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300467
한자 大興寺千佛像
영어공식명칭 Daeheungsa Cheonbulsang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불상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구림리 799]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황호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작 시기/일시 1817년연표보기 - 대흥사천불상 제작
문화재 지정 일시 1974년 9월 24일연표보기 - 대흥사천불상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대흥사천불상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
현 소장처 대흥사 -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구림리 799]지도보기
성격 불상
재질 옥제
크기(높이) 약 25㎝
소유자 대흥사
관리자 대흥사
문화재 지정 번호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두륜산 해남 대흥사 천불전에 봉안된 옥석제 천불상.

[개설]

대흥사천불상(大興寺千佛像)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두륜산 해남 대흥사 천불전에 봉안되어 있다. 1817년 옥으로 만든 천불상으로 1974년 9월 24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되었다.

[위치]

대흥사천불상대흥사 남원(南院)의 중심 불전인 천불전[보물 제1807호]에 봉안되어 있다. 남원 마당은 입구의 가허루를 지나면 좌우에 봉향각과 대흥사 용화당[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3호]이 천불전을 중심으로 □자형으로 둘러싸고 있어 독립된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변천]

해남 대흥사 천불전은 1813년 초의선사의 스승인 완호(玩虎)대사와 제성(濟醒)대사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천불전에는 1817년 조성된 경주 옥돌로 만든 천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경주 기림사에서 조성되어 해남 대흥사로 옮기기 위해 1817년 11월 25일에 2척의 배에 실었으나 1척이 풍랑으로 표류해 일본까지 갔다가 돌아와 1818년 8월 15일 천불전에 추가로 봉안되었다.

천불상은 천불전 중건의 주역이었던 완호대사의 제자 풍계(楓溪)대사 등이 경주 지역의 불석산 옥돌로 10명의 조각사가 6년에 걸쳐 조성하였다고 한다. 천불상이 완성되자 해남 대흥사 천불전에 모시기 위하여 완도 장삿배와 홍원 장삿배 2척에 각각 나누어 싣고 전라남도 해남으로 오던 중 풍계대사가 탄 배가 바다에서 표류하게 된다. 천불상 768좌와 승객 27명[승려 15명, 일반인 12명]을 실은 홍원배가 1817년 11월 25일 부산 동래 앞바다에서 표류하여 11월 29일 일본 이키[壹岐] 오시마[大島]에 표착하였다. 이들은 1818년 1월 2일 나가사키[長崎縣]로 송치되었다. 일본인들이 서둘러 절을 짓고 불상을 봉안하려고 하자 불상들이 꿈에 나타나, “우리는 지금 조선국 해남 대흥사로 가는 중이니 이곳에 봉안될 수 없다.”라고 하여 결국 되돌려 보냈다고 한다. 조사가 끝나자 4월 14일 나가사키를 떠나 대마도[對馬島]로 향하였다. 마지막으로 5월 4일 대마도에 도착한 일행은 6월 18일 대마도의 북쪽 끝에서 배를 띄워 부산 왜관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동풍에 밀려 일행은 웅천[진해]에 표착하고 말았다. 일행은 웅천에서 다시 동쪽으로 배를 타고 이동하여 6월 27일 동래에 닿았으며, 동래부로부터 다시 조사를 받았다. 7월 5일 동래를 출발한 일행은 7월 14일 해남 앞바다에 도착하여 이튿날인 7월 15일 대둔사로 들어갔다. 한 달 뒤인 8월 15일 마침내 천불상을 천불전에 봉인하였다.

최근에 발견된 다산 정약용이 완호(玩虎) 윤우(倫佑)[1758~1826]에 보낸 편지에 의하면 “일본에 표류하였다가 돌아온 부처의 등에다 작은 전자(篆字)로 ‘일(日)’ 자를 써서 일본으로부터 온 것임을 적어 둔 뒤라야 서로 뒤섞이는 탄식이 없게 될 것이니 초의 의순과 함께 의논하십시오.”라고 하여 천불상 왼쪽 등과 어깨 사이에 ‘일(日)’과 ‘일본(日本)’ 글자를 붉은색의 전자(篆字)로 쓰인 내력이 밝혀졌다. 전라남도 화순 쌍봉사의 화원승으로 해남 대흥사 천불전의 천불 조성을 담당하였던 풍계현정(楓溪賢正)의 『일본표해록(日本漂海錄)』[1821]에 대흥사천불상의 일본 표류 내력이 자세히 기록되었다. 풍계가 몸소 표류를 겪은 내용뿐만 아니라 일본의 풍토, 문물, 습속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언급되어 있다.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와 『동사열전(東師列傳)』에도 기록되어 있다.

[형태]

대흥사천불상의 크기는 높이 약 25㎝에 이른다. 천불상이 있는 사찰인 직지사나 화엄사 구층암의 천불상처럼 서로 닮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랑한다. 중앙에 목조여래좌상을 본존으로 하고 좌우에 목조보살좌상을 협시로 두었다. 뒤쪽으로 옥석(玉石)으로 조각한 천 개의 작은 불상을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높게 비스듬히 배열(配列)하였다. 층단식의 불단 위에 정좌하고 노란색의 대의(大衣)[설법을 하거나 걸식을 할 때 입는 승려의 옷]를 두르고 있다. 평방위까지도 배치되었다. 상호(相好)[부처의 몸에 갖추어진 훌륭한 용모와 형상]는 살이 많이 올라서 사각형이다. 머리에 중간 계주와 정상 계주가 있다. 목은 짧고 등이 약간 굽은 듯하다. 귀는 길고 큰 편이다. 수인(手印)은 여러 가지 형식을 취하고 있다. 자세는 모두 좌상이며 무릎 높이가 전체 길이에 비교하여 높은 편이다. 불상들은 표면에 호분(湖粉)[흰 가루]을 짙게 칠해서 흰색을 띠고 있다. 경상도 신도들의 꿈속에서 천불상들이 나타나 “가사를 입혀 달라.”고 하였다고 한다. 신도들은 4년마다 새 가사로 갈아입히고 있다. 헌 가사는 모두 신도들이 가져가는데 헌 가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무병장수하고 만사형통한다고 전한다.

[특징]

대흥사천불상은 풍계대사가 경주 불석산 옥돌로 1811년부터 6년 동안 만들어 1817년 완성하였다. 등이 앞으로 약간 굽거나 중간 계주와 정상 계주를 모두 갖추는 등 조선 후기 양식을 잘 표현하였다. 상호와 수인 등에서 획일성에서 탈피하려고 노력한 점이 돋보인다.

[현황]

해남 대흥사 천불전은 건물 전체의 보존 상태가 완전하며 현재도 종교적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대흥사천불상은 1974년 9월 24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안내판이 설치되어 문화재에 대한 이해를 돕고 감시 장치[CCTV]를 설치하여 보호 관리하고 있다. 관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에서 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대흥사천불상은 제작자와 조성 시기, 조성 기간 등이 당사자에 의해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매우 높다. 더구나 풍계대사가 직접 작성한 『일본표해록』은 일본의 풍토·문물·습속 등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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