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덕국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371
한자 普德國
영어공식명칭 Bodeokguk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시대 고대/남북국시대
집필자 권익산

[정의]

674년 고구려 유민들이 지금의 익산 지역인 금마저에 세운 나라.

[개설]

전라북도 익산 지역은 고조선의 왕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와 ‘한왕(韓王)’을 칭하고 도읍하였고, 마한의 중심 세력인 목지국(目支國)이 있었다고 비정되는 곳이다, 또한 백제 시대에는 무왕이 백제 왕궁을 조성하였기도 하였다. 백제 멸망 이후로는 고구려 유민이 고구려 왕족인 안승(安勝)[보장왕의 서자 또는 외손으로 추정]을 왕으로 추대하여 보덕국(報德國)을 세우고 15년간[670~684] 존속하였다.

[보덕국의 성립과 변천]

668년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후 고구려 지역에서는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669년 검모잠(劍牟岑)이 주도한 부흥 운동 세력은 신라에 피하여 있던 안승과 함께 한성(漢城)[지금의 황해도 재령] 지역에서 고구려를 재건하고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당의 공격에 심해지면서 고구려 부흥 운동의 진로를 둘러싸고 내부 분열이 생기자 안승은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에 신라는 안승과 고구려 유민을 지금의 익산 지역인 금마저(金馬渚)에 안치하였다. 보덕국이 위치한 금마저는 왕궁리 유적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백제 후기 왕도로서의 위상을 가진 곳이었다. 신라는 이러한 익산 지역에 고구려 유민을 이주시킴으로써 백제부흥운동 세력을 견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신라는 보덕국의 고구려 유민들을 지원함으로써 나당전쟁에서 당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 보덕국을 이용하려고 하였다. 이 점은 신라가 674년 안승보덕왕에 책봉하고 680년에는 안승을 문무왕의 조카와 결혼하도록 하여 신라 왕실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조치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보덕국은 신라의 영향 아래에서도 고구려를 재건하려는 노력을 벌였다. 고구려 제도를 계승하여 통치체제를 정비하였으며, 일본에 사신을 보내 외교 활동을 펼치는 등 국가로서의 위상을 갖추기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보덕국의 멸망]

676년 나당전쟁이 끝나자 신라는 보덕국을 해체하려 하였다. 신문왕(神文王)은 683년 안승을 왕경[경주]으로 불러들여 소판(蘇判)[17관등 중 세 번째 관등 잡찬]의 관등을 주고 김씨 성을 주었다. 이에 금마저에 남아 있는 고구려 유민이 대문(大紋)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신라의 보덕국 해체에 저항하려 하자 신라는 대문을 처형하였다. 대문이 처형당하자 고구려 유민은 실복(悉伏)의 지휘 아래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 직후에는 신라 관리를 처형하고 익산 지역을 장악하기도 하였으나 곧 진압됨으로써 보덕국은 멸망하였다. 이후 보덕국의 유민들은 여러 지역에 분산 배치되어 신라 사회에 편입되어 갔다.

[의의와 평가]

보덕국이 존재한 시기는 15년에 불과하였지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나당전쟁의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들은 신라와 함께 당의 침략에 맞섰으며, 신라는 보덕국의 고구려 유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또한 9서당 가운데 벽금서당과 적금서당에 보덕성민을 편제하였다. 이를 통하여 고구려 유민을 포용한 삼국 통일의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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