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23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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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天主敎 |
영어음역 | Cheonjugyo |
영어의미역 | Catholic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성윤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일대에 보급된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그리스도 교파의 하나.
[개설]
개신교·동방 정교회와 함께 그리스도교 3대 교파의 하나인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17세기였다. 천주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서양의 학문, 곧 서학으로 남인(南人) 학자들을 중심으로 지식의 차원에서 탐구하다 종교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제주 지역에 천주교가 전해진 것은 1899년, 경성교구의 뮈텔 주교가 페네(C. Peynet) 신부와 김원영(金元永) 신부를 파견하면서부터였다.
[전파 과정]
처음 페네 신부가 재임하던 일 년 동안 제주 지역의 천주교 신자는 예비 신자 30명을 포함해 겨우 50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일 년 뒤 페네 신부 대신 라루크(M. Lacrouts)[구마슬(具瑪瑟)] 신부가 부임하면서 선교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김원영 신부도 정의군 한논(현 서귀포시 호근동)으로 분리해 나가 적극적인 활동을 펴, 1901년 5월에는 신자수 137명과 예비 신자 620명을 얻게 되었다. 당시 입교한 신자들은 주로 화전민층과 일부의 향리층·유배인들이 중심이었는데, 천주교 신앙을 진리로 받아들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관리들의 수탈을 피해서 보호를 받고 싶었던 사람들도 많았다.
천주교가 짧은 기간에 성장하면서 부작용도 발생하였다. 우선 선교사들이 치외 법권을 누리는 것을 보고 입교한 교민들이 교회 세력에 의지해 권력을 휘두르려 했고, 봉세관이 천주교민을 마름〔舍音〕으로 기용하면서 폐단이 커졌다.
토속 신앙과의 충돌도 심각했다. 신부들로부터 교육을 받은 신자들은 무속신을 모시는 당을 부수고 유교 제사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극단적 토착 신앙 배격으로 도민들의 반천주교 정서가 확산되었다.
천주교도들과 지역 주민들 간의 갈등은 급기야 대규모 충돌로 발전하여 1901년 300~350명의 천주교인이 살해당했다. 이 사건은 제주도 역사상 중요한 사건의 하나로, 이재수의 난, 또는 신축교안(辛丑敎案)으로 불린다. 1903년 프랑스 공사와 조선 정부의 교섭이 이루어져 황사평(黃蛇坪)을 묘지로 제공받아 사망한 천주교 신자들의 시신을 매장하였다.
⑴ 일제강점기
천주교는 1909년부터 신성(晨星)여학교를 세우는 등 지속적인 포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천주교인은 주변의 따가운 눈총 속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1911년 제주도가 대구교구 관할로 이전되고, 1916년 라루크 신부가 전주본당으로 옮겨 가자 신성여학교도 자진 휴교를 했다. 그 뒤 10여 년 동안 제주 지역은 목포본당 관할 공소로 격하되어, 목포교회 주임신부가 일 년에 한두 차례 건너와 미사를 집전하는 상태로 있었다.
1924년 이필경(李必景) 신부가 부임하였고, 1933년부터는 전남 지역 선교를 맡게 된 아일랜드의 성 콜롬반 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이 부임하여 사목을 시작하였다. 그 뒤 1937년 광주지목구의 설정과 함께 대구교구에서 광주로 편입되어 선교에 활기를 띠게 되었는데, 당시 신자는 제주본당에 342명, 홍로본당에 187명으로 529명이었다.
⑵ 해방 이후
천주교 신자들은 해방이 되자마자 일본군 야전 병원과 막사로 징발되었던 성당과 부속 건물들을 되찾고, 제주본당과 서귀포본당을 부활시켰다. 이어서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내부 시설을 갖추고 1946년 ‘신성여자중학원’을 개교하였다. 이 학교는 제주 지역의 여성 중등 교육은 물론 천주교 선교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제주 지역으로 피난을 왔다. 이들의 힘을 얻어 선교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또 가톨릭 구제회(N.C.W.C.) 등의 구호 기관을 통해 구호물자가 대량 보급되어 구호 사업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신자는 1950년에 814명으로, 1951년에는 다시 1,469명으로 급증하였다. 1952년 한경면 신창리에 성당을 건립하고, 1954년 부임한 맥그린치(Pactrick J. McGlinchey) 신부가 한림에 자리를 잡고 본당을 설치하였다.
1960년대에 한림 지역에서 농촌 개발 사업을 전개한 맥클린치를 비롯한 외국인 신부들과 천주교인들의 활동은 천주교에 대한 제주 지역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어 나가는 역할을 했다. 이시돌 목장이 제주 지역 축산업을 이끌고 나가면서 천주교는 제주 개발의 중심축이 되었다. 1970년대는 가톨릭 농민회가 조직되었다.
1956년 제주 교회의 신자수는 모두 3,261명이었는데, 1958년에는 7,039명을 기록했고, 1960년에는 9.144명이 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성당이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1968년 제주시의 발전과 인구 증가를 반영하여 동문본당이, 1971년 광양본당이 분리되었다. 또 1970년에는 신성여자중학교가 제주시 도남동으로 옮겨 갔다.
1971년 6월 21일 제주 천주교는 광주교구에서 분리되어 제주지목구가 되면서, 제주도 선교에 공인 큰 광주교구장 헨리 대주교가 초대 교구장에 임명되었다. 1977년 다시 주교구로 승격되었는데, 박정일(朴正一) 주교가 2대 교구장으로 부임하였다. 이어 1984년 1월 26일 김창렬 신부가 3대 교구장으로 취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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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주 시내 천주교 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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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주도 천주교 신자의 변화
〈표 2〉에서 보듯이 제주도의 천주교 신자는 1963년에 1만 명 수준으로 제주도 인구의 3.4% 정도에 그쳤으나, 1980년대부터 빠르게 증가하기 시작하여 1989년에 27,626명으로 5.4%로 비중이 높아졌고, 2000년에는 거의 두 배 가까운 50,761명을 기록하였다.
불과 20여 년 사이에 빠른 속도로 증가하여 제주도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늘어났다. 이제는 제주도민의 10% 가량이 천주교 신자인 셈이다.
천주교가 제주 사회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가진 종교 단체로 성장한 데에는, 1970년대 천주교의 적극적 사회 참여가 대중들의 천주교 인식을 긍정적으로 바꾸어 놓은 점과 함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천주교가 보여 준 조상 제사에 대한 유연한 태도와 장례를 중시하는 태도를 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