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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포구 80리, 정감의 거리인가 실제의 거리인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803
한자 河東浦口八十里-情感-實際-
영어의미역 The 80-ri Waterway along the Hadong Inlet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범선규

[개설]

하동포구 80리’는 그 명칭이 어디에서, 어떻게 비롯되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하동포구 80리하동포구의 문학적[시적]·정서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하동포구 80리라는 명칭이 일반인들 사이에서 오르내리게 된 것은 1930년대 발표된 문학 작품의 영향이 크고, 이후 1970년대에 인기를 얻었던 몇몇 대중가요가 큰 영향을 준 것으로 판단된다.

하동포구 80리가 실제로 의미하는 지리적 범위에 대해서는 하동군민 사이에서도 몇몇 견해가 있다. 하나는 하동군 금남면 노량에서 금성면 갈도 해상을 거쳐 섬진강 하구를 지나 하동읍 광평리 하동포구공원까지의 뱃길이라는 견해이고, 또 하나는 하동군 금성면과 전라남도 광양시 진월면을 잇는 섬진강 하구 지점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 하동군 화개면 탑리에 이르는 물길이라는 주장이다.

어찌 됐든 하동포구 80리남해섬진강이 연결되는 뱃길이며, 이 뱃길을 따라 크고 작은 마을이 여럿 자리 잡고 있었던 것과 관련이 깊은 명칭임은 분명한 것 같다. 이 뱃길은 남해섬진강, 그리고 지리산지 등에서 나는 여러 산물의 유통은 물론 인근 주민들의 소통에도 의미 있는 역할을 하였다.

[하동포구 80리를 최초로 활자화한 사람은 누구일까?]

1. 옛 문헌의 하동포구

하동포구 80리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를 단정하여 제시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소항목명으로 제시한 의문을 풀기 위해 우선 하동군의 포구가 언급되는 옛 지리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하동군은 삼국 시대 때 한다사군으로 불리다가 통일신라 경덕왕 때 하동군으로 개칭되었고, 고려 현종 때 진주부에 들었다가 조선 태종 때 남해현을 병합하여 하남현이 되었다. 이후 조선 숙종 때 하동부가 되었으며, 1895년(고종 32) 이후 하동군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동군의 이러한 연혁에 기초한다면 하동포구라는 표현은 대체로 조선 숙종 대 이후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동포구 또는 하동의 포구에 대해서는 조선 전기 이후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31권 하동현 편에 “합진(蛤津)은 현 서쪽 5리 지점에 있으며 조수가 드나든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또 사포는 조수가 드나들고 현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는 내용, 그리고 현의 남쪽 18리 지점에 어장과 함께 있는 서근포가 언급되어 있으며, 같은 책에 군의 서쪽에 있는 나루로 섬진과 두치진의 이름이 올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800년대 초의 상황까지 담고 있는 『여지도서(輿地圖書)』의 「하동부읍지(河東府邑誌)」[1821년 간행]에는 포구와 나루에 관한 기록으로 “합진은 관아 남쪽 30리 지점에 있으며 조수가 드나든다.”라는 기록만 보이고, 섬진강을 “부의 서쪽 수리쯤에 있으며 근원은 전라도 순창·보성·남원에서 나와 합하면서 곡성현 압록원에 이르고, 구례를 지나 화개동에 이르러 쌍계수와 함께 모여 깊은 강이 된다. 이후 호남과 영남의 경계를 틔워 부의 서남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니 조수가 백여 리를 거슬러 올라온다.”고 소개되어 있다.

2. 최초 등장, 남대우의 ‘하동포구 80리

이렇듯 하동포구 80리라는 표현은 조선 후기까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이 명칭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아마도 1935년에 발표된 문학 작품인 남대우(南大祐)의 「하동포구(河東浦口)」가 아닐까 한다. 이 작품의 전문은 아래와 같다.

하동포구(河東浦口) 팔십 리(八十 里)에 물새가 울고/ 하동포구(河東浦口) 팔십 리(八十 里)에 달이 뜹니다/ 섬호정(蟾湖亭) 댓돌 우에 시(詩)를 쓰는 사람은/ 어느 고향(故鄕) 떠나 온 풍류랑(風流郞)인고.

하동포구(河東浦口) 팔십 리(八十 里)에 굽도리배야/ 하동포구(河東浦口) 팔십 리(八十 里)에 봄을 실어라/ 백사장(白沙場) 모래 우에 남아 있는 글짜는/ 꽃바람에 쓸리는 충성(忠誠) 충(忠) 자(字)요.

하동포구(河東浦口) 팔십 리(八十 里)의 물결이 고아/ 하동포구(河東浦口) 팔십 리(八十 里)의 인정(人情)이 곱조/ 쌍계사(雙磎寺) 종(鍾)소리를 들어 보면 알께요/ 개나리도 정답게 피여 줍니다.

위 전문은 하동포구노래비건립위원회가 1994년 4월 10일 하동읍 광평리 섬진강 변 오룡정 휴게소에 세운 시비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다. 이 작품을 남긴 남대우에 대해서는 같은 시비에 “남대우 시인은 아동문학가로서 1913년 경남 하동군 하동읍에서 태어나 1934년 동아일보 신춘 현상 문예 동화 부문에서 당선을 비롯하여 36년간의 생애를 통해 주옥같은 동화와 동시를 남겼으며 하동포구는 1935년에 발표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아울러 『하동군지』[1996년 간행]에 “남대우는 일제 강점기에 있어서는 우리 민족 활동이 전반적으로 침체의 늪에 빠졌고 특히 문학 활동의 영역은 그 정도가 심하였다. 이런 와중에서도 아동문학가 남대우의 활동은 매우 두드러진 바 있었다. 남대우는 ……[생략]…… 길지 않은 생애를 통하여 주옥같은 동화와 동시, 동요 등을 남겼으니 광복의 해인 1945년에 작품집 『어깨동무』 1집을 내고 1946년에 『어깨동무』 2집을 출간하였다. 1948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애석하고도 안타까운 일이다. 1992년 7월에 유족에 의해 남대우 유고집 『우리 동무』가 출간되었다. 또한 우리 고장 사람 모두가 사랑하고 즐겨 부르며 전국에 알려진 「하동포구」의 노래는 남대우가 1935년에 발표한 것으로 그의 고향 사랑의 마음과 애국, 애족의 충정을 엿볼 수 있다. 이에 고향을 사랑하는 유지들이 하동포구노래비건립위원회를 구성하여 1994년 4월 10일에 하동읍 섬진강 변 오룡정 휴게소[공원]에 하동포구노래비를 건립하였다.”고 밝혀 적고 있다.

이렇듯 남대우는 오늘날에도 하동을 대표하는 문인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남대우를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시켰던 『동아일보』는 유족들이 펴낸 유고집과 관련한 기사를 싣고 있는데, 기사 전문을 아래에 옮겼다.

「남대우 씨 유고집 44년 만에 ‘햇빛’ - 동시·동화 2백여 편 모아 『우리 동무』 출간」

암울했던 일제 말기 동요와 동화로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 주었던 아동문학가 남대우 씨[1913~1948]의 유고집 『우리 동무』가 출간됐다. 타계한 지 44년 만에 햇빛을 보게 된 유고 작품집은 2백여 편에 이르는 동시와 동화 11편을 비롯해 그가 나고 자라온 고향 경남 하동포구에 대한 글을 담고 있다.

남씨는 18세부터 아동문학에 전념하기 시작했는데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3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쥐와 고양이」라는 동화가 당선돼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들어갔다.

이번 유고집은 그가 해방을 맞아 등사본으로 펴낸 동시집 『우리 동무』와 동아일보 등에 발표한 작품을 후손들이 모아 펴낸 것으로 그동안 묻혀 지냈던 그의 작품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의 작품은 우리의 일상적인 말이나 이야기가 얼마나 쉽게 시가 되고 노래가 되는지를 보여 준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유고집에 대해 원로 아동문학가 박화목 씨는 “그의 동요에는 의성어·의태어의 세련된 감각 시어가 많이 나타난다”고 소개하고 “초창기 아동문학을 풍요롭게 한 그의 업적을 뒤늦게나마 소중히 여겼으면 한다”고 평했다.[1992년 9월 16일자]

3. 대중가요 속의 ‘하동포구 80리

하동포구 80리의 연원과 관련하여 주목을 끄는 또 다른 항목으로 1970년대에 집중적으로 발표되어 대중들의 사랑을 받은 「하동포구 아가씨」라는 곡명의 가요들이다. 하춘화(河春花)·조미미·은방울 자매 등이 각각 불러 제작, 판매한 레코드판이 그것인데, 특히 1972년 지구레코드사가 제작, 발매하여 하춘화가 노래한 「하동포구 아가씨」라는 곡이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정두수(鄭斗守) 작사, 박춘석(朴椿石) 작곡의 노래 전문은 아래와 같다.

쌍돛대 님을 싣고 포구로 들고/ 섬진강 맑은 물에 물새가 운다/ 쌍계사 쇠북 소리 은은히 울 때/ 노을진 물결 위엔 꽃잎이 진다/ 팔십 리 포구야, 하동포구야/ 내 님 데려다 주오.

흐르는 저 구름을 머리에 이고/ 지리산 낙락장송 노을에 탄다/ 다도해 가는 길목 섬진강 물은/ 굽이쳐 흘러흘러 어디로 가나/ 팔십 리 포구야, 하동포구야/ 내 님 데려다 주오.

하춘화가 불러 큰 반향을 일으켰던 이 노래는 후일 조미미도 취입해서 발표했다. 이 곡에 나오는 “팔십 리 포구야, 하동포구야”는 실질적으로 ‘하동포구 80리’를 대중들에게 널리 각인, 인식하게 한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오늘날 일반인들 사이에 ‘하동포구 80리’가 기억된 것은 이 곡의 인기와도 관련이 깊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은방울 자매가 부른 또 다른 「하동포구 아가씨」의 가사 전문은 앞의 그것과 다르다.

하동포구 80리에 달이 뜰 때면/ 정한수 떠놓고 손 모아 빌던 밤에/ 부산 가신 우리 님은 똑딱선에 오시려나/ 쌍계사의 인경 소리 슬프기도 한데/ 하동포구 아가씨는 잠 못 들고 울고 있네.

쌍돛대가 임을 싣고 섬진강 따라/ 정다운 포구로 돌아올 그날까지/ 새벽꿈에 아롱아롱 우리 님은 오시려나/ 쌍계사의 인경 소리 임 마중을 할 때/ 어이하여 못 오시나 어느 날짜 오시려나.

위 내용을 종합하면, ‘하동포구 80리’라는 명칭은 1930년대 발표된 아동문학가 남대우의 「하동포구」라는 작품을 통해 최초로 활자화되면서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1970년대의 대중가요 가사를 통해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게 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하동포구 80리! 어디에서 어디까지인가?]

1. 구례구~화개면 탑리

이 질문에 대해서도 앞에 제기된 소항목과 같이 답을 명확하게 정리하여 제시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80리’의 실체에 대해서는 문헌이나 현지 조사를 통해 여러 가지 견해를 확인했다. 이러한 견해는 현지 조사 과정에서 주민들과의 면담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포구(浦口)’의 사전적 의미는 ‘배가 항행하는 강·내 중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어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포구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즉 배와 바닷물이 드나들어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이러한 기준을 하동포구 80리에 적용해 보면, 우선 배의 항행은 하동군에서 해안선을 끼고 있는 금남면[해안선 길이 38.5㎞]과 금성면[해안선 길이 38.9㎞], 진교면[해안선 길이 7㎞]의 바다는 물론이고 섬진강을 내륙 수로로 이용하여 오르내렸다. 해로상의 주요 지점은 오늘날의 노량[하동군 금남면 남해대교 인근]이 대표적이다.

노량은 섬진강 하구에서 멀지 않아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선박 항해의 주요 거점이며, 섬진강을 이용한 수운도 조선 후기는 물론이고 근래까지도 활발했다. 섬진강 수운의 가항 종점은 선박의 크기나 유량에 따라 변화가 있지만 오늘날의 구례군 지역까지 거슬러 올라갔던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고려 사항인 바닷물의 출입 여부는 밀물과 썰물의 차이, 즉 조차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섬진강 하구 부근[삼천포·광양·여수]의 대조차는 대략 2.5~3.5m를 보여 한반도의 서해안과 비교하면 크지 않지만 낙동강 물이 유입되는 김해·부산·거제 연안에 비해서는 비교적 크다. 이 때문에 밀물 때에는 섬진강 하구를 지나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담수[민물]와 해수[바닷물]의 중간적 특성을 지닌 기수구역을 형성, 발달시킨다. 밀물 때 바닷물이 거슬러 올라가는 구간은 섬진강 하구역의 간척과 함께 대규모 제철 공장이 들어선 이후 이전에 비해 상류로 훨씬 더 연장되었다고 한다. 대규모 간척 이전에는 하구에서 하동포구공원 부근까지 영향을 주었다.

결국 배와 바닷물의 출입이 동시에 이루어졌던 포구를 엄밀하게 적용하면, 하동군 관내를 흐르는 섬진강에서 포구는 하동읍의 두 개의 섬진교, 즉 하류의 경전선 철도가 지나는 섬진교와 이보다 약 1㎞ 상류에 부설된 국도 2호선상의 섬진교 사이의 섬진강 변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 강변에는 하동포구공원하동 송림 등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추론은 배의 크기나 종류, 바닷물의 출입 구간에 대한 인식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고, 포구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배의 통항과 바닷물의 출입에 관한 기록은 조선 후기의 지리지에도 일부 보인다. 실례를 들면 1820년대의 『하동부읍지(河東府邑誌)』에는 “[섬진강은] 호남과 영남의 경계를 틔워 부의 서남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니 조수가 백여 리를 거슬러 올라온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중환(李重煥)이 1751년대에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택리지(擇里志)』에는 “구례 남쪽의 구만촌(九灣村)은 거룻배를 이용하여 생선과 소금 등을 얻을 수가 있어 가장 살 만한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구만촌은 지금의 구례구(求禮口) 부근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8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지지자료』에는 섬진강의 선박 항해 가능 지점을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양문리까지의 38.7㎞ 구간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상의 자료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면, 하동포구 80리섬진강 하구에서 80리 정도 떨어진 하동군 화개면 탑리까지의 구간을 지칭한 명칭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2. 문학적 표현으로서의 거리

하동포구 80리의 지리적 범위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것과 또 다른 주장도 있다. 우선 하동포구 80리에서 80리는 실제의 거리가 아니라 ‘문학적[시적] 표현’ 또는 ‘정서적 표현’, ‘정감의 거리’로 보는 입장이다. 이 견해는 섬진강 하구에서 하동읍까지의 물길을 하동포구 80리로 보면서 80리는 실제의 거리가 아닌 정감의 거리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섬진강 하구에서 하동읍까지의 거리는 10㎞ 남짓으로 넉넉히 잡아도 30~40리에 불과해서 ‘80리’와 너무 동떨어져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 아울러 거리를 구체적인 수치인 ‘80리’로 제시한 점에 대한 고민이 적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3. 금성면 갈사리~화개면 탑리섬진강 구간

또 하나의 주장은 하동포구 80리섬진강 하구인 하동군 금성면 갈사리에서 화개면 탑리까지의 섬진강 물줄기로 보는 견해이다. 이 주장은 두 지점 간의 실제 거리가 30여㎞로 대략 팔십 리가 될 뿐 아니라, 탑리에서 섬진강을 조금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경상남도 하동군을 벗어나 전라남도 구례군의 땅이 되므로 설득력을 갖고 있다. 이 주장은 하동포구 80리를 대중에게 기억하게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하동포구 아가씨」의 가사 내용[앞에 제시된 가사 참고]을 검토해 보면 믿음이 간다. 더욱이 작사자 중의 한 사람이 「하동포구 아가씨」[하춘화 노래]의 가사에 담긴 의미를 짐작하게 하는 기사를 신문에 연재한 내용을 볼 때 한층 신뢰가 간다.

여기 신문 연재 기사 전문을 일부 풀어서 옮겨 싣는다. 이 기사는 「하동포구 아가씨」의 작사자 정두수가 직접 작성한 것으로, 『동아일보』 1992년 3월 7일자에 실린 「가요 100년 그 노래 그 사연〈31〉-하동포구 아가씨」라는 기획 기사이다.

「가요 100년 그 노래 그 사연〈31〉-하동포구 아가씨」

경남 하동. 그 포구 80리는 예로부터 빼어난 경관으로 많은 시인 묵객들이 즐겨 소재로 다뤘다. 하동은 일제 때만 해도 수로의 중심으로 포구 구실을 톡톡히 했다.

닷새 만에 한 번 서는 장날이면 하동포구는 이곳저곳에서 밀려드는 장배와 장사꾼들로 인해 파시가 형성됐다. 세월에 밀려 하동은 포구로서의 구실은 미미해졌지만 경관은 별로 달라진 게 없다.

1972년 봄. 가요 연구가 이승관 씨와 나는 고향 친구인 이수종 씨와 강병주, 강신옥, 오영호 씨의 초청으로 하동에 갔다. 차로 지리산 뱀사골을 거쳐 노고단을 넘은 우리는 다시 하동 쌍계사화개장터를 둘러봤다. 이어 하동포구 초입인 악양골을 끼고 하동포구 80리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맑고 고요한 심경. 강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나무 나무 나무. 지리산의 웅장하게 휘감는 산자락과 수려한 섬진강에 우리는 잠시도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읍내에 있는 광평 송림에 닿았다. 은빛 백사장과 아름드리 솔숲, 그리고 대숲을 이고 우리는 한잔 소주를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신방촌 갈사리를 돌아 3백 리 한려수도의 길목-노량 앞바다에까지 이르렀다. 따스한 햇살, 상큼하기까지 한 바닷바람. 봄 바다는 한 편의 서정시였다. 순간 「하동포구 아가씨」의 가사가 떠올랐다.

‘쌍돛대 님을 싣고 포구로 돌고/ 섬진강 맑은 물에 물새가 운다/ 쌍계사 쇠북 소리 은은히 울 때/ 노을진 물길 위엔 꽃잎이 진다/ 80리 포구야, 하동포구야/ 내 님 데려다 주오’

4. 금남면 노량~하동포구공원 구간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될, 하동포구 80리의 구체적인 지리적 구간에 대한 주장 중에는 섬진강에 한정하지 않고 남해대교 하동군 기점인 금남면 노량에서 해로를 따라 섬진강 하구에 이르고, 다시 하동포구공원 부근까지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견해의 바탕에는 섬진강 하구와 하류, 그리고 인접 해양의 오랜 역사적·문화적 배경이 짙게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조선 후기의 기록인 『여지도서』 제39권 곤양현 편에는 “노량진의 동남쪽은 바닷물이 굽이치며, 호남과 영남이 통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바닷가 각 고을에서 거둔 세금을 실은 배가 여기에 모두 모였다가 서울에 도달한다. 예전에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왜적을 맞아 싸워 승리를 거둔 중요한 나루”라고 기록하고 있다.

노량[진]이 가졌던 교통 요지적 성격은 개항기를 거치고 일제 강점기를 지나 1968년에 순천-진주를 연결하는 경전선 철도가 준공되기까지 지속되었다. 당시 노량은 부산-여수 노선과 부산-목포 노선의 주요 기항지였으며 마산, 삼천포, 여수 등지를 왕래하는 주요 여객선의 운항이 끊이질 않았다. 노량[진]의 이러한 면은 섬진강 하류의 수운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면서 이 지역 해운과 수운 활동에서 실제 핵심적인 거점 역할을 했고, 한 발 더 나아가 섬진강 하류의 대다수의 포구를 체계적으로 연결, 통합하는 중추적 기능을 수행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때문에 노량진은 엄밀한 의미에서 포구로 볼 것인가 하는 점을 잠시 접어 둔다면, 하동포구 80리금남면 노량하동읍 광평하동포구에서 시작되고 끝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는 보는 입장과 경우에 따라 하동포구 80리의 지리적 실체와 관련하여 가장 설득력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하동포구 80리가 하동 문화에서 갖는 의의는 무엇일까?]

하동포구 80리의 시점이나 종점을 노량으로 보든 섬진강 하구로 보든 간에 하동포구 80리는 한때 전국 제일의 김 맛을 자랑하던 하동김의 산지인 갈사도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갈사도하동군 금성면 갈사나루터 남쪽에 위치한 섬으로 지금은 육지와 이어졌다. 섬진강의 하구에 위치하여 품질 좋은 김이 생산되었으나, 간척 사업과 인접한 광양시에 거대한 제철소가 들어서면서 김 양식은 쇠퇴하였다. 하동 해양 문화의 정수를 담고 있던 특산물이 사라진 것이다.

갈사도에서 뱃길을 따라 섬진강을 거슬러 오르면, 전라남도 광양시와 경상남도 하동군을 연결하는 광양대교를 지나게 된다. 광양대교를 지나 정면에 보이는 섬이 배알도고, 이 배알도 너머 보이는 산이 광양시 진월면의 망덕산(望德山)[높이 196m]이다. 망덕산 아래 물가는 경치가 아름다워 많은 문인들이 정자를 짓고 시를 읊었다는 곳이다. 이곳의 경치는 단순했을지도 모를 하동포구를 좀 더 문학적이고 정서적인 ‘하동포구 80리’로 바꾸는 데 이바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배알도를 지나면 오른편으로 소머리 모양의 두우산(頭牛山)이 나타난다. 두우산 정상에는 봉수 터를 비롯한 문화 유적이 남아 있다. 봉수 터는 하동포구 80리가 해상과 내륙을 연결하는 길목에 자리하여 교통뿐 아니라 국방상의 요충지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두우산을 지나면 남해고속도로상의 섬진강교가 보이고, 섬진강교 뒤편으로 주교천(舟橋川)이 흘러든다. 주교천 또한 물길을 따라 배가 오르내렸기에 붙여진 이름으로 하동포구 80리의 거점 역할을 했던 포구 마을이 있다. 섬진강 변을 따라 개설된 국도 19호선을 따라 강을 조금 더 거슬러 달리면 신방나루터에 닿는다. 하동포구 80리에는 신방나루 외에도 여러 나루가 있어 영남과 호남 주민들 간의 교류와 소통에 기여를 했다. 나루터를 하동 사람들은 ‘나릿가’라고도 한다. 나루의 이러한 기능은 문화적으로 분리적 요소를 담고 있는 섬진강을 극복하고 하나의 문화권을 설정할 수 있게 했다. 언어 문화권 설정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신방나루를 지나 횡천강섬진강의 합류점을 지나면 섬진강의 오른쪽에 하동포구공원이 나타난다. 하동포구공원에는 잘 가꾸어진 소나무 숲과 ‘하동포구 아가씨 노래비’[노래 하춘화], 그리고 ‘하동포구’라는 돛을 단 모형 범선이 노래비 옆에 덩그렇게 놓여 있다. 노래비는 국제라이온스협회 355-J에서 제4지역 기념사업으로 2006년 12월 2일에 건립한 것이다. 이 포구는 하동포구 80리를 대표하는 곳으로, 많은 사람들의 삶터로 활기가 넘쳤을 것이나, 오늘날에는 은어와 전어로 겨우 명맥을 잇고, 마을 어촌계에서 운영하는 재첩 양식과 채취가 주로 이루어지는 포구로, 재첩을 잡는 철을 제외하면 한적하다.

하동포구공원을 지나 말을 놓아길렀다는 목도를 오른편에 두고 강을 왼쪽으로 돌아 거슬러 오르면, 1968년에 개통된 경전선의 섬진강 철교가 모습을 드러낸다. 섬진강 철교 밑으로는 모래톱이 펼쳐 있고, 모래톱 뒤편에는 300년 된 소나무들로 이루어진 하동 송림이 자리 잡고 있다. 천연 기념물인 하동 송림섬진강 변 넓은 백사장을 주민들은 백사청송(白沙靑松)이라 부르며, 하동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상징으로 생각하고 있다. 대략 이곳까지가 하동포구 80리에 드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이곳에서 다시 강을 거슬러 오르면서 섬진나루를 지나 화개 악양까지의 물길을 하동포구 80리로 보기도 한다. 섬진나루에는 섬진강 이름의 유래가 된 두꺼비 이야기가 전해 오고, 악양에는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에서 핵심적인 배경으로 설정된 들과 가옥이 들어서 있으며, 화개에는 영남과 호남 사람들의 정겨운 삶이 투영되어 있는 오일장터와 유명한 벚꽃 길이 있다. 이 장터도 대중가요에 등장하면서 전국적인 유명세를 탔으며, 벚꽃 길에는 하동포구처럼 ‘10리’라는 명칭이 따라 붙어 있다.

이렇듯 하동포구 80리남해섬진강, 그리고 지리산지에 사는 사람들을 이어 주던 뱃길이며, 이 뱃길의 중심부에 하동군에 속하는 다수의 포구 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결국 바다와 들, 산을 하나로 이어 주던 하동포구 80리 뱃길은 지리산·섬진강·남해에 결코 뒤지지 않은 하동 문화의 뿌리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이 문화의 뿌리는 바다·강·산·들을 모두 아우르는 깊고 튼튼하며 굵은 뿌리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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