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23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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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出陸禁止令 |
영어음역 | Chullyuk Geumjiryeong |
영어의미역 | Ban on Migration to the Mainlan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장혜련 |
[정의]
조선 중기 제주도민들이 제주 섬을 떠나는 것을 금지한 정책.
[개설]
15세기에 이르러 조선 정부의 중앙 집권화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제주에 대한 중앙 정치의 간섭도 강력해져 갔다. 중앙 정부의 지나친 행정적·경제적 간섭은 제주도민들을 유민(流民)으로 내몰았다. 제주 유민들은 전라도·경상도 해안과 심지어 중국의 해랑도(海浪島) 지역까지 떠돌았다.
당시 제주 유민들에게는 특별한 명칭이 따라 다녔는데, 한라산의 별칭인 두독야지(頭禿也只), 두모악(頭毛岳)으로 불리기도 하였고 혹은 주로 해산물을 채취해서 생활한다 하여 포작인(鮑作人) 등으로 불렸다.
제주도민이 제주를 떠나야 했던 원인으로는 중앙 관리와 지방 토호의 이중 수탈, 왜구의 빈번한 침입, 지나친 진상과 그에 따른 부역의 증대 등을 들 수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제주 유민의 수가 증가하고 제주 인구는 감소하였다.
[제정 배경 및 목적]
조선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당시 제주는 지정학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무시하지 못할 효용 가치가 있었다. 지정학적으로는 일본과 중국을 잇는 거점 지역으로서 방위 전략상 중요하였다. 경제적으로는 명과의 말 무역에 있어서 말의 생산지이자 제주 지역 특산물 또한 중요한 자원이었다.
제주도민들이 제주를 떠나 제주 인구가 감소되어 특산물의 진상, 군액의 축소 등이 심각한 과제가 되었다. 이에 1629년(인조 7) 8월 13일 조선 정부에서는 제주도민이 육지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의의와 평가]
조선 정부의 입장에서는 출륙 금지령은 효과적인 유민 정책이었지만, 제주도민들에게는 육지와의 단절로 더욱 고립되는 것을 의미하였다. 보다 강화된 중앙 정부의 수탈은 양제해(梁濟海)의 모반과 같은 형태로 나타났다.
또한 탐라국 시대 해상을 왕래하며 무역하던 배를 만들던 조선(造船) 기술과 배를 다루던 항해 기술이 단절되었다. 반면 제주 언어의 고유성을 보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민간 신앙을 비롯한 제주의 풍속이 보존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