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381
한자 日帝强占期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혜영

[정의]

1910년 8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일제의 식민 통치를 받던 시기의 전라북도 익산 지역 역사.

[개설]

일제는 한국을 강제로 병합한 이후 민족 말살 정책과 식민지 수탈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가혹한 통치와 수탈에 저항하여 익산 지역에서는 3.1운동을 비롯하여 다양한 저항운동을 전개하였다.

[신도시 이리의 개발]

총독부는 1914년 ‘부제’와 ‘군제’를 선포하면서 전주와 같은 전통 도시는 축소하여 전주군 전주면으로 하는 대신 군산은 부로 승격하였고 군산과 이리를 중심으로 전라북도의 중심을 옮기려고 하였다. 경성과 목포를 연결하는 길[호남선]에 군산까지 가는 것은 교통이 불편하였다. 우선 군산의 위성도시를 건설하고 나중에 전주를 개발하여 연결하려고 한 것이 바로 이리였다. 오랜 기간 전주평야를 배경으로 정치·경제·행정의 중심지였던 전주의 세력을 누르고 새로운 도시 군산의 세력을 지지하기 위한 위성도시를 만들려는 것이었다.

1914년 3월 1일 부군(府郡) 폐합 실시에 따라 익산·용안·여산·함열 4개군을 1군으로 합병하고 전주군 남일면을 포함시켜서 익산군으로 통합하였다. 그리고 기존의 중심지 금마가 아닌 대한제국 말에 10호 정도에 불과하였던 호남선 이리역 주변인 솜리 지역을 신시가지로 정비하였다. 이리역 주변에는 면사무소, 경찰서, 학교, 발전소, 내무국 토목출장소, 동양척식주식회사 이리지점 등을 설치하였다. 1914년 익산군 출범 당시 조선인 호수 1만 8651호, 남자 4만 7285명·여자 4만 4462명·합계 9만 7747명이었고 일본인 호수 784호, 남 1,452명·여자 193명·합계 2,645명이었다. 시가지 개발이 어느 정도 진행된 1915년 당시 이리에는 일본인이 1,893명, 조선인 348명이 살았다. 이로써 일본인들이 신시가지에 집중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인의 이주]

1906년 복강현(福岡県) 출신 전중부차랑(田中富次郞)이 상업 및 여관 영업을 목적으로 군산에서 이주해 온 것이 일본인 거주의 시작이다. 이어서 1907년 기부(岐阜) 지방의 대교은행(大橋銀行)에서 농장을 개설하기 위하여 지길원신(枝吉元信)을 파견하였다. 1908년에는 장기현(長崎県) 선미조(扇米助)가 상업을 목적으로 군산에서 이주하였다. 이렇게 해서 3호(戶)의 일본인이 익산에 이주하였다. 이후 새로 개통된 전주군산가도가 이리 남쪽으로 통과하게 되었고 전주와 군산 양 지역 사이를 왕래할 때 전주군산가도를 이용하게 되면서 점차 일본인이 이주하여 오게 되었다. 1910년 호남선 철도를 부설하기 위해 선로 측량이 시작되고 군산 지선의 분기점으로서 이리에 정거장을 설치하기로 결정된 후에는 인기가 더욱 높아졌다. 철로가 관통하게 되면 번영할 것을 예상하고 내주하는 자가 증가하였다. 1910년 말 5호, 16명이던 이주자가 1911년 철도공사 개시에 따라 증가하여 66호, 224명이 되었다. 철도가 개통된 1912년에는 이주자가 270호, 946명에 이르렀다.

[익산 지역의 교육 기관]

익산 지역에는 조선인 교육을 위해 이리, 금마, 용안, 함라, 여산, 웅포, 춘포, 오산, 팔봉, 삼기, 왕궁, 황등 등에 보통학교가 있었으며 그 외에 중등교육기관으로는 1922년 4월 개교한 이리농림학교와 1924년 4월 개교한 이리고등여학교가 있었다. 일본인 교육은 1909년 대장촌 소학교의 개교를 시작으로 일본인 이주가 증가함에 따라 각지에 설립되어 이리, 오산리, 대장촌, 황등, 함열, 여산에 소학교가 개교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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