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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좌의 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501206
한자 吳首座-恨
이칭/별칭 「계조굴」,「오수좌굴」,「오수자굴」,「오주자굴」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집필자 이정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1992년 - 「오수좌의 한」, 『내 고장 전설집』에 수록
관련 지명 오수좌굴 -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지도보기
관련 지명 무주 구천동 -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장덕리 지도보기
관련 지명 백련사 -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삼공리 지도보기
관련 지명 나제통문 -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 지도보기
성격 설화|인물담
주요 등장 인물 오수좌|과부|유장군
모티프 유형 고승 파계|아기장수|친자 살해|둔갑술

[정의]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에서 오수좌굴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오수좌의 한」오수좌가 자신의 이기심과 경솔함으로 난세를 구할 영웅인 아들을 죽였기 때문에, 임진왜란 때 나라와 백성이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을 뉘우쳐서 굴속에 들어가 참회를 했다는 파계승에 대한 인물담이다. 이를 「계조굴」, 「오수좌굴」, 「오수자굴」, 「오주자굴」 등이라고도 한다. ‘오수좌굴’의 유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절간에서 행패를 부리는 거친 오수좌가 선비에게 제압을 당하는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거친 오수좌가 자신의 업보를 참회하게 된 유래담이다. 두 유형 모두 오수좌가 거칠고 통제 불가능한 인물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채록/수집 상황]

「오수좌의 한」은 1992년 김경석이 편찬하고 무주군에서 간행한 『내 고장 전설집』의 92~93쪽에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시대적 배경을 선조 때라고 말하고 있지만, 서사 구조상 임진왜란에 활약하지 못한 아기 영웅에 대한 아쉬운 표현이지 역사적으로 오수좌를 실증할 만한 자료는 없다. 현재 ‘오수자굴’과 ‘오수좌의 굴’이 동시에 쓰이고 있다. 인터넷 기사를 참조하면 오수좌가 활약했던 시기를 개항기로 보기도 하고, ‘오수자’와 ‘오수좌’를 동일 인물로 간주하기도 한다. 덕유산을 산행한 사람들이 현장을 답사하여 남긴 기록이나 인터넷 지도상에는 ‘오수자굴’로 나온다. 또한 2003년 박대길이 편찬하고 무주군에서 간행한 『무주의 마을 유래와 땅 이름』에 실린 내용은 ‘제압당한 오수좌’ 유형이다. 현재 오수자굴은 50여 명이 들어가 면벽 수도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라고 전한다. 2008년 국립 공원 관리 공단에서 간행한 『덕유산 국립 공원 전설 지명 유래 이야기』에도 실려 있다. 포악한 오수좌를 안성에서 온 선비가 제압해서 절간이 조용해졌다는 내용으로 전한다. 그리고 2013년 김익두·김월덕·허정주·백은철 등이 집필하고 한국학 중앙 연구원에서 발행한 『증편 한국 구비 문학 대계』-전라북도 무주군에 수록된 내용은 1992년 『내 고장 전설집』에 실린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내용]

오수좌무주 구천동에 있는 한 사찰에서 수도하는 승려이다. 수좌는 상좌승의 이칭으로 많은 수행승 중에서 수위에 있어서, 주지를 대신해서 설법을 할 수 있는 높은 지위에 있는 자이다. 그런데 오수좌는 여느 상좌와 달리 장사와 같은 기운으로 잡기와 술, 여자를 가까이 하기도 하는 별난 스님이었다. 그의 장사와 같은 기운은 호랑이를 맨손으로 잡을 만큼 셌다. 그러던 중 무풍현 삼거리에 사는 과부가 아름답다는 소리를 듣고 호기심이 발동하여 찾아가 육체적 관계를 맺게 되었다. 결국 둘 사이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좁쌀을 꼬마 병정으로 둔갑시켜 훈련시킬 정도로 비범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오수좌와 과부는 자신들의 허물이 드러나고, 장차 아이의 미래가 걱정되어 아들을 죽이기로 결심하였다.

이때 아이는 엄마의 의중을 알고서 자신을 죽일 방법을 알려 주며 자신이 이 세상에 온 것은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유언을 남긴다. 결국 아기가 양 겨드랑이에 짚 섶으로 찔려 죽자 하늘에서는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천둥 번개가 치고 만다. 사람들은 어머니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유복자였던 아기장수를 ‘유장군’이라고 불렀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유장군이 살아 있었다면 비참한 국난을 겪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수좌는 자신의 이기심과 경솔함으로 아들을 죽이고 나라가 곤경에 빠지게 된 것을 뉘우치며 굴속에 들어갔다. 그 후로 오수좌를 본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이 지역의 지명에 용소, 말거리, 투구봉, 쇠머리, 뼈재 등이 있는 것도 아기장수가 태어나 승전하리라는 전설 때문이라고 한다.

[모티프 분석]

「오수좌의 한」의 주요 모티프는 ‘고승 파계’, ‘아기장수’, ‘친자 살해’, ‘둔갑술’ 등이다. 「오수좌의 한」은 현재 채록된 것 중에서 서사적으로 완결성을 지니고 있고 오래된 기록이다. 형식[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스님과 자유를 통해 진리에 도달하는 파계승은 문학 속에서 짝을 이루어 등장하는 모티프이다. 오수좌는 술, 기행, 살생, 여자를 가까이하는 전형적인 파계승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고승 파계담이 보여 주는 탈속의 경지와 달리, 오수좌는 자신의 업보를 참회하는 고승이다. 오수좌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자신의 한계를 끝까지 숨기려고 했기 때문이다.

오수좌의 아들은 전형적인 ‘아기장수형’의 삶을 살았다. 파계의 자유로움을 누렸던 오수좌 역시 아기장수의 혁명적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하는 범부로 전락하였다. 오수좌의 굴은 수도의 형식을 거부했던 자신의 한계를 직시한 오수좌가 참회를 위하여 숨어든 장소이다. 오수자굴[오수좌굴]은 수도를 위한 경건한 곳이지만, 민중들은 이보다도 살해당한 아기 영웅만을 전하여 기억시키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오수좌의 참회와 한스러움은 새로운 세계를 염원하는 민중들의 아쉬움을 대변하고 있다. 무주 구천동의 산세가 지니고 있는 고립성이 이러한 아기장수 설화와 파계승의 일탈과 결합되어 전승된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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