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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577
한자 朴元度
영어공식명칭 Park Wŏn-do
이칭/별칭 중헌(仲憲),죽창(竹窓),용탄산인(龍灘散人)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송양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26년 9월 24일연표보기 - 박원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48년 - 박원도 생원시 입격
활동 시기/일시 1660년 2월 25일 - 박원도 성균관 제출 유생의 과차에 따라 직부회시의 특전을 입음
활동 시기/일시 1663년 - 박원도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63년 4월 11일 - 박원도 사섬시 직장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64년 6월 21일 - 박원도 의금부도사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64년 12월 21일 - 박원도 공조좌랑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66년 3월 20일 - 박원도 청안혐감(淸安縣監)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72년 12월 22일 - 박원도 병조좌랑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74년 1월 4일 - 박원도 패초에 응하지 않은 것으로 체차, 낙향
활동 시기/일시 1674년 6월 8일 - 박원도 사헌부 지평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75년 1월 15일 - 박원도 충청도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78년 윤3월 4일 - 박원도 황주판관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80년 9월 18일 - 박원도 접위관(接慰官)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80년 10월 15일 - 박원도 풍덕부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83년 6월 24일 - 박원도 부령부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85년 6월 24일 - 박원도 오위장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86년 8월 4일 - 박원도 형조참의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86년 10월 17일 - 박원도 좌부승지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87년 7월 15일 - 박원도 좌부승지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87년 10월 14일 - 박원도 부평부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89년 - 박원도 고향인 수원으로 낙향, 은거
몰년 시기/일시 1690년 9월 9일연표보기 - 박원도 사망
묘소|단소 반남 박씨 박원도묘 - 경기도 화성시 오산동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남성
본관 반남(潘南)
대표 관직 사헌부 지평|사간원 정언|사헌부 장령|청안현감|충청도사|황주판관|부령부사|형조참의|우부승지|우승지|좌부승지

[정의]

경기도 화성시 오산동에 묘소가 있는 조선 후기 문신.

[가계]

본관은 반남(潘南). 고려 말 친원 세력에 반대하였던 증영의정(贈領議政) 문정공(文正公) 박상충(朴尙衷)의 10대 손이다. 증조부는 생원 박려(朴瓈), 조부는 나주목사를 지낸 박대하(朴大夏)이다. 아버지는 성균생원 박욱(朴𢒰))이고, 어머니는 전의 이씨(全義李氏)로 이구령(李龜齡)의 현손인 이광림(李光林)의 딸이다. 부인 여흥 민씨(驪興 閔氏)와의 사이에서 박휘등(朴彙登), 박세등(朴世登) 등 2남 3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박원도(朴元度)[1626~1690]는 1626년(인조 4) 9월 24일에 태어났다. 1648년(인조 26) 23세에 생원시에서 2등 20위로 입격하고, 1663년(현종 4) 38세에 식년문과에 갑과 3위로 급제하였다. 같은 해 4월, 문과급제 3위에게 으레 제수하는 사섬시(司贍寺) 직장(直長)으로 기용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듬해 6월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다가, 같은 해 8월 입직 교대에 자주 지각한다는 이유로 태거(汰去)되었다. 오래지 않아 성균관 전적으로 재기용되었고, 중학교수와 사헌부 감찰을 거쳐 12월 공조좌랑(工曹佐郎)에 제수되었다. 1666년 3월 청안현감(淸安縣監)에 임명되었다. 청안현감으로 있으면서 병자호란 이후 퇴락하였던 관아를 수리하여 70여 칸의 공해(公廨)을 지었는데, 백성들이 수고롭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또 를 차지하기 위하여 송사하는 형제를 두고, 그 를 풀어주고 의리로 그들을 꾸짖어 참회시키는 일화가 있었다. 박원도는 농사에도 힘을 기울였는데, 현감의 임기가 끝날 무렵 큰 기근이 찾아오자, 조정에서는 그를 잉임시키고 진휼을 관장하게 하였다.

1672년(현종 13) 12월 병조좌랑, 이듬해 9월 병조정랑을 지내었고, 곧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 박원도는 이때의 패초(牌招)에 응하지 않고 체차되어 수원으로 낙향하였다. 곧 사간원 정언으로 재차 발탁되었지만,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한동안 수원에 머물렀다. 1674년 3월 사헌부 지평을 맡은 것을 계기로, 주로 양사에서 언관으로 활동하였으나, 1675년 송시열을 비호하였다는 죄를 입고 충청도사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에는 황주판관으로 임명되었다. 황주판관으로 재임하면서 청사(淸使)의 왕래시 아전들이 부리는 농간을 시정하게 하였으며, 황주의 병기(兵器)를 수선하여 포상을 받기도 하였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사헌부의 지평·장령(掌令)을 지냈다. 풍덕부사(豐德府使)·울산부사(蔚山府使)를 역임하고 1683년 6월 부령부사(富寧府使)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 조선은 백두산의 정계를 시도하는 청(淸)의 의도에 대응하여 부령부의 무산진(茂山鎭)을 도호부로 승격시키려는 논의 중이었으므로 백성들의 부담이 가중된 상황이었다. 이때 부령부사로 부임한 박원도는 마포(麻布) 3천 필을 마련하고 고마청(雇馬廳)을 설치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완화시켰다.

1685년(숙종 11) 조정으로 돌아와, 오위장(五衛將)·조사위장(曹司衛將)·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를 지내었고, 1686년 형조참의에 제수되었다. 같은 해 10월, 우부승지로 발탁된 이후 좌부승지·우승지 등을 역임하였으며, 1687년 10월 부평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2월 호조에서 이덕성(李德成)·이동욱(李東郁)과 함께 관찰사로 천거받았으나,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낙향하고 스스로 용탄산인(龍灘散人)이라고 불렀다. 수원에서 학문에 정진하였으나, 1690년 65세로 사망하였다.

[묘소]

1690년(숙종 16) 11월 21일 수원부 어탄면에 장사를 지내었는데, 현재 경기도 화성시 오산동이다. '반남 박씨 박원도 묘'는 2007년 2월 28일 화성시의 향토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었다가, 2019년 10월 향토문화재 제6호로 변경되었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향토문화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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