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23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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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靑銅器時代 |
영어공식명칭 | Bronze Age |
영어음역 | cheongdonggi sidae |
영어의미역 | Bronze Ag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선사/청동기 |
집필자 | 강창화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지역에서 신석기 시대를 이어 나타나는 청동기를 도구로 만들어 사용한 시대.
[개설]
기원전 1,000년경 중국 동북 지방에서 청동기로 도구와 무기를 만들어 쓰며 쌀농사를 짓고 민무늬 토기를 사용하던 주민이 한반도로 들어와 선주민과 동화되면서 한국 본토도 청동기 시대 문화를 열게 되었다. 청동기 시대의 시작 연대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견해를 달리한다. 대체적으로 기원전 10세기경 북방 민족들의 이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시대에는 청동 제품·마제 석기·다양한 종류의 민무늬 토기가 사용되었으며, 지석묘·석곽묘·옹관묘 등 새로운 양식의 무덤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농경과 목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생산력이 증가하고, 이에 따라 사회 내부에 신분적 차이가 생긴 점이다.
제주도에서는 청동기 시대에 속하는 전형적인 청동 제품이 발견된 바 없다. 다만, 한국 본토 전기 민무늬 토기를 대표하는 공렬 토기 문화가 제주에 형성되었다. 따라서 제주도의 청동기 문화는 이 공렬 토기 문화를 중심으로 이해할 수 있다.
[농경민의 유입과 마을의 형성]
이 시기에 속하는 유적은 전기의 흔암리식 공렬 토기, 중기의 송국리형 토기가 출토되는 유적이다. 제주도에서 공렬 토기 유적 중 비교적 일정한 규모의 집단이 일정 기간 지속적으로 거주한 것을 보여 주는 고고학적 증거는 상모리 유적이 있다. 나머지 유적은 유물의 출토량과 그 공간적 범위로 보아 소규모 유적이다.
상모리 패총과 야외 주거지 발굴에서 일년 내내 농경과 어로 수렵을 겸할 수 있는 혼합 생계 방식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따라서 상모리 유적은 제주도에 일정한 집단의 인구가 본격적으로 정주하여 마을을 구성한 증거로 볼 수 있다.
[토기 문화의 형성과 발전]
청동기 시대의 전기 토기로 알려진 공렬 토기는 제주도의 경우 상모리식 토기로 명명된다. 상모리식 공렬 토기는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구연부에 공렬 무늬를 눌러 장식하거나, 입술면에 톱날 같은 무늬를 만든 것으로 함경도 지방에서 남한 지방으로 퍼져 나간 유형이다. 둘째, 구연부를 이중으로 하고 그 부위에 짧은 빗금 무늬를 연속으로 그어 장식한 것이다. 이는 평안남도와 황해도 지방에서 성행하여 그 일부가 남한 지방에 파급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셋째, 앞의 두 유형의 토기 속성이 복합되어 나타난 것으로 이중 구연과 연속 빗금 무늬 장식에 공렬 또는 골아가리 장식이 덧붙여진 유형이다.
이 셋째 유형은 여주 흔암리와 청주 내곡동 유적 등 우리나라 중부 지방에서 출토되었다. 이러한 민무늬 토기가 상모리 유적에서 발견됨으로써 제주도 민무늬 토기는 남한 지방에서 유입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3단계 토기[단순 공렬·각목 토기]가 제주도 여러 곳에 확산된 점이다. 3단계 토기가 분포된 지역은 서귀포시 강정동, 한림읍 동명리, 애월읍 곽지리, 제주시 용담동·화북동·삼양동, 조천읍 북촌리, 구좌읍 김녕리, 성산읍 신천리이다.
제주도 공렬 토기 형성과 발전 단계인 상모리 1·2단계의 토기는 지금까지 상모리 유적에서만 확인된다. 한편, 한반도에서 초기 철기 시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점토띠 토기는 3단계의 공렬 토기와 섞여 출토된다. 이러한 현상은 용담동 유적과 삼양동 유적 등 기원전 2세기에서 출발하여 기원을 전후한 시기로 연결되는 대단위 취락 유적에서 확인되고 있다.
상모리식 토기의 출현은 제주도 내에 새로운 주민 집단의 유입을 전제로 한다. 이 토기와 점토띠 토기는 토기의 형식과 속성뿐만이 아니라, 석기와 토기군의 갖춤새 수준에서 상사성을 볼 수 있다. 이 점은 두 양식의 토기 집단이 동일 주민 집단임을 입증해 준다.
남한 지방의 민무늬 토기 문화의 변천 과정을 통해서 살펴보면, 대체로 기원전 6~4세기경 남해안 지방에서 유입한 주민 집단이 상모리식 토기 집단이 되는 셈이다. 남해안 지방 문화의 흔적을 남길 정도로 일정 규모 이상의 주민 집단이 이 시기에 이동해왔다는 것을 말해 준다.
제주도 공렬 토기 사용 집단은 남해안 중서부 지방에서 유입되었다. 그들은 농경 기술을 충분히 습득한 남강 문화 제2단계의 방형 주거지계 공렬 토기 집단일 가능성이 있다. 그 집단은 제주도의 적응 과정에서 어로와 수렵을 중심으로 생활했으며, 일부 개간과 제분 용구로 보아 농경의 미미한 흔적도 확인된다. 이 유입 집단은 고인돌을 축조할 만한 인구 집단을 가지지는 못했으나, 소규모 마을을 조성하여 생활을 영위하였다.
일단 제주도에 유입된 흔암리식 공렬 토기 문화는 외부로부터 일정한 영향을 받지 않고 자체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복합형 공렬 토기 문화에서 단순형 공렬 토기 문화로 전개되었다. 제주도에서 공렬 토기 문화가 종말을 고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 가는 시기는 남한 지방보다 훨씬 늦어 대체로 기원전 2세기까지 내려올 가능성이 크다.
3단계 공렬 토기 단계의 한천변 유적으로는 지금의 용담동 용문로 유적과 월성로 유적에서 확인된다. 특히, 다음 시기에 거론될 용담동 옹관·석곽묘 복합 무덤의 가운데 경계 석렬의 남쪽 부분에서 3단계 공렬 토기가 부장된 3기의 석곽묘가 확인된 바 있다. 이는 일정한 규모의 집단이 탐라 전기의 곽지리식 토기 집단 이전에 용담동 한천변 일대에 자리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고고학적 증거이다.
이러한 3단계 공렬 토기 소멸 단계, 늦어도 기원전 2세기 중반경에 제주도로 점토띠 토기 집단이 유입된다. 제주시의 용담동·삼양동·외도동 지역을 통해서 이 집단이 정주 집단으로서 크게 성장한 증거가 확인된다. 이 시기 이후의 고대 마을은 일정한 인구 규모와 면적을 가진 부족 사회의 구조를 갖춘다.
최근 고재원은 제주도 민무늬 토기의 전개 양상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제주도 민무늬 토기 문화의 형성은 상모리 유적과 김녕리 패총 유적으로 보이는데, 그 선후 관계를 논하는 것은 쉽지 않다. 두 집단이 모두 농경을 기반으로 한 집단으로 주거지와 같은 유구 또는 비교 대상의 유물이 확인되어야 선후 관계 및 생계 유형 또는 사회 구조를 알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상모리 토기 문화는 농경을 기반으로 한 흔암리 유형의 토기 문화가 제주에 정착하면서 어로와 수렵·채집 중심의 생계 유형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반면, 김녕리 패총은 역삼동 유형의 토기 문화로 볼 때 농경을 기반으로 한 집단으로 추정된다.
또한 대포동 유적에서는 송국리형 토기 1점과 유병식 석검이 확인되었다. 송국리형 토기는 변화형으로 보이며, 이 유물들은 전라남도 지방과 남해안 지방에서 흔히 보이는 것이다. 적어도 송국리 유형의 문화가 초기 철기 시대로 여겨지는 삼양동 유적의 송국리형 주거지 단계 이전에 제주에 거점을 확보했음을 보여 준다.
후기의 토기군은 공렬 토기의 퇴화형으로 알려진 여러 토기들로, 대부분 골아가리 토기, 공렬 토기, 공렬+골아가리 토기, 마연 토기, 직립 구연 토기들이다. 그 유적은 용담동 일대 유적·강정동 유적·곽지 패총·북촌리 유적·삼양동 일대 유적 등이 있다. 적은 수량이긴 하나 많은 분포권을 형성하고 있다. 이 유적들은 흔암리 유형이 쇠퇴되는 단계의 토기로 인식되었으나, 최근 별개의 단계로 여겨지고 있다. 더욱이 이들 유적의 토기가 모두 흔암리 유형의 퇴화된 형태인지는 조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동명리 유적, 삼양동 유적 Ⅱ지구 5·6호 주거지, 월성로 유적에서 민무늬 토기 시대 종말기적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후기의 민무늬 토기 유적의 양상을 보면 다음 시기의 점토띠 토기를 기반으로 한 문화와 상호 접촉하는 단계도 엿볼 수 있는데, 곽지 패총, 삼양동 유적에서 일부 공반되고 있다. 제주도 민무늬 토기 시대 단계의 유적들은 대부분 주거지와 무덤 등이 확인됨에 따라 제주도 내에 이미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후기의 유적군은 공반 유물상을 통해 어느 정도 시기 차를 둘 수 있다. 강정동 유적은 전형적인 골아가리 호형 토기로 비교적 이른 시기로 판단된다. 그리고 용담동 유적·북촌리 유적·동명리 유적·곽지 패총·월성로 유적이 민무늬 토기의 종말기를 알려 주는 유적으로 판단된다. 이렇게 보는 기준은 순수 공렬 토기계, 점토띠 토기 공반 관계, 직립 구연 토기 출현과의 관련 여부을 근거로 한다. 그러나 동일한 시기의 문화 복합 양상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이해되며, 집단의 이해 관계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