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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006
한자 平和-象徵, 梅香里平和生態公園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철웅

[정의]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에 있던 쿠니사격장을 폐쇄하고 매향리평화생태공원을 설립하기 위해 노력한 매향리 주민들의 투쟁.

[매향리의 위치와 마을 이름의 어원]

매향리(梅香里). 한반도 중서부 경기도 서남해안에 자리한 서해안의 작은 농어촌 마을이다. 화성시 우정읍 관할 행정 구역이며, 서남쪽으로 아산만에 접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남양만과 접하고 있다. 매향리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농지를 일궈 쌀을 생산하였고, 염전을 조성하여 소금을 만들었으며, 바다에서 어업하고 갯벌에서 굴과 조개를 캐며 살아왔다.

매향리, 세글자 이름의 유래에는 세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는 마을 앞 모래 언덕에 매화나무 군락이 있어, 매화 향이 마을로 불어온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 마을 이름을 지을 때 서원과 구장이라는 두 문장가가 매(梅) 자와 향(香) 자를 선택하여 마을 이름이 매향리가 되었다고 하는 설이 있다. 세 번째 설은 누군가 미륵불을 기다리며 땅에 향을 묻었다는 뜻에서 매향(埋香)이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한자음이 같은 매향리(梅香里)로 바뀌었다고 하는 설이다. 많은 마을 주민들은 첫 번째 설을 사실로 믿고 있다.

그러나 매화 향은 더 이상 매향리를 향해 불어오지 않는다. 1951년부터 2005년까지 반백 년의 시간 동안 매향리를 가득 채운 것은 매화 향이 아닌 전투기의 소음과 포탄의 탄내였다. 매향리에 설치되었던 쿠니(KOON-NI)사격장 때문이었다.

[매향리 쿠니사격장의 설치와 운영]

매향리 주민 증언에 따르면,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8월에 매향리 농섬에 미 공군의 폭격이 시작되었다. 농섬은 매향리 앞바다 1.6㎞ 밖에 있는 작은 섬이다. 미군의 폭격은 농섬을 해상 표적으로 삼아 실시한 사격 연습이었다. 혹자는 농섬에 폭격이 가해지기 전에, 해안에서 500m 밖의 구비섬에 먼저 폭격이 가해졌다고도 한다. 어느 섬이 먼저 폭격을 당하였든, 미국의 사격 연습은 어떠한 법적 근거도 없는 것이었다.

당시 매향리 주민들은 미군의 폭격에 ‘전쟁이 끝나가는구나, 미군이 쓰고 남은 폭탄을 이곳에 버리고 가는구나’ 생각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폭격은 끝나지 않았다. 휴전 협상이 한창이던 1952년 미군이 고온리(高溫里) 해변가에 군용 막사를 치고 주둔하기 시작하였다. 고온리는 매향리의 옛 명칭으로, 일제 강점기에 매향1리매향5리가 고온리로 불리었다[현재는 매향리와 고온리 모두 행정 명칭인 매향리로 불리고 있다]. 이후 미군은 막사 주변 69만 4,214㎡를 징발하고, 일부를 폭격장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징발된 땅 중 일부는 경작이 허용되었으나, 1963년 5월 징발한 땅 전부를 폭격 훈련장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이곳에 거주하던 140여 가구가 강제 이농 위기에 처하였다. 이후 1968년 주한 미군의 요청에 따라 국방부가 농섬을 중심으로 반경 3,000피트, 이와 접한 해안 일대 95만 8,677㎡를 추가 수용하고 육상 사격장을 만들며 쿠니사격장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79년 사격장의 반경이 농섬을 중심으로 반경 8,000피트로 확장되었고, 1980년 해안 지역 농지를 추가 징발하여 총 2,376만 8,595㎡로 확장되었다.

쿠니사격장의 알파벳 철자는 ‘KOON-NI Range’이다. 쿠니사격장의 명칭 ‘쿠니’는 매향 1리매향5리의 옛 이름 고온리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KOON의 중간에 대시[-]를 넣으면 ‘KO-ON-NI’가 된다. 쿠니사격장은 경기도 오산시의 미 공군사령부 산하 대한민국 주둔 제7공군 소속의 미군 전용 폭격장이었다. 쿠니사격장 일대는 높은 산이 없는 구릉지였고, 안개 끼는 날이 거의 없었다. 해상 표적물과 지상 표적물이 근접하여, 해상 사격장과 육상 사격장의 동시 운영이 가능하였으며, 기록 사격과 해상에서의 폭탄 투하 훈련이 동시에 가능한 공중 폭격장이었다. 미군은 쿠니사격장을 ‘실전에 버금가는 훈련장’으로 인식하고, 시뮬레이터와 이론으로만 훈련받은 초보 파일럿들을 이곳에서 훈련시켰다. 이 때문에 쿠니사격장은 미군 태평양사령부 산하 제7공군뿐 아니라, 일본·필리핀·태국·괌 등 아시아 주둔 미군 공군기의 폭격 훈련장으로 활용되었다.

쿠니사격장의 크기는 비교적 작은 편이었다. 쿠니사격장에는 행정실·레크리에이션센터·목욕 시설·생활관·식당·영선실·수송 및 정비실과 같은 시설이 있었다. 또한 부대 핵심 시설이라 할 수 있는 3층으로 된 사격 통제소와 관제탑이 있었다. 쿠니사격장의 부대 구성원은 미군이 약 15인, 한국군이 약 60여 명으로, 100명이 넘지 않는 대대급 규모였다. 쿠니사격장의 운영은 1998년까지 미 공군이 직접 운영하였으나, 이후부터는 유명한 군수 업체 록히드마틴이 미 공군과 계약하여 사격장의 관리와 운영을 맡고 있었다.

[쿠니사격장 설치에 의한 매향리 주민들의 피해]

쿠니사격장이 설치되면서 매향리 주민들은 비옥한 농지와 물고기가 잘 잡히고 굴과 조개를 채집하는 바다를, 그러니까 먹고살기 위한 밥줄을 잃고 말았다. 1968년 주한 미군이 쿠니사격장 건설을 위해 농섬 일대를 징발하며 매향리 사람들은 굴과 조개를 채집하던 바다에 더는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미군이 폭탄을 투하하며 매향리 주민들은 바다에서 어업은 물론이고, 굴 양식과 해산물 채취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늦은 저녁 사격 중지 신호가 떨어지면 바다로 나갈 수 있었지만, 1969년 정부는 무장 공비가 침투한다는 이유로 매향리가 속한 경인 지역 야간 바다를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쿠니사격장으로 인해 매향리 주민들의 농업 또한 큰 타격을 입었다. 매향리 주민들은 3.3㎡당 500~600원이었던 농경지를 180~200원 헐값에 강제 징발당하였다. 토지를 징발당한 농민은 미 공군에 땅 사용료를 내는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그나마도 매향리 농민들은 전투기가 뜨지 않는 주말에만 농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사격 후 땅에 떨어지는 탄피로 인해 무엇을 심어도 잘 자랐던 옥토는 박토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쿠니사격장은 매향리 주민들의 생계뿐만 아니라, 안전한 삶을 영위할 권리마저 빼앗아 버렸다. 1952년 마을 주민 전상록이 땔감을 구하고 귀가하던 중 마을에 오폭된 폭탄에 머리를 맞아 사망하였다. 1952년 주민 이봉우·이상복 부자가 바다에서 조업 중 오폭으로 손목이 절단되었다. 1956년 어린이 5명이 불발탄을 도구로 해체하다가 폭발이 일어나 4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1명이 부상을 입었다. 1967년 33세였던 만삭의 임산부 이영자가 사격장 인근 해안에서 굴을 따다가 폭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1973년 김이쁜이 불발탄에 중상을 입어 미군 헬기로 긴급 후송되어 수술을 받았다.

매향리 주민들이 겪은 소음 피해 또한 막대하였다. 한국 주둔 미 공군뿐만 아니라, 인근 아태 지역 미군 공군 기지에서 출격한 전투기와 폭격기들이 쿠니사격장에 폭탄을 쏟아내었다. 매향리에서의 사격 훈련은 연간 250일, 1일 평균 11.5시간, 사격 횟수는 1일 600~700회, 격주로 월-금 주야간 훈련, 특별 훈련 기간 중에는 24시간 연속되었다. 하늘을 찢는 전투기 소리와 폭격과 사격 소리가 내는 100dB 이상의 소음이 매향리 주민들에게는 일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소음은 매향리 주민의 일상을 철저히 파괴하였다. 지속적인 소음에 매향리 주민들은 일상적인 대화를 할 때도 소리를 질러야 하였다. 매향리 주민 7.1%가 직업병으로 분류되기에 충분히 심각한 청력 손상을 겪었으며, 1960년대부터 자살하는 사람이 증가하였다. 70대 노인이 장기를 두다 식칼로 목을 찌르고, 어린 중학생이 친구를 칼로 찔러 죽이는 등 이해하기 어려운 강력 사건이 발생하였다. 지속적인 소음이 매향리 주민들을 신체적·정신적 병리 현상에 시달리게 한 것이다.

[매향리주민운동]

이처럼 쿠니사격장이 설치된 이후 매향리는 오폭·불발탄·소음 등에 의한 인명 피해가 끊이지 않았다. 매화 향을 걷어내고 자리를 차지한 탄 향은 곧 죽음의 냄새였다. 그러나 6·25전쟁을 겪고 극단적 반공 국가의 길을 걷던 대한민국에서 매향리 주민들은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반공 이데올로기 속에서 매향리 주민들은 미군 기지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빨갱이나 하는 것’이라 생각하기도 하였다.

매향리 주민들이 쿠니사격장 철폐를 적극적으로 외치기 시작한 것은 1987년 6월 이후, 그러니까 한국에 민주화 바람이 불기 시작한 때였다. 1988년 경기도 부천시 고강동 주민들이 김포공항에서 발생하는 소음 대책을 요구하며 주민 농성을 벌였다. 이 광경을 접한 매향리 어촌계장 전만규는 마을 청년들을 규합하여 매향리 문제를 공론화하기 시작하였다. 매향리 원로들은 미군 부대에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것에 큰 거부감을 느꼈다. 그러나 1988년 6월 14일 전만규를 위시한 매향1리 청년회는 유인물 ‘주민들에게 드리는 글(제1호)’을 배부하며, 주민들에게 쿠니사격장 문제를 해결하자고 호소하였다. ‘우리가 소음 공해로 고통받는 만큼 당연히 피해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호소에 매향리 주민들이 호응하기 시작하였다.

1988년 7월 4일 피해 가구 613세대가 국방부와 경기도, 청와대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이에 미군 부대가 7월 25~26일 매향리 일대 주거 지역에 대한 소음 측정을 실시하였고, 주거 불능 판정을 내렸다. 그러나 미군은 ‘쿠니사격장은 미 공군 전력의 사활이 달린 꼭 필요한 시설이다. 그러나 피해 보상과 기지 이전 문제는 어디까지나 한국 내 문제이며 미군은 손님의 입장’이라며 피해 보상을 거부하였다. 이에 주민들은 1988년 8월 17일에 ‘합동소음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전만규가 위원장을 맡았다. 1988년 12월 12일에는 쿠니사격장에 대한 점거 농성을 하였다. 시위대는 4시간 만에 자진 해산하였지만, 1988년 12월 12일의 점거 농성은 매향리와 쿠니사격장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매향리 주민들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1986년 3월 6일 우정면 일대 주민들이 쿠니사격장 앞에서 시위를 시작하였는데, 전경이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3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3월 13일에는 경찰 당국이 전만규 등 주민 대표 10명을 연행하였다가,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는 격렬한 시위가 발생하자 14일에 석방하였다. 1989년 5월 29일에는 미군이 시위를 주도한 전만규에게 보복 조치로, 사격장 내 전만규의 논과 모판에 모래와 자갈을 부어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분개한 마을 주민들이 사격장에 몰려들어가 22대의 차량과 레이더 장비, 건물 유리창과 식당 시설 등을 깨트리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미군은 기동타격대 20명을 오산기지에서 헬기로 지원받아 배치하고 주민들을 위협하였다. 주민들은 밤 11시에 경찰이 출동하자 자진 해산하였다. 시위 후 경찰은 주민 50여 명을 입건하였으며, 전만규는 당시 야당이었던 통일민주당사에 장기 농성을 위해 들어가다가 체포되었다.

1990년 이후 매향리주민운동은 동력을 잃고 소강된 것으로 보였다. 주민 내부에서 운동의 목적을 두고 의견 대립이 발생하였으며, 정부와 미군이 지역 유지들을 이용하여 매향리 주민들에 대한 회유와 분열을 꾀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매향리 주민들은 집단 소송이라는 합법적 투쟁을 통해 주민 운동의 다각화를 꾀하고 있었다. 1998년 2월 27일 매향리 주민들은 법무부 장관을 피고로 한 소음 공해 등에 관한 정신적 손해 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였다. 소송 대리인은 매향리 문제에 관심이 많던 이석태 변호사가 맡았다. 이석태는 주민들의 피해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증적 입증 자료를 통해 2001년 4월 11일 1심 판결을 승리로 이끌어내었다. 이는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민사특별법에 의해 국가의 손해 배상 책임을 처음으로 인정한 판결이었다.

2000년 5월 8일 훈련 중이던 A-10 공격기가 엔진 고장을 일으켜 500파운드 폭탄 6발을 오폭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인해 주민 6명이 부상을 입고 가옥 700여 채가 파손되었다. 2000년 5월 8일의 사고는 쿠니사격장이 설립된 이래 오폭·불발탄에 시달린 매향리 주민들에게 특별한 경험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오폭 사고는 언론을 타고 국민적 관심을 불러모았다. 1988년 이래 매향리주민운동이 전국에 알려졌고, 노근리학살 사건과 한미주둔군지위협정 개정 문제로 반미 감정이 확산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매향리는 분단과 동족상잔의 전쟁, 외세와 국가 권력이 합작하여 저지른 부당한 폭력에 희생당한 상징이 되었다. 여러 시민 단체·환경 단체·노동 단체들이 현장에서 매향리 주민들과 연대하여 투쟁에 참여하였다. 그 결과 2000년 8월 농섬을 제외한 육상 기총 사격이 중단되었다. 이어 2003년 11월 사격장 관리를 한국 측으로 이관하는 이행서가 체결되었다. 국방부는 매향리와 농섬 일대, 육상과 해상 사격장 2,376만 8,595㎡를 폐쇄하기로 결정하였다. 2004년 3월 12일과 2005년 1월 13일에는 대법원에서 주한 미군이 야기한 소음 피해에 대한 승소 확정 판결이 내려졌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2005년 8월 12일 쿠니사격장이 폐쇄되었으며, 매향리매향리 주민들은 54년 만에 소음과 오폭, 탄 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평화와 생태의 상징, 매향리평화생태공원]

2021년 8월 현재 쿠니사격장이 폐쇄된 지 16년의 세월이 지났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매향리에는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폭탄이 떨어졌던 농섬 앞 갯벌에는 괭이갈매기와 검은머리물떼새가 돌아왔다. 주민들은 사라진 매화 향을 되찾기 위해 10년에 걸쳐 7만 그루의 매화나무를 식재하였다. 이제 매향리 주민들은 생존을 위한 투쟁 대신 그들이 되찾은 평화를 기리고 보존하기 위해 평화소풍이라는 이름의 축제를 벌인다. 쿠니사격장 사격 훈련장 터에는 야구장 ‘화성드림파크’가 들어섰다. 그리고 매향리에 평화를 기념하는 또 하나의 시설이 건립 중이다.

2005년 1월 13일 대법원에서 매향리 주민들이 승소 판결을 받은 뒤, 당시 매향리주민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던 전만규는 ‘배상액 일부로 생태 공원과 평화 박물관을 조성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생태 공원과 평화 박물관을 조성하겠다는 마을 주민들의 꿈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2008년 화성시는 쿠니사격장 부지에 2,018억 원 예산을 들여 2013년까지 평화생태공원을 쿠니사격장 부지에 조성할 것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예산 부족으로 인해 2009년에 완공 시기를 2015년으로 연장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2017년으로 연장하였다. 다행히 2019년부터 ‘매향리평화생태공원’ 조성이 시작되어, 2021년 8월 현재 완공 및 개장을 앞두고 있다. 매향리평화생태공원은 미군 숙소·식당 등이 있던 터에 만들어지며, 습지원·메타세쿼이아길·매화숲·산책로 등을 갖추고 있다. 공원 입구에는 화성시 공예문화관이 건설되어 전통 공예 체험 학습 프로그램과 맥간 공예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 중에 있다. 또한 공원 부지 내에 매향리의 아픈 역사를 보존·전시하는 박물관도 개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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