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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천역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500340
한자 所川驛
영어공식명칭 Socheonyeok Stati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정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정 시기/일시 1414년 - 소천역, 금산에서 무풍으로 환속
개정 시기/일시 1462년 - 소천역 제원도 승에 소속
관할 지역 소천역 -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 지도보기

[정의]

조선 시대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에 있던 교통·통신 시설.

[관련 기록]

소천역(所川驛)은 『고려사(高麗史)』[권135, 우왕 10년 8월]에서 “왜구가······ 전라도(全羅道) 안성소(安城所)소천역도 노략질하였다”는 내용으로 기록에 처음 등장하였다. 그러나 같은 기록[권82 병(兵)2 참역(站驛)]에 의하면 고려의 525개 역의 명단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보아 고려 말, 조선 초에 행정 구역 개편 때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무주현에서 동으로 45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본래 무풍(茂豊) 지경에 있었는데, 중간에 금산(錦山)에 이속시켰다가, 1414년(태종 14)에 도로 본 현에 환속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世宗)소천역은 달계역(達溪驛)과 함께 제원도(濟原道)[조선 시대 충청도 금산의 제원역(濟原驛)을 중심으로 한 역도(驛道)] 관할이었다. 1462년(세조 8)에 역로(驛路)가 정비되면서 소천역은 금산의 제원역, 용담(龍潭)의 달계역, 진안(鎭安)의 단령역(丹嶺驛), 고산(高山)의 옥포역(玉包驛)과 함께 제원도 승(濟原道丞)에 소속되었다.

[내용]

소천역이 해당되는 전라좌도(全羅左道)는 6도 6찰방(六道六察訪)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말 274필과 역졸 1,797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소천역에는 역리(驛吏) 60명, 노(奴) 5명, 비(婢) 4명이 있었으며, 말 10필[상등1필, 중등 9필]이 배치되었다. 그리고 역의 운영과 관련된 둔전(屯田)은 역졸복전(驛卒復田) 120결(結), 공수위전(公須位田) 5결 7부(負) 7속(束), 마위전(馬位田) 48결 31부 9속이 있었다. 한때 소천역은 금산군(錦山郡)에 있는 제원 찰방(濟原察訪)의 속역(屬驛)이었으며, 이곳에서 출발한 파발(擺撥)은 제원역을 거쳐 경천역(敬天驛), 증암역(增岩驛), 성환역(成歡驛), 청호역(菁好驛)을 통해 서울역으로 들어갔다.

무주와 인접한 경상우도(慶尙右道)의 김천 찰방(金泉察訪)에는 금릉(金陵)·개녕(開寧)·지례(知禮)·고령(高靈)·합천(陜川)·초계(草溪)·거창(居昌) 등 20개가 속해 있었다. 그 중에서 거창의 성초역(省草驛)은 무풍과 고제면(高梯面) 사이에 있어 소천역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때문에 소천역과 성초역을 잇는 교통로를 통하여 경상도와 문물 교류 등을 위한 왕래가 잦았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 제원도 승에 속한 소천역은 무주와 인근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망으로, 이 시기 사람의 이동, 물자의 유통, 문화의 교류를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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