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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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德村影堂 |
영어공식명칭 | Deokchonyeongdang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 374-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희태 |
이전 시기/일시 | 1800년대 초 - 덕촌영당 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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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덕촌영당 -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 374-2 |
원소재지 | 덕촌영당 - 충청남도 부여군 |
성격 | 사우 |
양식 | 목조와가 |
정면 칸수 | 3칸 |
측면 칸수 | 1칸 |
소유자 | 제주양씨 종중 |
관리자 | 제주양씨 종중 |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에 있는 조선 후기 건립된 제주양씨 양득중의 영당.
[개설]
덕촌영당(德村影堂)은 1800년대 초반 충청도 부여에서 옮겨 와 지은 덕촌 양득중(梁得中)[1665~1742]의 영당이다.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에 있다. 양득중의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택부(擇夫), 호는 덕촌(德村)이다. 아버지는 양우주(梁禹疇)이며, 어머니는 죽산안씨이다. 기묘명현 양팽손의 6대손이다. 17세에 박태초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뒤에는 윤증의 문인이 되었다. 이세필·신익상·박세채 등과 학문을 토론하였으며, 학자로서의 명망이 높았다. 1694년(숙종 20) 학행으로 천거받아 1697년 효릉참봉이 되었다. 1703년 공주의 덕촌으로 이사하여 스승 윤증을 가까이 모시고 학문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1706년 회인현감 이후 김제군수, 사헌부 지평, 1734년(영조 10) 경연참찬관을 지냈다. 수취체제의 개선을 주장하였으며, 실사구시의 실학을 역설하여 학문풍토의 개선을 건의하였다. 탕평책의 시행으로 고질적인 당파싸움을 없애자고 하였다. 「명대의변(明大義辨)」을 저술하였고 문집으로 『덕촌집』 10권 5책이 있다.
[위치]
덕촌영당은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 영계 마을 가운데에 있다.
[변천]
덕촌영당은 덕촌 양득중의 영정을 봉안한 영당이다. 원래는 충청도 부여에 있었으나 1800년대 초반에 현재 위치로 옮겼다. 건립 연도는 1800년(정조 24) 또는 1803년(순조 3)경으로 전해 오지만 자세한 연대는 미상이다.
[형태]
덕촌영당 신실은 앞면 3칸, 옆면 1칸의 규모로 지붕은 맞배지붕집이다.
[현황]
덕촌영당 주변에는 제주양씨문각이 있는데 소심재 양우회[1635~1680]가 건립하였다. 양우회는 양득중의 큰아버지이다. 제주양씨문각은 양득중과 양처중[1661~1723], 양성중[1662~1720] 등 제주양씨 문중 8문장이 수학한 곳으로 전한다. 덕촌영당이 있는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는 조선시대에 영암군 옥천시면에 속하였다. 1906년 해남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옥천면 영신리가 되었다. 제주양씨 종중에서 매년 음력 8월 제향을 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덕촌영당은 해남 세거 씨족의 선현 추숭 활동과 해남 향촌 사회사를 알 수 있는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