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2197
한자 李起巽
영어공식명칭 Lee Gison
이칭/별칭 이준수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노기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7년 2월 14일연표보기 - 이기손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이기손 용진산에서 거의, 의병장 추대
활동 시기/일시 1908년 1월 - 이기손 용진산 1, 2차 전투에서 각각 일본군 115명, 75명 사살
활동 시기/일시 1908년 2월 2일 - 이기손 무동촌 전투에서 일본군 소좌 사살
활동 시기/일시 1909년 9월 - 이기손 의병부대 해산
몰년 시기/일시 1957년 11월 27일연표보기 - 이기손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이기손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출생지 전라도 나주목 본량면
거주|이주지 충청도 공주부 금산군
활동지 용진산 - 광주광역시 광산구 지도보기
활동지 지도 - 전라남도 신안군 지도읍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의병장

[정의]

개항기 전라남도와 광주 지역에서 활동한 광주 출신의 의병장.

[개설]

이기손(李起巽)[1877~1957]은 1877년(고종 14) 2월 14일 전라도 나주목 본량면[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량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오준선(吳駿善)의 문인으로 9세 때에 사서삼경을 독파하였다. 충청도 공주부 금산군[지금의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파초리 장목동]에 거주하였다. 기골이 장대하고 용모가 활동적이었으며, 장년기에 이르러서는 문장과 지리와 문무를 겸한 유학자로 인정받았다. 개항기 의병장으로 1907년 전라남도 광산군 용진산[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곡동]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광주 용진산 전투와 창평[지금의 전라남도 담양군] 무동촌(茂洞村) 전투에서 일본군에 큰 타격을 주는 등 전라남도 및 광주 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며 전공을 세웠다.

[활동 사항]

이기손은 1907년 늦가을, 모병에 나서 8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전라남도 광산군 용진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기손은 동지들에 의해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선봉장에 박일동(朴一東)·엄석훈(嚴錫勳), 중군장 양동환(梁東煥), 후군장 김선원(金善元), 포대장 김봉선(金奉先), 좌익장에 정만선(鄭萬善)·조만길(曺晚吉), 서기 이재훈(李在焄), 군량 조달 문장환(文壯煥) 등으로 구성하였다. 전투용 무기는 포대장 김봉선을 시켜 일본군에게 노획한 무기 양총 500정으로 무장하였다.

1908년 1월 용진산 1차 전투에서 일본군 115명을 사살하였다. 이어 2차 전투에서 일본군 75명을 사살하였다. 1908년 2월 2일 이기손은 주력부대 300여 명을 이끌고 창평 무동촌 전투에 참전하여 일본군 광주수비대장 요시다카츠산신[吉田勝三郞] 소좌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또한, 전라남도 무안군 지도(智島)[전라남도 신안군 지도읍]에 설치된 일본 해군본부를 100명의 결사대로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함평군 나산면 수상리 유덕산, 영광군 대마면 성산리 등지에서도 격전을 벌였다.

1909년 9월 일제가 의병 말살을 위한 남한대토벌작전을 전개하자, 이기손은 '해병문(解兵文)'을 발표하고 의병부대를 해산하였다. 이기손은 국내 의병 활동이 어렵게 되자, 1915년 함경도 청진을 거쳐 만주와 러시아로 이동하여 국외에서 항일 활동을 모색하였다. 1941년 이기손은 충청남도 금산으로 잠입하여 후진을 양성하며 은거하던 중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1957년 11월 27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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