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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1129
한자 樓亭
영어공식명칭 Tower and Pavilion
이칭/별칭 정루,누각,정자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백지국

[정의]

경상북도 경산시에 건립된 누정과 정자.

[개설]

누정(樓亭)은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일컫는 말로 주로 자연경관이 좋은 곳에 마룻바닥을 지면보다 한층 더 높게 지은 다락집을 가리킨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누정조에서는 누(樓)·정(亭)·당(堂)·대(臺)·각(閣)·헌(軒) 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전통 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누정 건립의 주체는 지방관과 선비들이었다. 지방관은 고을 중심지에 누정을 건립하여 공적 장소 내지 지역 선비들과의 교유처로 활용하였다. 또한 선비들은 독서처와 강학 공간, 음풍농월(吟風弄月)의 풍류 공간, 같은 씨족끼리의 종회(宗會)나 마을사람들의 동회(洞會) 또는 계(契)와 같은 사교 공간, 조상과 스승을 기리는 우모소(寓慕所) 등으로 삼고자 누정을 건립했다. 때로는 활쏘기 수련장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한편, 누정에는 여러 현판이 걸려 있다. 건물의 명칭인 편액은 누정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이상향, 목적, 성격 등이 축약되어 있다. 인근의 산·강·하천·못·바위 등 자연물을 활용해 풍류적 성격을 부각시킨다거나, 경전의 구절을 인용하여 누정 건립자가 지향 또는 체득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내기도 한다. 추모하는 인물의 호를 편액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충절·은둔·교육 등 행적을 보여주는 편액도 있다. 기문·상량문 등과 같은 현판은 해당 누정의 건립 경위와 과정을 보여주는 사료가 된다. 이곳을 방문한 문인들이 남긴 시들을 시판(詩板)으로 제작해 걸어 놓은 누정도 있다. 누정에 걸려 진 여러 시판은 이곳을 방문한 문인들의 풍류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경산 지역의 누정은 관찬지리지를 통해 조선 초기부터 확인된다. 현재까지 문헌상으로 확인되거나, 건축물로 남아 있는 경산의 누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옛 경산의 누정]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산현 편의 누정조에는 망북루(望北樓)와 차군헌(此君軒)이 수록되어 있다. 망북루는 객관(客館) 동쪽에 있었던 것으로 나오는데,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지금은 없다고 하여, 18세기 중반 이전에 철폐된 것으로 보인다. 차군헌은 1465년(세조 11) 경산현령(慶山縣令)으로 부임한 채신보(蔡申保)[1420~1489]에 의해 세워졌는데, 채신보가 남긴 기문에 따르면 1320년(충숙왕 7)에 세워졌던 누각을 고친 것이라고 했다.

조선 후기 누각으로는 경산현 관아 문루로서 1871년(고종 8) 현령 이헌소(李憲昭)가 세운 삼산루(三山樓), 읍성 서문의 누각인 진옥루(鎭玉樓)가 있었다. 또한 1773년(영조 49) 현령 김복근(金復根)이 건립한 군자정(君子亭)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모두 남아있지 않다.

경산 지역 선비들에 의해 건립된 누정으로는 긍구정(肯構亭)·경재정(敬梓亭)·일감정(一鑑亭)이 있다. 긍구정은 원래 김한손(金漢孫)[1456~1518]이 청도에 강학처로 건립한 것인데, 훗날 후손들이 경산 지역으로 이거함에 따라 1921년에 새로 지었다. 현재는 김한손의 아버지인 김용(金勇)을 향사 지내고 있다. 경재정은 숙종 연간 백성들을 구휼한 석재사(石載士)를 기리기 위해 1931년 건립한 누정이다. 일감정(一鑑亭)은 박광우(朴光佑)를 기리기 위해 1936년에 건립하였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옛 하양의 누정]

하양현 동헌(東軒) 동쪽에 있던 용벽루(聳碧樓)는 1416년(태종 16) 하양현감(河陽縣監) 송을개(宋乙開)가 세웠으며, 서거정(徐居正)이 시를 남겼다. 관서정(觀逝亭)은 1422년(세종 4) 현감 채륜(蔡倫)이 현 남쪽 4리 지점의 냇물 앞에 세웠다. 용벽루와 관서정 모두 『신증동국여지승람』 누정조에서 수록되어 있으나, 『여지도서』에는 폐해진 것으로 나온다.

하양 지역 선비들이 설립한 누정으로는 경산구연정(慶山龜淵亭)[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15호]·삼괴정(三槐亭)·탁래정(濯來亭)·환산정(環山亭)·완강정(翫江亭)·애련정(愛蓮亭)·청탄정(聽灘亭)·창계정(蒼溪亭)이 남아 있다. 경산구연정김익동(金翊東)[1793~1860]이 1848년(헌종 14) 건립한 누정으로 금호강 가에 위치한다. 현재 경산 지역에 남아 있는 누정 중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삼괴정은 17세기 무렵 김시명(金是鳴)이 건립한 정자로 1956년에 중수되었으며, 현재는 묘재(墓齋)로 사용 중이다. 탁래정(濯來亭)은 허익주(許翊周)[1651~1699]를 기리기 위해 1936년 건립한 것이며, 환산정(環山亭)은 조병희(曺秉羲)[?~?]가 강학하던 곳에 후학들이 스승을 기리고자 1928년에 건립한 것이다. 완강정(翫江亭)은 효자 도봉규(都鳳奎)[1851~1902]의 효성을 기리고자 1936년에 건립하였다. 애련정(愛蓮亭)은 건흥지(乾興池)와 만세보(萬世洑)를 축조한 정응지(鄭應智)[1568~1643]가 1613년(광해군 5) 처음 건립한 누정인데, 1927년에 후손들이 정응지를 기리고자 새로 건립하였다. 청탄정(聽灘亭)은 조선 전기 문신 조상정(曺尙貞)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것이다. 창계정(蒼溪亭)은 허진(許鎭)을 기리는 누정인데, 현재는 거의 무너져 가고 있다.

그 외에도 김사행(金四行)이 만년에 기거했던 식송정(植松亭), 이간(李榦)[1576~1637]이 지은 만고정(萬古亭), 김시성(金是聲)[1602~1676]의 금포정(錦浦亭), 김용(金溶)의 사산정(社山亭), 손승모(孫承謨)의 용호정(龍湖亭), 류상두(柳相斗)의 거연정(居然亭), 우의창(禹義昌)의 양호정(陽湖亭)이 확인되나, 현재 건물은 남아있지 않다.

[옛 자인의 누정]

자인현은 1637년(인조 15) 복현(復縣)되었기에 조선 전기 동안 지방관이 세운 누정은 확인되지 않는다. 복현이 되고 1700년(숙종 26)에 자인현감(慈仁縣監) 전명삼(全命三)이 고을 정청(政廳)인 사중당(使衆堂) 남쪽에다 요산루(樂山樓)를 건립하였으나, 1912년 철거되었다.

자인 지역 선비들이 건립한 누정 가운데 현재 괴정(槐亭)·원모정(遠慕亭)·만송정(晩松亭)·오의정(五宜亭)이 남아 있다. 괴정박치준(朴致準)[1838~1898]이 1891년(고종 28)에 건립하였으며, 원모정박운달(朴雲達)[1491~1554]과 박근손(朴謹孫)을 기리기 위해 1940년 후손들이 건립하였다. 만송정은 하양에서 이거해 온 김희곤(金禧坤)의 독서처이며, 오의정(五宜亭)은 조명호(曺明鎬) 형제가 은거했던 곳에 1942년 후손들이 새로 건립한 것이다. 그 외에도 구성신(具誠信)을 기리기 위해 1847년 지은 학천정(鶴川亭)이 있었으나, 현재 건물은 없다.

[기타 누정]

현대에도 경산 지역에서는 문중을 중심으로 많은 누정이 건립되었다. 다만, 현대 누정은 강학이나 풍류의 목적이 아니라, 주로 해당 가문의 현조(顯祖)를 기리거나, 문중 구성원 간 결속력을 다지는 장소로 활용하기 위해 건립된 것이다.

이와 관련된 현대 누정으로는 1956년 허대윤(許大胤)·허경윤(許景胤)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상의정(尙義亭), 김사총(金四聰)의 식송정(植松亭), 1972년 이상규(李祥奎)의 경호정(景湖亭), 2000년 청도 김씨 문중의 사산정(社山亭), 1978년 밀양 박씨 문중의 석천정(石泉亭), 1966년 이강(李江)의 운산정(雲山亭), 1966년 허성구(許聖坵)의 경운정(景雲亭), 1956년 우의창(禹義昌)의 양호정(陽湖亭), 1946년 고용후(高龍厚)의 추모정(追慕亭), 1963년 서중순(徐重淳)·서중원(徐重元)·서중진(徐重鎭)·서중관(徐重觀)의 사우정(四友亭), 1981년 박황(朴晃)의 운재정(雲齋亭), 1946년 윤동호(尹東豪)의 후송정(後松亭), 1993년 이지효(李止孝)의 모원정(慕遠亭), 1960년 동래 정씨 문중의 삼괴정(三槐亭), 1947년 정변함(鄭變咸)·정변호(鄭變頀)·정변문(鄭變文)의 삼의정(三義亭)이 있다.

한편, 영남대학교 민속촌에는 1974년 다른 지역에서 이건해 온 쌍송정(雙松亭)일휴당(日休堂)이 있다. 쌍송정은 원래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북지리에 있던 누정으로 금혜(琴嵇)[1399~1484]가 처음 건립하였다. 일휴당금응협(琴應夾)[1526~1586]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별당으로 원래는 안동댐 수몰 지역인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오천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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