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4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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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礪山斥和碑 |
영어공식명칭 | Anti-foreign Stele in Yeosa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동헌길 13[여산리 445-2]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양은용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820년 - 이하응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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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 시기/일시 | 1871년 - 여산척화비 건립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898년 - 이하응 사망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15년 - 여산척화비 발굴 |
이전 시기/일시 | 1915년 - 여산척화비 이전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2년 5월 30일 - 여산척화비 익산시 향토유적 제7호 지정 |
현 소재지 | 여산동헌 -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동헌길 13[여산리 445-2] |
성격 | 석비 |
양식 | 단면비 |
관련 인물 | 이하응 |
재질 | 화강암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114㎝[높이]|46㎝[너비]|9㎝[두께] |
소유자 | 익산시 |
관리자 | 여산면 |
문화재 지정 번호 | 익산시 향토유적 제7호 |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 여산동헌에 있는 척화비.
[개설]
여산척화비(礪山斥和碑)는 1866년 병인양요 이후 서양 제국이 개항을 요구하는 가운데 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이 서양 제국에 대한 항전 의식을 고양하기 위하여 전국 여러 곳에 세운 석비 중 하나이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일본공사관의 요구로 철거되었다가 1915년 여산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발굴되어 여산동헌으로 옮겨 세워졌다. 여산척화비의 뒤에는 여산군에서 선정을 베푼 역대 관리들의 선정비 8기가 서 있다. 여산척화비는 2002년 5월 30일 익산시 향토유적 제7호로 지정되었다.
[건립 경위]
흥선대원군이 국정을 펴는 동안 서양 제국주의 세력이 밀려 들어와 개항을 요구하며 사회를 혼란시키자 항전 의식을 고취하기 위하여 전국에 척화비를 세워 계몽하고자 하였다. 여산척화비도 당시 세워진 비석이다.
[위치]
여산척화비는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동헌길 13[여산리 445-2] 여산동헌 뜰에 있다.
[형태]
여산척화비는 화강암의 단면 석비로, 규모는 높이 114㎝, 너비 46㎝, 두께 9㎝로 정면에 비제를 겸한 비문을 새겼다.
[금석문]
여산척화비는 앞면에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이라고 새겨져 있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하는 것이니,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현황]
여산척화비는 여산동헌 뜰에 철제 울타리로 보호 시설을 마련하였다. 여산척화비 뒤로 역대 관리들의 선정비 8기가 늘어서 있으며 일괄 관리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척화비는 전국 각지에 건립되었으나 여산 지역에 남아 있는 척화비는 여산척화비를 비롯해 10여 기밖에 없으므로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