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501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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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栢冶遺事 |
영어공식명칭 | Baekyayusa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전라북도 무주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순철 |
간행 시기/일시 | 1853년 - 『백야유사』 재간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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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문집 |
저자 | 장필무 |
편자 | 장진익 |
간행자 | 장진진 |
권책 | 1권 1책 |
규격 | 22.9×34.2㎝ |
[정의]
조선 전기 무주에 거주한 무신 장필무의 사적을 기록한 문집.
[저자]
장필무(張弼武)[1510~1574]의 본관은 구례(求禮)이며, 자는 무부(武夫), 호는 백야(栢冶)이다. 할아버지는 군수 장사종(張嗣宗)이고 아버지는 충순위(忠順衛) 장근(張謹)이다. 1543년(중종 38) 무과에 급제하고, 종사관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왔으며, 온성 판관(穩城判官)을 지내면서 변방을 지켰다. 1567년(명종 22) 만포 첨사(滿浦僉使)로 있을 때 중국의 오랑캐가 반란을 일으켜 우리 변방을 침입했을 때, 용맹한 군사 100여 명을 매복시켰다가 적을 공격하여 수백 명을 사로잡아 중국으로 보냈다. 그러자 명(明)나라 목종(穆宗)은 장필무를 즉시 녹훈(錄勳)하라 명하고, 그의 이름을 새긴 은 3근[1.8㎏]에다 '황제문안(皇帝問安)'이라는 네 글자를 새겨 내려 보냈고, 이어 우리나라에 조칙(詔勅)을 내려 그를 찾도록 하였다. 이에 명종(明宗)은 장필무를 불러 명 황제의 부름에 응하도록 하고 명나라에서 하사한 주은(鑄銀) 한쪽에는 ‘청백장군 장필무(淸白將軍 張弼武)’라는 글씨를 써서 어찰과 함께 하사하였다.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를 역임하고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사후에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무주의 죽계 서원(竹溪書院)과 영동(永同)의 화암 서원(花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양정(襄貞)이다.
[편찬/간행 경위]
『백야유사(栢冶遺事)』는 장진익(張振翼)이 자신의 6대조인 장필무의 행적 등을 수록한 필사본을, 순조(純祖) 때 장진진(張桭振) 등이 수집·간행하였고, 그 뒤 1853년 철종(哲宗) 때에 재간(再刊)한 것을 복사(復寫)한 것으로 보인다.
[형태/서지]
1권 1책의 활자본이다. 크기는 22.9×34.2㎝이다.
[구성/내용]
장필무의 행장(行狀)과 실적(實蹟)이 수록되었으며, 부록에는 임진왜란 때 활약하여 공을 세운 두 아들 장의현(張義賢)과 장지현(張知賢)의 행장과 만사(輓詞) 등이 수록되어 있다. 책머리에 송달수(宋達洙)의 「구례 장씨 유사 서(求禮張氏遺事序)」[1853]와 「장씨 사적(張氏事蹟)」, 「포음 선생 행적(圃蔭先生行蹟)」, 「상서공 행적(尙書公行蹟)」, 「판윤공 사적(判尹公事蹟)」, 「안동묘 향사문(安東廟享祀文)」, 「송계 선생 행적(松溪先生行蹟)」, 「암곡 선생 행록(巖谷先生行錄)」, 「사효재기(四孝齋記)」 등 장필무의 선조(先祖)에 관한 행적 등이 수록되었다. 책 끝에는 6세손 장진익과 장현(張絃)의 「사적 추록(事蹟追錄)」과 사간(司諫) 강시환(姜時煥)의 「병술 구보유사서(丙戌舊譜遺事序)」[1826]가 수록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백야유사』는 명종 대 명신(名臣)의 한 사람으로서, 무주에 거주했던 장필무의 행적과 임진왜란 때 큰 활약을 펼친 두 아들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는 유용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