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김교창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1425
한자 金敎昌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박철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9년 6월 8일연표보기 - 김교창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26일 - 김교창 송산면 독립만세운동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59년 4월 9일연표보기 - 김교창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김교창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일대의 3·1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교창(金敎昌)[1889~1959]의 본적은 경기도 강화군 선원면(仙源面) 창리(倉里) 648번지이다. 3·1운동 당시 이발업에 종사했고, 주소지는 송산면 사강리 183번지였다. 1919년 3월 26일 홍면옥(洪冕玉)이 주동한 송산면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28일 수원경찰서에서 출장 나온 일본인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野口廣三]가 시위를 주도하던 홍면옥을 체포하다 어깨에 총을 쏘는 일이 발생하였다. 홍면옥이 총에 맞자 만세시위 군중들이 분노하여 노구치 고조를 둘러싸고 위협하였다. 그러자 노구치 고조는 자전거를 타고 사강경찰관주재소 방향으로 도망쳤다. 이때 김교창은 면사무소에 있었는데, 홍면옥의 동생 홍준옥(洪㻐玉)이 들어와 형이 총에 맞았으니 함께 발포한 일제 경찰을 죽이자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김교창홍준옥·왕광연(王光演)·문상익(文相翊) 등과 함께 도주하는 노구치 고조를 추격하여 처단하고 독립만세운동을 벌이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0년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소요·살인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형[미결구류일수 200일 산입]이 확정되었다. 1922년 11월 22일 가출옥으로 석방되었고, 1924년 1월 감형[징역 5년 4월 20일]되었다. 1927년 2월 사면(赦免)에 이어 1938년에는 복권(復權)되었다.

[상훈과 추모]

송산면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공적이 확인되어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