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015
한자 朝鮮時代 服飾- 生活相- 壁畵墓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박상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5년 2월 5일연표보기 - 밀양 고법리 박익 벽화묘 사적 제459호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1년 7월 28일 - 밀양 고법리 박익 벽화묘에서 밀양 박익 벽화묘로 개칭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6월 29일 - 밀양 박익 벽화묘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사적 지정 번호 삭제
관련 지역 밀양 박익 벽화묘 - 경상남도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산134 지도보기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에 있는 박익의 벽화묘를 통하여 본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의 생활상과 복식.

[개설]

우리나라에서 벽화묘(壁畫墓)[벽화가 그려진 무덤]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삼국시대에 본격적으로 성행하였다. 하지만 고려시대로 접어들면서 벽화묘는 점차 쇠퇴하였고,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까지 여겨졌다. 그러다 2000년에 태풍에 의하여 훼손된 박익(朴翊)[1332~1398]의 묘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벽화가 발견되었고, 2009년에는 노회신(盧懷愼)[1415~1456]의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벽화가 발견되면서 비록 일부이기는 하지만, 벽화묘의 명맥이 조선시대까지도 이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경상남도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에 자리한 박익의 벽화묘는 1420년(세종 2)에 조성되었는데, 십이지상(十二支象)과 사신도(四神圖) 등이 주로 그려졌던 기존의 벽화묘와는 달리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의 생활상과 복식이 그려져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생활상과 의식이 담긴 벽화]

1. 북벽의 벽화

박익의 묘에는 본래 동서남북의 네 벽 모두와 천장에도 벽화가 그려졌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동벽과 서벽, 그리고 남벽의 벽화만이 일부 남아 있을 뿐, 도굴의 피해를 심하게 입은 북벽의 벽화는 일부 하단의 벽돌 무늬를 제외하고는 흔적을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되어 있다. 천장의 벽화 또한 심하게 훼손된 까닭에 적외선 촬영에 의하여서만 약간의 흔적을 부분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2. 동벽과 서벽의 벽화

동벽과 서벽에는 각각 북쪽을 향하여서 무리 지어 걸어가는 남녀가 그려져 있으며, 각자 병이나 찻잔 등의 그릇, 신발, 모자, 주판(珠板) 등의 기물(器物)을 들고 있다. 이때 남성과 여성이 머리에 함지박 같은 것을 이고 가기도 하는데, 당시에도 머리에 물건을 이었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동벽과 서벽을 대비시켜서 보면, 동벽이나 서벽에는 네 명의 남녀로 이루어진 세 개의 인물군이 각각 그려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남녀 무리가 여러 기물을 들고 예외 없이 북쪽을 향하여 걸어가는 이유는 아마도 완전히 벗겨져 떨어져 버린 북벽에 묘주(墓主)[무덤의 주인]인 박익의 단독 초상(肖像)이나 박익과 부인이 함께 그려진 부부병좌상(夫婦竝坐象)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도굴로 인하여 훼손된 북벽에는 박익의 단독 초상이나 부부병좌상이 그려져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에 대하여서는 박익의 묘가 부부가 함께 묻힌 합장묘(合葬墓)가 아닌 단독 석실묘인 까닭에 북벽에는 부부병좌상보다는 박익의 단독 초상이 그려져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와 박익의 벽화묘를 합장묘로 보고 부부병좌상이 그려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가 있다. 이를 종합하여 보면, 북쪽을 향한 남녀 행렬은 묘주인 박익 혹은 박익 부부를 위한 공양이나 장례 의식에 참여하기 위한 모습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묘주인 박익이 1398년(태조 7)에 생을 마감하고 1420년(세종 2)에 현재의 무덤에 묻혔던 것을 고려하면, 개장(改葬)에 따른 제사 행렬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3. 남벽의 벽화

남쪽 벽에는 두 필의 말과 두 명의 마부가 좌우대칭을 이루며 그려져 있다. 마부가 말의 고삐를 쥐고 옆에 서 있는 모습에서 묘주인 박익이 타고 갈 수 있게 대기하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다만 박익이 타고 천상(天上)을 향하기 위한 준비인지, 아니면 일상생활 속에서의 출타를 위한 준비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이때 마부와 말의 수와 관련하여 남은 한 필의 말과 한 명의 마부는 부인을 위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 밖에 천장 부분에서는 적외선 촬영 결과 별자리와 비슷한 흔적이 아주 희미하게 확인되었다. 고려시대 벽화묘들의 천장에 다양한 성수도(星宿圖)가 그려졌던 사실을 고려하면, 박익 묘의 천장에도 하늘을 상징하는 일월성신(日月星辰)이 표현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벽화 속 여성의 복식과 머리 모양]

1. 여성의 복식

박익의 벽화묘에 등장하는 다양한 남녀의 복장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로 이어지는 과도기의 우리나라 복식의 다양한 모습을 알려 준다. 먼저 동벽과 서벽에 그려진 여성들의 복장을 살펴보면, 기본적으로 저고리와 치마 차림을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저고리의 경우 오른쪽으로 깊게 여며 왼쪽 깃이 오른쪽 깃을 크게 엇비끼게 하였는데, 그 길이가 비교적 길어 허벅지를 충분히 덮을 수 있는 정도이다. 이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던 여성들의 저고리 길이가 엉덩이선까지 내려오던 것과 비교하여서 상당히 길어진 것이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여성의 상의(上衣) 길이가 길어진 것을 보여 준다.

저고리에는 옷깃의 좌우를 고정시키는 고름과 같은 역할을 하는 매듭단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벽에 그려진 붉은 저고리를 착용한 여성을 보면, 겉깃이 오른쪽 겨드랑이 쪽으로 몰려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매듭단추와 같은 것으로써 옷깃을 한쪽으로 고정시켰음을 시사한다. 아울러 서벽에 그려진 붉은 저고리를 입은 여성 역시 깃이 한쪽으로 몰려 있는 가운데 허리에 선을 하나 그어 허리띠를 표시하고 있다. 우리나라 고대 복식에서는 여민 것을 고정시키기 위하여 끈이 아닌 매듭단추 등을 사용하였는데, 여기에서도 동일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매듭단추만으로는 고름의 역할이 충분하지 않다고 여긴 까닭에 다시 허리띠로 깃을 고정한 것으로 보인다. 허리띠로 둘러 깃을 보다 안정적으로 여미었을 뿐만 아니라, 가는 허리띠를 통하여 장식적인 효과를 꾀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하여 여성의 상의인 저고리에 비록 고름이 부착되기는 하였으나, 조선 초기까지도 허리띠를 사용하여 옷깃을 고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저고리의 소매는 길이가 길어 손목에서 걷어 올려 주름을 몇 개 만든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상류층 여성들은 손이 보이는 것을 경계하여 손이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예컨대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송나라의 서긍(徐兢)[1091~1153]이 저술한 『고려도경(高麗圖經)』[1123]을 보면, 고려의 여성들은 손이 보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벽화에 묘사된 여성들은 신분이 높은 여성들이라기보다는 묘주를 모시는 신분이 낮은 여성들로 볼 수 있다.

저고리와 함께 착용한 치마는 저고리가 허벅지까지 내려오기 때문에 전체 길이가 비교적 짧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저고리를 가슴이 아닌 허리에 고정시켜서 입었기 때문에 허리 아래 선에서 발등 정도까지로 치마의 길이를 정한 것으로 보인다. 치마 끝이 발등에 닿았기 때문에 향로(香爐) 같은 것을 받치고 있는 여성을 보면 한 손으로 치맛자락을 살포시 들어 올리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치마를 고정하는 허리끈을 저고리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것도 볼 수 있다. 치마 혹은 저고리 색과는 다른 색으로 허리끈을 만들어 보다 장식적인 효과를 거두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여성들이 신고 있는 신발은 가죽으로 만든 혜(鞋)이다. 흰색 외에도 붉은색, 푸른색의 것들이 있어 색을 곁들인 신발을 착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2. 여성의 머리 모양

여성의 머리 모양을 살펴보면, 여성들은 좌우 귀 옆에서 둥근 고리를 이루도록 묶은 소녀쌍환계(少女雙鬟髻)나 둥근 고리를 이루지 않고 묶기만 한 수련계(垂練髻)를 하고 있다. 여기에 머리 윗부분에 서로 다른 꽃 모양 장식을 더하고 있다. 머리를 양옆으로 묶거나 고리 모양으로 묶는 방법은 고대 한국·중국·일본 3국에서 유행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벽화 속 여성들의 머리 모양은 고대의 머리 모양이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초기까지도 이어졌음을 보여 준다. 한편 양옆으로 묶거나 고리 모양으로 묶는 머리 모양은 고대에는 대개 결혼 전의 어린 동자나 소녀들이 하였던 것이었다. 따라서 벽화에 그려진 여성들, 특히 소녀쌍환계를 한 여성들은 결혼을 하지 않은 어린 여성들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고려 후기 불교 회화에 등장하는 여성들 중에서 나이가 들었다고 판단되는 여성들은 양옆으로 묶거나 고리 모양으로 묶은 머리 모양을 하지 않고 있다. 이처럼 나이 어린 여성들이 소녀쌍환계나 수련계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벽화묘가 조성될 당시까지도 고대의 전통이 계승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벽화 속 남성의 복식과 머리 모양]

1. 남성의 복식

남성의 복장을 살펴보면, 둥글고 아래의 좌우가 트여 있는 단령(團領)의 포(袍)를 입은 뒤 허리에 띠를 매고 긴 가죽 장화인 화(靴)를 신고 있다. 먼저 단령은 목선이 비교적 목에 맞고 깊이 파여 있지 않아 고려 말기 단령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소매는 손을 덮고도 남을 정도로 길기 때문에 손목에서 주름을 만들어 잡았다. 허리선 아래로 옆트임이 있는데, 조선 후기의 단령과 비교하여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남성들은 머리에 춤이 높고 테가 있는 벙거지와 뿔이 위로 향한 사모(紗帽)와 복두(幞頭)를 쓰고 있다.

남벽에 그려진 마부들은 동벽과 서벽에 보이는 남성들과는 달리 단령이 아닌 직령(直領)으로 된 포를 깊게 여미고 허리띠를 매었으며, 발에는 목이 긴 화를 신고 있다. 머리에는 모두 꼭대기에 새 깃털과 같은 장식이 있는 몽골풍의 발립(鉢笠)을 쓰고 있다. 직령으로 된 포의 경우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에서 깊숙하게 여미어 있다. 깃을 여민 모습은 조선 초기의 김시습(金時習)[1435~1493]의 초상화에서도 확인된다. 옷의 길이는 무릎 정도까지 내려오며, 소매는 비교적 몸에 맞으며, 길이는 길어 손목 부분에서 여유분은 주름으로 접었다. 포의 치마 부분은 매우 넓어 마치 바람에 휘날리는 듯하다. 벽화 속 오른쪽에 있는 마부는 베[布]로 만든 끈을 허리끈으로 삼고 있으며, 묶은 매듭의 끝을 리본과 같이 묶어 아래로 향하게 하였다. 왼쪽에 있는 마부 또한 허리에 끈을 묶었는데, 너비가 있고 손으로 허리끈에 짚고 있는 것으로 베로 만든 끈이라기보다는 가죽 등 비교적 견고한 재질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2. 남성의 머리 모양

머리에 쓰고 있는 발립(鉢笠)은 중국의 금나라[1125~1234]와 원나라[1234~1367] 때 황제를 비롯하여 일반인들도 착용한 것이다. 발립은 안과 겉을 다른 색으로 하였고, 챙을 겉쪽으로 살짝 걷어 올려 쓰기도 하였다. 마부들이 한 복식의 특징은 원나라 때 각지에서 조성된 부장용 소조상(塑造像)이나 벽화의 마부·시자도(侍者圖)의 인물 표현에서 유사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유사성은 당시에 원나라 복식이 유행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당시 동아시아 전반에 유사한 이미지가 공유되었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발립 위에 다시 깃털 같은 것을 꽂고 있는 점, 말 한 필과 마부 한 명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점 등은 중국과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말과 마부가 서로 바라보는 시선 처리는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표현으로 여겨지고 있다.

한편 마부들의 얼굴이 앳되고, 발립 밑으로 보이는 머리 모양이 수련계로 되어 있으며, 수염이 표현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남성이 아니고 여성일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벽과 서벽의 남성들도 수염이 그려져 있지 않고, 머리를 묶는 수련계가 고대에는 소년들도 하였었다는 사실에서 여성으로 보기보다는 어린 남성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게다가 위험한 말을 부리는 일을 여성에게는 맡기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시대 생활상과 복식을 담은 벽화묘]

박익의 벽화묘에는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의 생활상과 복식 등의 단편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하지만 벽화묘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벽화 자체에 대한 연구는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짐과 동시에 새로운 벽화묘가 발굴된다면, 당시의 생활상과 복식이 더욱 명료해질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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