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23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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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靑銅器時代 |
영어음역 | Cheongdonggi Sidae |
영어의미역 | Bronze Ag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선사/청동기 |
집필자 | 정의도 |
[정의]
주요한 이기(利器)의 재료에 따라 구분하는 고고학상의 3시기법(三時期法: 석기·청동기·철기)에 따른 시대의 제2단계.
[개설]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 연대는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기원전 10세기경부터 기원전 4세기까지 계속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개시연대는 이론이 많은 실정이며 추측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므로 차후의 연구결과에 따라 기원전 10세기 이전으로 소급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청동기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한강 이남까지 이르기에는 적어도 300년 이상의 기간이 필요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청동기시대의 편년]
청동기시대의 편년은 주로 청동유물을 대상으로 하여 그들의 형식변천과 유물의 공반 관계에 대한 고찰을 기초로 한 것이다. 한국의 청동기문화는 크게 2기로 나누어지는데 1기는 고조선식 동검기로 부를 수 있고, 2기는 한국식 동검기로 부를 수 있다. 이를 세분하면 고조선식 동검기는 3시기로 나누어지고, 한국식 동검기는 5시기로 나누어진다. 고조선식 동검이란 고식 동검으로 지금까지 그 형태나 출토지명에 따라 비파형 또는 만주식, 요령식 동검으로 불러 왔던 것이나 현재는 부여의 송국리, 고흥 운대리, 마산 진동리, 여천 적량동, 합천 영창리 등 남부지방에도 많이 출토되고 있고 형태상으로도 마산의 진동리나 개천 용흥리 출토유물은 비파형이 아니므로 그 의미가 없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시 동검을 사용한 주인공이 고조선 사람들이므로 고조선식 동검이라고 부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신식의 한국식 동검도 과거 세형동검으로 불리어졌으나 역시 고조선 사람들의 후예가 사용하였고, 전대의 동검과 구분하는 동시에 준왕의 남천 이후 한국에서 많이 사용하였으므로 한국식 동검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고조선식 동검과 같이 출토되는 청동기는 소도자, 동포, 선형동부, 양익촉, 명도전 등이 있으며 한국식 동검과 같이 출토되는 청동기로는 동모를 비롯하여 동과와 동사(무기류), 다뉴경(동경), 동탁, 검파형 동기, 방패형 동기, 검파두식, 거여구, 팔령구, 동부, 대구, 삼각촉 등 유물의 내용이 다양하다. 동검의 출토유적은 분묘유적-석관묘 계통에서 출토되는 한정적인 경향이 있었으나 최근의 발굴성과에 의하면 주거지나 환호유적에서 출토되고 있어 동검의 성격에 대한 다각도의 고찰이 필요한 실정이다. 청동기 외의 공반유물로는 비실용화된 마제석촉, 정형화된 천하석제 옥, 점토대토기, 흑색장경호 등이 있다.
한편 청동기시대는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겠으나 기원전 4세기 말이나 3세기 초가 되면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되는데 이 시기에 이르면 청동제 공구나 용기, 거여구 등 일상생활의 실용품들이 철기로 대체되고 이 유물들은 토광묘라고 하는 전혀 다른 형식의 무덤에서 출토된다. 이것은 중국 문화의 영향으로 청동기가 소멸되고 철기가 출현하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생업경제]
청동기시대의 생업경제는 농경생활을 위주로 하고 수렵과 어업을 보조수단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농경생활의 보급은 곡식의 이삭을 자르는데 사용한 반월형 석도의 광범위한 분포로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주거지는 대개 구릉지대에 입지하고 있으므로 대부분 밭농사에 의존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남강댐 수몰지구의 발굴에서 확인된 구릉지대의 대규모 경작유적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재배 곡물은 북한 지역에서 벼·기장·수수·조, 그리고 콩·팥으로 생각되는 탄화곡립이 발견된 사례가 있다. 남한에서는 여주 흔암리에서 탄화미를 비롯하여 보리·조·수수 등 4대 곡물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이 기원전 7세기 이전이라는 연대측정의 결과로 보아 우리나라 벼농사의 기원이 기원전 7세기 이전으로 소급될 수 있게 되었다. 중국 화남 지방이 원산인 쌀의 수입경로에 대하여는 북방설과 남방설이 있으나 화남지방의 길죽길죽한 장립형의 벼가 화북지방을 거쳐 북상하는 동안 일단 단립형으로 개량되고 이 개량된 품종은 다시 각종 마제석기와 홍도 및 공열토기를 공반하는 우리나라 무문토기문화권에 전래되었으며 이렇게 전래된 벼농사는 나중에 지석묘와 함께 일본 야요이문화를 형성한 것으로 보고 있다.
[취락유적]
청동기시대의 취락유적으로는 경기도 수석리·흔암리 유적, 충청남도 부여군 송국리·해미 유적 등을 들 수 있으며 진주 남강댐 수몰지역의 주거지도 포함된다. 이들은 강변에 위치한 구릉이나 또는 작은 하천평야를 앞에 둔 구릉지대에 입지하고 있다. 춘천의 중도 유적은 강변에 저지대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초기철기시대의 주거지가 함께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북한에서는 평양 금탄리 유적, 황해도 석탄리 유적, 함경북도 무산 호곡동 유적 등이 있다. 주거형식은 수혈식 가옥이 계속되고 있으나 그 평면상의 형태는 장방형(직사각형) 또는 방형(사각형)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주거지의 면적은 길이 5~6m, 너비 3~4m가량 되는 것이 많으며 가족은 5~6명 정도로 추산된다. 수혈 내부에서는 노지와 기둥을 세우기 위한 구멍자리, 벽구 시설 등이 발견되며 노지는 주위에 돌을 돌리거나 흙으로 둑을 쌓은 것이 있고 수혈의 바닥은 그대로 다져서 사용하거나 바닥에 점토를 3~4㎝ 정도 발라서 불에 구워 불다짐 처리한 예도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다.
[분묘]
청동기시대의 분묘로는 석관묘와 지석묘, 옹관묘, 적석총 등이 있으며 청동기시대의 말기에 이르면 토광묘가 나타나면서 일변한다. 석관묘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는 네 벽과 바닥 및 뚜껑을 각각 1매의 판석으로 조립한 것으로 이를 석상분이라고도 한다. 이른바 석관묘로 분류되는 무덤들 중에는 작은 판석을 연결하여 조립한 것과 냇돌 또는 괴석을 혼용한 것도 없지 않으나 이들은 개석식 지석묘의 하부 구조로 결합된 예가 많다.
지석묘는 우리나라 전역에 퍼져 있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분묘로서 약 20,000여기 이상 분포하고 있다. 지석묘를 외관에 따라 크게 탁자식 지석묘, 기반식 지석묘, 개석식 지석묘의 3가지 형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탁자식 지석묘는 상석이 개석의 역할을 겸하는 것으로 4매의 판석을 세워서 묘실을 만들되 2매의 장변 판석이 지석을 겸하는 것이며 묘실이 대부분 지상에 위치하는 것이 특징이다. 개석식 지석묘는 상석 아래 지석이 없는 것으로 지석을 가진 무덤이라는 뜻의 지석묘라는 명칭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것이 아니라 상석과 묘실이 지면에서 직접 접하는 것으로 묘실에 개석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 기반식 지석묘는 상석과 묘실, 개석 간에 할석 또는 괴석을 이용하여 3~4매 내지는 그 이상의 지석을 설치하는 것이다. 이 지석묘들은 지역에 따라 조성한 시기와 각 형식 간 사용시기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탁자식 지석묘, 개석식 지석묘, 기반식 지석묘의 순으로 선후관계가 나누어지며 축조연대의 하한은 기원전 3세기경으로 추정되지만 상한은 아직 정설이 없는 실정이다. 적석총은 실제로 발견되는 경우가 상당히 드문 것으로 춘천 천전리에서 발견된 예가 있다. 한편 옹관묘는 김해 회현리에서 합구식의 옹관묘가 발견된 예가 있으며 그 하부에 한국식 동검이 출토되었다.
[토기]
청동기시대의 토기는 무문토기라는 이름으로 총칭되고 있지만 이들의 종류는 다양하다. 가장 기본이 되는 토기는 심발형토기라고 하는 원통형의 토기이며 이들은 조리용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밑바닥에 한 개의 구멍을 뚫어 시루와 같은 용도로 사용된 경우도 있으며 팽이형토기 및 점토대토기, 이중구연토기는 이들의 변형으로 볼 수 있다. 그 밖에도 호형토기와 음식물을 담기 위한 접시·굽접시·대접 등이 있다. 석기는 농경구·공구·수렵구 혹은 무기로서 마제석기가 다량으로 사용되었다. 석가기는 청동기가 보급되고 난 다음에도 일상생활에서는 계속하여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양상이 신석시시대에 비하여 종류도 매우 다양해지고 제작기술이 크게 향상되었으며 생활전반에 걸쳐 석기의 사용이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볼 수 있다. 석제 농구로는 석도와 석추·연석 등이 있고 공구로는 합인석부·편평단인·유구석부 등이 있다. 수렵구로는 마제석촉이 사용되었으며 무기로는 마제석검이 만들어졌으나 그 일부는 실용품이라기보다는 부장품으로 사용되었다. 그 외에도 특수한 석제품으로 환상석부·다두석부와 같이 이를 소지한 자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하여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것도 있다.
[진주지역의 청동기시대 유적]
선사시대의 진주지역에 대해서는 남강댐 수몰예정지구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결과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남강 선사유적에서는 다수의 청동기시대 유적이 발굴조사 되었는데, 밭터와 환호 취락유적은 특히 주목할 만한 유적이다. 대평면 어은동 구역에서는 2,000평 정도, 대평면 옥방지역에서는 1,800평 정도의 청동기시대 밭 유구가 드러났다. 이 밭터에서는 반달돌칼, 돌도끼, 돌낫 등 경작용 석기 수백 점과 조로 추정되는 탄화곡물이 나왔고, 작업 중 야외에서 간단한 조리를 해먹었던 야외노지도 발견되었다. 이는 진주지역이 오래 전부터 농경생활의 무대가 되어왔으며, 이미 청동기시대에 본격적인 농경생활단계로 진입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방어시설인 환호를 둘러친 취락이 6개소에서 조사되었는데, 이는 농업생산력의 발달로 인하여 잉여생산물이 축적되고, 이에 따라 약탈전쟁이 시작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