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1031
한자 明誠齋
영어공식명칭 Myeongseongjae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상남면 조음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류화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640년연표보기 - 명성재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1947년 - 명성재 중건
현 소재지 명성재 - 경상남도 밀양시 상남면 조음리 지도보기
원소재지 명성재 - 경상남도 밀양시 상남면 조음리
성격 재사
정면 칸수 4칸
측면 칸수 1칸
소유자 평산신씨 문중
관리자 평산신씨 문중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 상남면 조음리에 있는 조선 후기 재사.

[개설]

명성재(明誠齋)는 통사랑(通仕郎) 신충후(申忠厚)[1543~1593]의 제단과 신충후의 아들 신흥몽(申興蒙)[1574~1618]의 묘소에 건립된 재사(齋舍)이다. 신충후는 조선 성종 때 경상남도 밀양으로 남하한 낙진당(樂眞堂) 신승준(申承濬)의 현손이며, 송계(松溪) 신계성(申季誠)의 손자다. 선음(先蔭)으로 통사랑에 제수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 때 초계(草溪)[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적중면·청덕면·쌍책면·덕곡면·율곡면 일대]로 피난 중에 부인 김해배씨(金海裵氏)와 함께 사망하였다. 초계에 임시로 장사를 지냈지만, 묘지나 전해 오던 사실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신흥몽은 신충후의 독자로 임진왜란에 아버지를 따라 초계에서 피난 중에 양친상을 당하였고,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9대손 신성규의 「명성재기(明誠齋記)」에 따르면 재실을 중건하면서 실전된 신흥몽의 양친에 대한 제단을 세웠다고 한다. 중건하는 과정에 문중에서 각고의 노력과 정성이 있었고, 앞으로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받들겠다는 다짐으로 ‘명성’이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위치]

명성재밀양시 상남면 조음리에 있다.

[변천]

명성재는 원래 신흥몽의 묘소 아래에 재사로 1640년 창건되었다가, 1947년에 중건되었다. 중건하면서 실묘한 신흥몽의 양친인 신충후와 김해배씨의 제단을 재사 뒤에 세우고 ‘명성재’라 현액하였다.

[형태]

명성재는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되어 있다.

[현황]

명성재는 낮은 돌담으로 둘러쌓여 있고, 추위와 더위 및 자연재해에 대비하기 위하여 현대식 창틀이 설치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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