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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731
한자 丁銅俊
영어공식명칭 Jeong Dong-Jun
이칭/별칭 삼산고정(三山高正)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하지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7년 8월 21일연표보기 - 정동준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3일 - 정동준 밀양 3·13 만세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14일 - 정동준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징역 4월형 언도
활동 시기/일시 1929년 - 정동준 신간회 밀양지회 집행위원 선임
몰년 시기/일시 1944년 10월 11일연표보기 - 정동준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15년연표보기 - 정동준 대통령 표창 추서
출생지 내이동 -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 654 지도보기
활동지 밀양 - 경상남도 밀양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신간회 밀양지회 집행위원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정동준(丁銅俊)[1879~1944]은 1897년 8월 21일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윤세주(尹世胄)윤치형(尹致衡)은 고종 인산에 참석하기 위하여 서울에 갔다가 3월 1일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윤세주 등은 동화학교(同和學校) 교장인 전홍표(全鴻杓)를 찾아가 서울의 상황을 보고하고 밀양에서도 시위를 벌이기로 논의하였다. 이후 본격적인 시위 준비에 들어갔다.

윤세주는 3월 11~12일경 밀양면 내이동(內二洞) 등지를 돌며 동지를 규합하였다. 12일에는 정동찬(丁銅燦)의 집에서 정동준을 비롯하여 박만수(朴萬守), 박소종(朴小宗), 윤보은(尹輔殷) 등을 만나 13일이 마침 성내(城內) 장날이니 무리를 지어 조선 독립을 외치고 시장 안을 행진하자고 제안하였다. 정동준 등은 윤세주의 뜻에 동의하였고, 시위의 실행과 관련된 연판첩(連判帖)에 압인(押印)하였다. 한편 윤치형은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과 태극기 수십 개를 만들었다.

3월 13일은 밀양면 읍내 장날로, 정오 무렵 장터에는 1,000여 명의 군중들이 모여 있었다. 오후 1시경 내일동(內一洞) 김병환(金鉼煥) 쌀가게 인근에 모인 윤세주, 정동준 등은 대형 깃발을 앞세우고 시위를 시작하였다. 나팔을 불고 소형 깃발을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 장터에 모인 군중들도 호응하였다. 밀양면의 헌병과 경찰뿐만 아니라 부산에서 급파된 헌병, 수비대까지 합세하여 시위대를 무력으로 탄압하였고, 시위대는 결국 해산하였다.

정동준은 시위에 참여한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14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4월형을 언도받았다. 부산 감옥에서 옥고를 치른 후 8월 14일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밀양으로 돌아와 각종 사회단체에 몸담는 한편 각종 후원활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밀양야학회(密陽夜學會)와 밀양유치원(密陽幼稚園)에 기부한 것을 비롯해서 수재(水災), 한재(旱災) 등 각종 재해가 있을 때마다 지역사회에 의연금을 냈다. 1920년대 후반에는 상우회(商友會), 신간회(新幹會) 밀양지회, 밀양차가인동맹(密陽借家人同盟) 등의 단체에서 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정동준은 1944년 10월 11일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정동준에게는 2015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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