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촌 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0829
한자 巫堂村事件
이칭/별칭 무등산 타잔 사건,박흥숙 사건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연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77년 4월 20일연표보기 - 무당촌 사건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77년 4월 20일연표보기 - 무당촌 사건 종결
발생|시작 장소 무등산 덕산골 -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 지도보기

[정의]

1977년 4월 전라남도 광주시 무등산 덕산골에 있었던 무허가 판자촌 강제 철거 과정에서 박흥숙이 철거반원 4명을 살해한 사건.

[역사적 배경]

1960년대 급속한 산업화·공업화는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 유입으로 인한 도시의 인구 집중 현상을 가져왔다. 충분한 주거 환경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의 도시 인구 과밀은 곧 곳곳에 무허가 판자촌을 만들어냈다. 1971년 경기도 광주군 대단지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무허가 판자촌, 그리고 그곳으로 내몰린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철거하는 모습의 대표적인 예였다.

전라남도 광주시에 있는 무등산에는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180여 가구에 달하는 무허가 건물이 들어서 있었으며, 1977년에는 덕산골에만 20여 채가 있었다. 덕산골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광주시로 왔지만 살 곳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시내로의 접근이 가능한 무등산 골짜기에 모여 겨우 움막이나 흙집을 짓고 생활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1970년대 중단 '무등산도립공원 종합개발'이 확정되고, 무등산 내 도로 포장·주차장 조성 등의 관광 개발이 진행되면서 무등산 내 판자촌에 대한 강제 철거가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77년 10월 제58회 전국체육대회가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열리게 되었는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참석이 예정되면서 무등산 일대의 정화사업이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이에 무등산 덕산골 판자촌은 강제 철거에 직면해 있었다.

[경과]

박흥숙(朴興塾)은 전라남도 영광군 출신으로 아버지와 형이 사망한 뒤 가장 노릇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영광군에서 먹고 살 길이 막막하여 초등학교 6학년 때, 박흥숙을 제외한 가족이 모두 광주시 무등산으로 옮기게 되었다. 박흥숙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남아 있다가 2개월 후, 마찬가지로 무등산으로 오게 된다. 이때 박흥숙은 영광중학교 입시에 응시하였는데, 수석으로 합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진학을 포기하고 교과서를 판 돈으로 광주시로 옮겨 왔다. 하지만 광주시로 온 이후에도 경제 상황은 열악하였다. 이에 여동생[박정자]은 가정부로, 어머니[심금순]는 두 남동생과 함께 전라북도 내장사에서 식모로, 외할머니는 친척집으로 가면서 온가족이 뿔뿔히 흩어지게 되었다.

무등산에 혼자 남게 된 박흥숙은 상점 점원, 열쇠 수리공 등의 일을 하면서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독학으로 영어, 수학 등을 공부하였다. 박흥숙은 독학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통과하였으며, 1973년 사법고시 학력 제한이 폐지되자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검사'를 목표로 사법고시를 준비하였다.

1974년, 박흥숙은 가족들이 모여 살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 직접 돌과 흙을 쌓아 방 1개와 부엌으로 이루어진 움막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은 이전에 지었던 자그마한 초막에서 하루 20시간씩 독학을 계속하였다. 1976년 사법고시 1차에서 낙방하였으나, 조금 더 공부하면 가능하겠다며 공부를 계속하였다. 하지만 1977년 2월, 광주시로부터 자진 철거하라는 계고장이 발부되었고, 3월 15일에는 강제 철거 집행영장이 발부되었다. 이에 박흥숙은 살 곳을 물색하였으나 구하지 못하였다. 4월 12일, 박흥숙의 공부방이었던 초막이 강제 철거되었다. 당시 박흥숙은 "철거하러 오는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서민"이라면서 자신의 가재도구를 미리 꺼내놓는 등 강제 철거를 덤덤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1977년 4월 20일, 철거반원들이 강제 철거를 끝내기 위해 덕산골에 진입하였다. 이에 박흥숙과 가족들은 지붕이었던 1만 5000원짜리 천막을 걷어내려 했으나, 철거반원이 "안 부술 테니 내려오라."고 하여 내려왔다. 하지만 철거반원은 벽을 헐고 나머지 잔해에 불을 질러버렸다. 이 과정에서 박흥숙의 어머니가 수년 간 모아온 30만 원이 불에 타버리자, 어머니가 실신하기에 이르렀지만, 이때까지도 박흥숙은 참았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철거반원들이 박흥숙 가족의 집 외에 다른 집을 철거하기 시작하자 사제 총으로 공포탄을 쏘고 철거반원들을 포박하였다. 그 후 박흥숙은 "시장한테 가서 따지겠다."며 철거반원 4명을 포박한 상태로 산을 내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수 차례 철거반원들이 끈을 풀고 달려들자, "약속을 어겼다,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여 집을 지을 때 사용했던 망치로 철거반원들을 살해하였다.

사건 이후 박흥숙은 은행에 예금되어 있던 2만 700원을 찾아 영광군으로 가기 위해 시외버스 정류장에 갔다가 버스가 없어 여수행 열차를 탔다. 박흥숙은 여수행 열차에서 간첩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만나 그와 함께 서울로 이동, 간첩으로 신고한 후 자신도 자수하였다.

[결과]

당시 언론은 박흥숙을 '무등산 타잔' 혹은 '한국판 이소룡'이라고 칭하면서 사건을 왜곡하였다. 언론은 박흥숙을 '신출귀몰한 무공의 소유자'로 만들고, 박흥숙의 '뒤틀린 영웅심리'로 인해 사건이 발생했다고 보도하였다. 또한 덕산골을 무당들이 모여 사는 곳, 즉 '사이비 종교에 의한 광기 어린 곳'으로 만들어 그곳의 기운이 사건의 한 원인인 것처럼 왜곡하였다. 이런 기사들은 당시 폭력적으로 진행됐던 강제 철거에 대한 반발심을 인식하고, 판자촌과 판자촌의 사람들을 문제적인 존재, 없애야 할 존재로 이미지화한 것이었다.

1978년 박흥숙의 구명을 위해 광주시 안팎의 사회 저명인사 63명이 모여 구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구명위원회는 결성 취지문에서 "그동안 우리 사회가 추진해 왔던 고도 경제성장의 그늘 아래서 소외되었던 가난한 이웃들을 우리 모두가 방치해 온 결과로 발생한 도시 빈민지구의 무주택 문제가 첨예화한 표현"이라고 이 사건을 일컬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박흥숙은 사형을 선고받았고 1980년 12월 24일 형이 집행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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