두발과 복장의 형태마저 강제로 바꾸도록 하였다. 이른바 이것이 단발령(斷髮令)과 변복령(變服令)이다. 일찍부터 일본과 서양을 금수(禽獸)로 여겼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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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허종(許鍾)의 자는 성증(聖曾), 호는 중산(重山)이다. 아버지는 방산 허훈의 장자인 허숙이다. 외조부는 한주 이진상이다. 일찍이 조부인 허훈으로부터 글을 배웠다. 허종은 종조부인 허겸과 같이 신민회에 회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0년 전후에는 백농(白儂) 이동하(李東廈)가 경영하였던 대구의 삼산여관을 중심으로 김응섭(金應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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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허학(許壆)의 자는 박경(博卿)이다. 왕산 허위의 4남 2녀 가운데 장남이다. 아명은 허만령(許萬齡)이며, 일명 허형(許瀅) 혹은 허영(許瑩)이라고도 하였다. 허학은 아버지 왕산 허위가 1907년 경기도 연천에서 창의할 때 참여하여 연락과 무기 조달을 담당하였다. 1912년 중부(仲父)인 성산 허겸을 따라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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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허형(許蘅)의 호는 범산(凡山)이다. 허희(許禧)의 장자이며 허필(許苾, 1855~1932)의 형이다. 방산 허훈 형제와는 사촌간이다. 첫째아들 허민(1870~1910)은 1904년 제릉참봉, 1907년 궁내부주사를 지냈다. 둘째아들 허발(1872~1955)과 셋째아들 허규(許珪, 1884~1957)는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딸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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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허형식(許亨植)은 1909년 11월 18일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에서 허필(許苾, 1855~1932)의 아들로 태어나 조국 광복을 위해 온 몸을 바쳤던 항일투사였다. 본명은 허극(許克)으로 알려져 있으나 호적에는 허연(許埏)으로 등재되어 있다. 한말 의병장 왕산 허위(許蔿, 1855~1908)의 종질이기도 하다. 허형식은 북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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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학자이자 의병장. 본관은 김해. 호는 방산(舫山). 도학문장(道學文章)으로서의 기대 때문에 아명(兒名)을 허도문(許道文)이라 했다. 불고헌 허돈(許暾)이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에 옮겨 살면서 세칭 임은허씨로 불리워졌다. 청추헌 허조(許祚)의 장자로 태어나 백부 허정(許柾)의 양자로 들어갔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던 해 위암 장지연(張志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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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에서 활동한 행정가. 본관은 김해. 1904년 9월 4일 아버지 허종(許鍾)과 어머니 이녕발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이남이·권태을·주류조이다. 허흡의 가계는 임은동 입향조 허돈(許暾)에서 시작하여 허임(許恁) - 허정(許柾) - 허훈(許薰) - 허숙 - 허종(許鍾) - 허흡(許洽) - 허억(許檍) - 허렴(許燫)으로 이어진다. 허흡의 묘소는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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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의 문신. 음사(蔭仕)로 관직에 올라 1873년(고종 10) 대사간이 되었으며, 이듬해에 대사간에 재임명되었다가 곧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이 해에 흥선대원군을 등에 업고 대일 외교를 담당하던 부산훈도(釜山訓導) 안동준(安東晙)이 백성의 재물을 빼앗아 치부했다고 계를 올려 처형당하도록 하였다. 1875년에는 지방의 부호와 사족들에 죄를 씌워 재물을 빼앗고 수많은 세납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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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진평동에 있는 조선 기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했던 홍훈의 선정비. 홍훈은 음사로 벼슬길에 진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1875년(고종 12) 경상도관찰사로 도임하였다. 관찰사로서의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1875년에는 부민(富民)과 지방 사족(士族)에 대한 수탈과 침학이 극심하여 죄를 씌워 재물을 빼앗고, 수많은 세납물을 갖가지 방법으로 횡령, 남징(濫徵)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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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평해. 자는 국서(國瑞), 호는 월정(月庭). 1888년 4월 17일 경상북도 구미시 산동면 성수리에서 황봉수(黃鳳秀)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황진박은 1910년 조선이 일본에 합병되자 책장을 박차고 일어나 약장사로 변장하여 뜻있는 동지를 찾아 각처를 두루 다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서울로 가서 구국 투쟁을 벌였다. 고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