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5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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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陽谷集 |
영어공식명칭 | Yanggokjip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도천마을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봉곤 |
편찬 시기/일시 | 1571년 - 『양곡집』 편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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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 시기/일시 | 1571년 - 『양곡집』 간행 |
편찬 시기/일시 | 1839년 - 『양곡집』 속집 편찬 |
간행 시기/일시 | 1935년 - 『양곡집』 중간 |
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반포동 산60-1] |
소장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신림동 산56-1] |
소장처 | 국사편찬위원회 - 경기도 과천시 교육원로 86[중앙동 2-6] |
간행처 | 화산재 - 전라북도 익산시 |
성격 | 문집 |
저자 | 소세양 |
편자 | 소학규 |
간행자 | 소상영 |
권책 | 20권 10책 |
행자 | 10행 20자 |
규격 | 29.8×20㎝ |
어미 | 상삼엽 화문어미(上三葉花紋魚尾) |
권수제 | 양곡집 |
판심제 | 양곡집 |
[정의]
전라북도 익산 출신인 조선 전기 문장가 소세양의 시문집.
[개설]
『양곡집(陽谷集)』은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도천마을 출신으로, 조선 전기에 활동한 문신이자 문장가였던 소세양(蘇世讓)[1486~1562]의 시문집이다. 소세양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와 벼슬을 그만두고 은퇴한 이후 지은 시가 많다. 비문과 제문, 기문과 서문, 발문, 사직을 청한 글도 여러 편 전해지고 있다.1571년에 14권 7책의 목판본으로 초간된 이후 1801년 소수중(蘇洙中), 1835년 소시운(蘇始運) 등이 보완하였으며, 1935년 종후손 소학규(蘇學奎) 등이 속집 4권 2책을 합하여 20권 10책의 고활자본(古活字本)으로 중간하였다. 중간된 『양곡집』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과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그리고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다.
[저자]
소세양은 1486년(성종17) 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 소자파(蘇自坡)와 개성왕씨(開城王氏) 사이에서 칠형제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소세양은 자는 언겸(彦謙), 호는 양곡(陽谷), 퇴재(退齋), 퇴휴당(退休堂)이며, 시호는 문정(文靖),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율시(律詩)에 뛰어났으며, 원나라 초기 조맹부의 서체인 송설체(松雪體)를 잘 썼다. 1504년(연산군 10)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55년 율시로 선발할 때도 1등이었으나 투서 사건과 관련하여 전시(殿試)에 나가지 못하였다. 소세양은 1509년(중종 4) 별시에서 을과 2위[전체 3위]로 급제하게 되어 비로소 벼슬길에 나아가게 되었다.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를 거쳐 홍문관에 선발되되어 정자(正字)에 이어 주서(注書), 부수찬을 지냈다. 1511년에는 이행(李荇)ㆍ김안국(金安國)ㆍ성세창(成世昌)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조선 시대에, 유능한 젊은 문신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던 일]를 하였다. 이후 이행은 소세양의 문장이 뛰어나다고 높이 평가하고, 문필은 반드시 소세양이 맡아야 한다고 여러 차례 천거하였다. 1512년 홍문관 수찬에 재직할 당시 단종의 모후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복위를 주장하는 상소를 하여 문종의 능인 현릉(顯陵)에 이장하게 하였다.
이후 소세양은 1514년 신광한(申光漢), 정사룡(鄭士龍) 등 일곱 명과 함께 호당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조선 시대에, 유능한 젊은 문신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던 일]를 하였다. 당시 이행(李荇)은 소세양의 형인 소세량(蘇世良)이 문장이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하고 문필은 반드시 소세양이 맡아야 한다고 여러 차례 천거하였다. 이후 소세양은 이조정랑, 사헌부장령, 홍문관교리를 거쳐 홍문관직제학이 되었다. 1521년(중종 16)에는 성균관사성을 지냈는데, 1521년 영접사(迎接使)인 이행의 종사관으로 명나라 사신 화찰(華察) 일행을 맞았다. 화찰은 소세양의 문장과 재주에 감동하여 크게 칭찬하였고, 화찰은 귀국 후에도 조선 사신을 만날 때마다 소세양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1521년에는 홍문관직제학에 제수되고, 원접사 종사관으로 차출되었다. 1522년 좌부승지, 1523년 황해도 관찰사, 1527년 전주부윤, 1529년 이조참의를 거쳐 한성우윤, 전라도관찰사 등에 제수되었다. 1533년에는 지중추부사로서 명나라에 진하사로 다녀왔다. 이때 역시 예부상서 하언(夏言)이 소세양을 만나서 작품을 청하였고, 많은 책을 기증하였다. 귀국하자 중종 역시 칭찬하고 형조판서를 제수하였다. 이후 병조판서, 호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에 이르렀다. 1545년(인종 1)에는 윤임(尹任) 일파의 탄핵으로 사직하였으나, 명종 때에 다시 기용되어 좌찬성에 제수되었다. 하지만 뜻이 맞지 않아 사직하고 은퇴하여 고향인 익산으로 돌아갔다. 이후로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퇴휴당(退休堂)과 태허정(太虛亭)을 짓고 형제 친척들과 유유자적하게 지내다가 1562년(명종 17) 일흔일곱 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편찬/간행 경위]
『양곡집』은 소세양이 사망한 지 10년 만인 1571년에 황해도 곡산(谷山)에 부임한 아들 소수(蘇遂)가 박충원(朴忠元)의 서문을 받아 14권 7책으로 간행하였다. 그러나 이들 책은 전란 등으로 대부분 없어졌다. 이에 1839년(헌종 1)에 종후손 소시운(蘇始運)이 소수중(蘇洙中)이 보관하고 있던 책과 유문(遺文), 연보(年譜) 등을 덧붙여 16권 8책으로 편집하고 홍석주(洪奭周)의 서문을 받아서 보관하였다. 이후 일제 강점기 때인 1935년에 종후손 소학규(蘇學奎) 등이 『황화집(皇華集)』·『동차집(東槎集)』에서 소세양의 작품을 뽑아 속집(續集) 4권 2책을 만들고 원집(原集) 16권 8책을 합한 20권 10책을 익산의 화산재(華山齋)에서 중간(重刊)하였다.
[형태/서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활자본은 책의 사주(四周)에 두 개의 검은 선이 돌려진 사주 쌍변(四周雙邊)이다. 반곽 21.0×15.5㎝, 10행 20자이다. 주는 쌍행(雙行)이며, 어미는 상삼엽 화문어미(上三葉花紋魚尾), 책의 크기는 29.0×19.4㎝이다.
[구성/내용]
권수에는 1570년에 지은 박충원의 서(序)와 홍섬(洪暹)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실려 있다. 권1부터 권10까지는 모두 시(詩)인데 도합 1,482편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이다. 시는 대부분이 1545년 이후에 지어진 작품이다. 1545년 이전에 지어진 작품으로는 권1과 권3, 권4의 작품을 들 수 있다. 특히 권3은 1533년 12월부터 진하사로 중국에 갔을 때 지은 시, 권4에서는 1534년 3월 중국에서 귀환할 때 지은 시 위주로 편집되어 있다.
권11에서 권14까지는 문(文)이다. 그중에서 권11은 비갈(碑碣), 권12는 비갈(碑碣)과 표(表), 권13은 비갈(碑碣)과 제문 두 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14는 기(記), 서(序), 잡저(雜著)이다. 기문은 태인현감 신잠의 선정에 관한 글, 「익산동헌중신기(益山東軒重新記)」, 전라도 강진 병영의 중창기 등 8편이 수록되어 있고, 서문은 소세양의 친구인 정운경의 문집 서문인 「호음집서(湖陰集序)」등 네 편이 있다. 잡저는 동갑들의 계 모임에 관한 글이나 1539년 원접사가 되어 명나라 사신과 동행하였던 기록, 『천자문』에 대한 발문 등 열두 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권15과 권16은 소시운이 원집에서 빠진 유문(遺文)과 연보를 1835년(헌종 1)에 덧붙인 것이다. 소시운은 16권 8책으로 편집하고 홍석주(洪奭周)에게 서문을 받아 보관하였다.
속집의 권1에서 권4까지가 모두 시이다. 책머리에는 1934년에 지은 소학규의 서(序)가 실려 있다. 시는 『황화집』·『동차집』 중에서 소세양이 지은 시부(詩賦)를 채록한 것과 원집에서 빠진 시를 보충한 것이다. 모두 중국에 사신 갔을 때의 시이다. 책 끝머리에는 소주영(蘇周永)과 소상영(蘇祥永)의 발문이 실려 있다.
[의의와 평가]
『양곡집』은 익산을 대표하는 대문장가 소세양의 문집으로서 당시 조선과 중국의 문화와 역사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