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13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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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完用-墓 |
영어공식명칭 | Lee-Wanyong's Grave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낭산면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윤미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78년 - 「이완용의 묘」 미륵산 줄기의 이완용의 묘를 증손자 이석형이 파묘 후 유골을 화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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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1979년 8월 21일 - 「이완용의 묘」 『중앙일보』에 게재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2013년 7월 1일 - 「이완용의 묘」 원광대학교 대안문화연구소가 용동 용성마을 모정에서 이재갑과 이종록에게 채록 |
관련 지명 | 낭산리 - 전라북도 익산시 낭산면 낭산리 |
채록지 | 용성리 - 전라북도 익산시 용동면 용성리 |
성격 | 설화 |
주요 등장 인물 | 이완용 |
모티프 유형 | 명당에 자리 잡은 이완용의 묘 |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 낭산면 낭산리 미륵산 줄기에 묻혀 있던 이완용의 묘 이야기.
[개설]
「이완용의 묘」는 전라북도 익산시 낭산면 낭산리 미륵산(彌勒山)[430m] 줄기에서 이완용(李完用)[1858~1926]의 묘가 발견된 이야기이다. 이완용의 묘는 서울 잠실에 사는 이완용의 증손자 이석형이 확인한 뒤, 익산시 낭산면 낭산리에 사는 유정식 등 10여 명의 인부가 폐묘한 후 화장하였다고 한다.
[채록/수집 상황]
「이완용의 묘」는 원광대학교 대안문화연구소가 2013년 7월 1일 익산시 용동면 용성리에서 이재갑[1942년생]과 이종록[1940년생]에게서 채록하였다. 이완용의 묘에 대한 기사는 『중앙일보』 1979년 8월 21일자의 신문 기사를 통하여 짧게 보도되었다.
[내용]
원광대학교 대안문화연구소의 구술 기록과 『중앙일보』 1979년 8월 21일자의 신문 기사를 보면 전라북도 익산시 낭산면 미륵산 줄기에서 이완용의 묘가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중앙일보』의 기사에 따르면, 이완용은 보복이 두려워서 전국에 헛묘 여섯 개를 만들어 사람들의 이목을 분산시켰다고 한다. 그중 전라북도 익산시 낭산면 미륵산 줄기에서 발견된 묘가 진짜 묘임을 이완용의 증손자인 이석형이 확인하여 줌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발견 당시 이완용의 관 뚜껑에는 금박의 붉은 페인트로 ‘조선총독부 중추원부의장 정이위대훈위후작 우봉 이공지구(朝鮮總督府中樞院副議長正二位大勳位侯爵牛峯李公之柩)’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이완용의 유해에서는 금니 다섯 개가 나왔다고 기록되었다. 지속적으로 훼묘 사건이 발생한 데다 수풀이 너무 무성하게 자라 관리가 불가능하여 1978년 이완용의 증손자 이석형이 파묘를 하고 유골을 화장하기로 결정하였다. 익산시 낭산면 낭산리에 사는 유정식과 10여 명의 인부들이 이완용의 묘를 폐묘한 뒤 유골은 화장하였다. 이완용의 묘에서 나온 관 뚜껑은 5만 원에 팔렸다. 이후 이완용의 관 뚜껑은 원광대학교 박물관에서 사들여 보관하다 국사학자 이병도가 사들여 불태워 버렸다고 전한다.
[모티프 분석]
「이완용의 묘」에 관한 이야기는 이완용이 사후 부관참시(剖棺斬屍)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음을 증거한다. 전국에 여섯 개의 위장 묘를 만들어 놓은 것이나, 실제 묘가 발견된 후 주민들이 비석을 훼손하고 봉분에 총을 쏘는 행위를 통하여서도 증명된다. 이와 더불어 이완용이 묻힌 낭산면 미륵산 줄기는 선녀들이 목욕을 하는 형상의 8대 명당자리였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