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T01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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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최도범 할아버지의 家族과 親戚 이야기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노봉마을 |
집필자 | 서정섭 |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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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도범 할아버지
최도범 할아버지의 연세는 74세로 계유생(1933년)이다. 태몽은 특별한 것이 없다. 다만 탯자리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는 태어날 때 목에 흰 줄(탯줄)을 감고 나오면 구육(狗肉, 구탕, 보신탕)을 안 먹으면 좋다는 말이 마을에 전해오고 있다.
최도범 할아버지 부친의 성명은 최성술(成述)[삭녕최씨]이고, 모친은 최수모(秀模)[경주최씨]이다. 부모가 같이 최씨이지만 본관이 서로 다르다. 아버지는 삭녕 최씨인데 이곳 사람들은 줄여서 삭최라고 말하고, 어머니는 경주 최씨인데 경최라고 말한다.
삭녕(朔寧)의 원래 지명은 삭읍(朔邑)인데 지금은 북한 땅이다. 삭녕은 경기도 연천군과 강원도 철원군 일부 지역을 차지했던 지명이다. 원래 고구려 소읍두현인데 통일신라 경덕왕이 삭읍으로 고쳤고, 1106년에 승령현 감무를 겸하여 삭령으로 고쳤다. 조선 1414년(태종 14)에 안협현을 합쳐서 다시 안삭군이 되었다. 1914년 일제에 의해 군이 폐지되어 내문면, 인목면, 마장면은 강원도 철원군에 속하고, 나머지는 연천군에 병합되었다.
삭녕 최씨의 집안 내력
삭녕 최씨의 집안 내력을 잠깐 살펴보자. 삭녕 최씨(朔寧崔氏)는 고려 때 평장사를 지낸 최천로(崔天老)를 시조로 하고, 어모장군으로 낭장을 지낸 최선보(崔善甫)와 경전부사를 역임했던 최연을 각각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낭장 선보(善甫)의 아들 충(忠)이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충의 아들 윤문(潤文)은 우찬성을 역임하였으며, 윤문의 셋째 아들 사유(士柔)가 춘추관 기사관을 역임한 후 장흥고사(長興庫使)를 거쳐 노인직(老人職)으로 지승문원사에 올랐다. 그의 아들 항(恒)은 삭녕 최씨 가문을 명문의 반석 위에 올려 놓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조선 초기 훈구파의 대학자로서 세조를 도와 문물 제도 정비에 큰 역할을 했다. 집현전 부수찬으로 정인지, 박팽년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으며, 집현전 교리(校理)로 오례(五禮)를 찬진했고, 집현전 응교(應敎)로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창제에 참여, 이어 『동국정운(東國正韻)』, 『훈민정음해례』, 『용비어천가보수』 등을 찬진했다.
역사, 언어, 문장에 능통하여 당대의 팔문장의 한 사람으로 명나라에 보내는 표전문(表箋文)은 거의 그가 담당하여 썼다. 또 최항(崔恒)은 수양대군을 도와 계유정난에 공을 세워 정난일등공신으로 책록되어 도승지에 올랐고, 형조, 공조판서, 예문관 대제학, 이조 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우의정 및 좌의정을 거쳐 두 차례나 영의정에 올랐다. 근면 성실하고 겸손을 바탕으로 한 그의 성품으로 40년 동안 벼슬길에 있으면서 한번도 탄핵을 받거나 외직으로 물러난 적이 없었으며, 저서로는 『태허정집(太虛亭集)』, 「관음현상기(觀音現相記)」를 남겼다.
최항의 장남 영린은 세조 때 예조참의를 지냈고 둘째 아들 영호는 성종 때 21세의 나이로 문과 급제하여 한림사재정감, 경차관 및 우찬성 겸 대제학을 지내 그의 자손들을 찬성공파 또는 경파라고 한다.
영린의 후손은 조선 말까지 관직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으며 7대에 걸쳐 등과하고 8봉군에 18명의 문장을 배출했다. 최영린의 아들 수진은 사헌부감찰 및 가평, 평해군수 등을 역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어 조야에서 크게 치하했다. 또 다른 아들 최수영도 학행이 뛰어난 선비였다. 연산군의 폭정에 항의, 부사직을 사임하고 향리로 내려가 여생을 보냈다. 그의 동생 최수웅도 충의정략장군, 좌통례 등을 지낸 후 낙향해 전북 남원시 사매면에 은거했다. 전북 남원과 임실 등지로 옮겨와 산 것은 7세 최수웅 때이다.
삭녕 최씨가 남원과 관련을 맺기 시작한 것은 최수웅 때이다. 최수웅의 손자 언수(9세. 정언)와 그의 후손(10세. 대사헌) 상중(11세. 호남 초유사), 연(12세. 좌윤), 유지(13세. 사간), 치옹(14세. 지평) 등은 대를 이으며 문과에 급제, "6대 등과"로 이름을 떨쳤다. 이 가문은 10현 8한림 5대 진사를 배출했다.
이들 가운데 최연은 선조 36년(1603년) 문과에 급제했으나 광해군의 폭정에 항의, 벼슬을 버리고 남원에 은거했다. 인조가 즉위한 뒤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이 나자 아우 온과 함께 의병대장이 되어 공을 세웠다. 인조 14년 병자호란 때는 승지로서 왕을 남한산성에 호종했다. 후에 한성좌윤에 제수되었으나 잠시 있다가 퇴임, 귀향했다.
노봉마을은 삭녕 최씨의 500년 세거지로 유명하다. 처음 마을을 세운 최수웅은 세조 때 명신 최항의 손자다. 그의 5대손 최온이 폄재라는 호를 사용하여 그의 집안은 세칭 폄재 집안으로 불렸다. 폄재 최온(崔薀)[1583~1659]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휘숙(輝叔)이고, 호는 폄재(砭齋)이다. 사간 최상중(崔尙重)의 아들이며, 증 이조판서 연의 아우이다.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 때 대북파의 전횡으로 벼슬을 단념하고 은퇴하여 성리학에 전심하였다. 인조반정 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능참봉이 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이괄(李适)의 난 때에 형 연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가 난이 평정되자 해산하였으며, 병자호란 때에도 이흥발(李興浡)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재행(才行)과 학식을 겸비하였고 성품이 강직하여 언관(言官)의 직책에 적합한 인물이라는 평을 받았다. 남원의 노봉서원(露峯書院)에 제향되었다.
노봉마을을 배경으로 한 대하 예술소설 혼불의 작가 최명희는 최수웅의 17대손이며, 그의 아버지 최성무는 일본 동경교대 유학을 했던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어머니는 전남 보성군 득량면 출신으로 재야의 사상 철학자이자 한학자인 허완의 장녀다.
최명희 작가나 최도범 할아버지도 다같이 법 범(範)자 항렬이지만 범자 항렬로 해서 12대 선조이신 폄재공 온자 위함이신 분이 내직으로도 많이 있으셨지만 나중에는 순창 군수로 나가게 되었다. 순창 군수로 있으면서 한동안은 종가가 순창에 있어 주로 순창 관할에서 살았고. 순창군 동계면 소재지 감밭이라고 하는 데 종가가 있었다. 최도범 할아버지 집안은 그 밑에 관전이라는 곳에서 살았다. 종가와 지손들이 각자 분가를 하였다.
폄재공은 무생남녀(無生男女) 하여 후예가 없었다. 폄재공 배위는 흥선[지금은 흠덕] 장씨 할머니이신데 무생남녀하셨다. 그래서 폄재공 할아버지 중시의 작은 자제를 폄재공 앞으로 입양을 하였는데 그 분의 휘함은 유 자, 지 자, 유지이시고, 호는 간호공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여기에서 사셨다고 한다.
그동안 순창에서 주로 사시다가 노봉서원 훼철령이 내리니까 현재 종손인 최강원 박사 고조부님이신 병 자, 원 자, 그 분이 노봉마을을 내왕을 하시면서 그 당시에는 서원을 훼철했다고 거짓 말씀을 하시고 이영을 한 장씩 엮어오게 해서 서원의 기와를 싹 덮어놓고 대원군 섭정 시절을 모면하셨다고 한다.
그 뒤에 어느 정도 완화가 되니까 서원은 어차피 훼철령이 내렸으니까 그 뒤에 바로 오셔서 주택을 마련하셨다. 서원터는 공공 건물이기 때문에 함부로 쓸 수가 없기 때문에 공터로 남아 있고 그 앞으로 조금 나와서 현재의 종가 몸채를 지었다고 한다.
그 이전에 노봉마을에는 현재 혼불문학관이 건립되어 있는 곳에도 마을이 있었다. 그곳을 전방촌이라고 했었는데 이 전방촌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명확히 말해준 분이 안 계셨다. 한동안 전언 전설에 의하면 타 성씨들 가운데 연세가 많으신 분들의 말씀이 오로지 전(專) 자에, 꽃다울 방(芳) 자라고 말씀을 하셔서 그런 줄만 알았었는데 노봉 최씨 사적을 더듬어 보니까 폄재공 할아버지의 장조카 휘함이 빛날 휘(輝) 자, 갈 지(之) 자 이 양반이 전방이에 와서 서원 관리도 하고 사셨다고 되어 있다. 물론 이 분은 노봉서원에 배양이 되기도 했었지만 그 전에 전방촌에서 사셨다고 한다.
그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 곳은 오로지 꽃다웁다. 이곳은 오직 꽃다웁다. 이 장소가.” 그래서 오로지 전(專) 자에, 꽃다울 방(芳) 자를 써서 전방촌이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최씨 일가들 사이에서도 인(人) 변을 붙여서 전할 전(傳) 자라고 해야 말이 된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오로지 전(專) 자에 인(人) 변을 붙이면 전할 전(傳)이 되어서 '오로지 이 꽃다운 땅을 후손에게 전한다'라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과 청년기
최도범 할아버지는 이곳 노봉마을에서 사매소학교를 다녔다. 왜정 때 소화 16년(1940)에 입학을 했는데 소학교를 다닐 때는 왜정 말기 대동아 전쟁이 극심할 때라 5학년 2학기까지만 다녔다. 그래서 8·15 광복을 맞이해서 몇 달을 더 다녀가지고 1946년 7월 28일에 졸업을 했다.
최도범 할아버지가 학교 다닐 때 선생님들은 일본인들이었는데 교장 선생님은 일본 재향군인 출신인 다이다매 사부로[新井三郞]였고, 교감 선생님을 부교장(후꾸고쪼)이라고 했다. 그 당시는 1학년에서 6학년까지가 전부 2개 반이 아니고 단 학급, 1학급이었다. 그가 입학하기 바로 전부터 1, 2반으로 나뉘기 시작했고 1반은 45-50명 내외였다.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재향군인 오장 출신인 미소구찌였고,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조선인인데 군산 사범 출신인 여선생 오까미스이다. 그를 주로 가르친 사람은 미소구찌인데 주로 일본놈들이 그들을 훈련시킬 요량으로 그랬던 것으로 보이고 지금 생각해보면 미소구찌의 나이는 삼십은 훨씬 넘고 사십 안쪽이었다고 생각된다.
최도범 할아버지가 학교 다닐 때 기억나는 일은 다음과 같다.
“기억나는 일은 별로 없는데 사매소학교를 다닐 때 학교에 전답이 있었어요. 논인 답은 덕과면 쪽에 있었고, 밭인 전은 학교 부근에 있었는데 주로 채소를 길러서 선생들에게 부식으로 주곤 했던 것 같아요. 논에는 나락을 심어서 그 시절 정부에서 가져가고, 선생들 식량으로도 썼을 것이고, 3학년 아동들은 토끼를 기르는데 풀 심부름을 했었답니다.”
가족 관계
최도범 할아버지의 가족을 소개해 달라는 이야기에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우리 가족은 아내하고 3남 2녀예요. 큰 아들놈은 75년에 6사단 발칸포대에서 근무하다 순직을 했어요. 둘째 놈은 전북대 문리대 국문과 출신인데 지방공무원 시험을 봐가지고 전주시청에 근무하다가 지금은 전북도청에서 근무합니다. 막내는 경희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지금도 고시 준비를 하고 있어요. 딸은 2명을 둬서 다 에워서(시집을 가서) 잘 살고 있어요.”
할아버지의 형제분들은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에 “내 형제는 5형제인데 내가 셋째예요. 큰형님은 왜정 시절에 일본을 가셨다가 일본 동경에서 작고하셨고, 4형제가 마을에서 살다가 둘째 형님은 작고하시고 조카 4명을 뒀는데 다 서울, 수원에서 살고 있어요. 내가 셋째고, 바로 밑에 남동생은 초등학교 교사생활 30년 하다가 전주에서 살고 있죠. 막내 동생은 우리 마을의 바로 이웃에 살고 있어요. 농사 지으면서 살고 있어요. 우리 집을 들어오다 보면 바로 앞에 있죠.”라고 말한다. 이어서 “어머님은 경주 최씨 경최인데 외가는 순창군 인계면이죠. 아버님 중매는 누가 했는지 모르겠고, 조부님 때 우리는 순창군 동계면 관전에 거주했었죠. 바로 이웃이었고, 처가는 남원 시내 남원농고 뒤인데, 아내의 이름은 우부남, 단양 우씨예요.”라고 한다.
친척간의 교류는 정기 모임을 한 차례씩 하고 묘사시에 만나고 하여 일 년에 한두번씩 만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당내지간(堂內之間)이라고 하면 3종을 벗어나면 면복을 해버리고, 4종, 5종까지도 말은 당내지간이라고 말을 합디다만은 그 바로 3종을 전후로 해서 3종간이나 재당질 이런 사람들이나 말하는데, 모두 서울이나 여기저기 흩어져 살기 때문에 내가 우리 종생들을 보고 하는 말이 우리가 이럴 것이 아니라 1년 1차에 가을의 묘사시뿐만 아니라 친목 도모를 위해서 20여 호 전후밖에 안되지만 몇 해 전에 구상을 해가지고 말을 했어요. 그래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하자 해서 모이고 있어요. 당내지간에 정기총회를 합니다. 나 살아 있는 동안에 누가 누군지 알아야 한다, 모르면 물어보고 해야 할 것이 아니냐, 문서만 보고 족보만 보고서는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으니까 얼른 이해가 안간다, 그래서 모이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가을 묘사시에도 직장에 매인다고 핑계를 댈 수는 있지만 우연만(웬만만) 하거든 그때는 꼭 참견을 했으면 좋겠다 해서 많이 오는 놈은 일년에 두 번 오고 적게 오는 놈은 한번 오고 그럽니다.”
통과의례
연령과 성별에 따른 일상복(옷, 모자, 신발 포함)의 종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옛날에 남자 어린이는 무명하고 삼베옷을 입었죠. 경제상 넉넉하지 못하니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80% 정도는 삼베 등걸이, 잠벵이(후에 일본어로는 빤스라고 했죠)를 입고, 겨울에는 무명베에다 겨우 어린애들은 10세 미만까지는 보통이면은 돌띠를 해서 접저고리를 하거나 조금 윤택한 사람은 솜을 속에다 넣어서 돌띠를 했어요. 돌띠는 애기들이 옷고름을 못 매니까 몸을 한 바퀴를 돌렸어요. 몸을 돌리니까 돌띠라고 했어요. 어린애들은 어른들 바지, 마고자 이런 것이 떨어진 것을 끊어서 쓰고 했지요.”
그리고 젊은이들의 남녀간 의상은 바지 저고리이고, “노인들은 여름에는 삼베를 해서 중우 적삼이제 뭐 특별한 것이 있나. 명일이나 나들이할 때는 두루마기이고 선비들은 도포지.”라고 말한다.
아이가 태어날 때는 어떤 옷을 준비했었느냐는 말에 “출생(유아)시의 의복은 철 따라서 여름에는 특별한 것이 없고 어린애는 77, 49일 이전에는 특별한 의상을 해 입힐 수가 없었고, 그런 이후에는 여름에는 시원하기만 하면 됐고 겨울에는 보온만 잘 해주면 됐다. 해방 직후에는 가지베가 나와서 가지베를 해서 기저구를 썼지만 그 전에는 무명으로 주로 했다. 특별한 것이 없었다. 당시에 어린아이들이 입는 배냇저고리는 좀 있는 집에서나 하는 것이지만 서민층에서는 배냇저고리라고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언니가 입던 것 물려받아서 입었다. 배냇저고리는 배안엣 저고리다, 태내에 있을 때 남자든 여자든 태내에 있을 때 마련한다고 해서 배안엣 저고리다. 애기를 낳기 전에 준비를 해놓다.”라고 말한다.
임신 금기
임신시에 피하는 음식은 특별히 없다고 말한다.
“경제가 어느 정도 넉넉한 사람은 좋게 좋게만 했을 테지만 빈곤한 사람들은 무엇을 특별히 마련하겠어요? 지금이니까 그렇지 나 어려서만 해도 두구질(도구통질)을 해서, 쌀보리도 귀해서 겉보리, 대맥 그놈 도구통에다 그냥 꾹꾹 찧어서 시간은 없고 긴박하니까 그 놈 삶아서 웃묵에다가 찬물 한 그릇 뜨고 미역국을 끓일 만한 경제가 되면 미역국도 끓인다고 합디다만은 미역국도 못 끓여 놓는 사람도 있었잖아요.
그러면 찬물 한 사발, 보리밥 한 사발 갖다 놓고 성조에다가 비는 거요. 내 자손 내 자식 건강하게 잘 크도록 돌봐주십시오 하고 갖다 놓는 것이 성조상이요. 보통은 성주상 성주상헌디 성조상이요. 삼시랑, 삼시랑이지.
삼신님께 애기를 태어나서 낳게 해줘서 고맙다고 하는 것이 첫 국밥이죠. 미역국에다 밥을 차려놓은 것이 삼신랑이여. 삼신은 환웅과 머 그런 신이지. 그런디 고려 때부터 없어진 것이여.”
임산부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자 꺼리는 듯해서 처음에는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임신했을 때 피하는 음식이 있느냐는 질문에 처음에는 임산부가 피해야 하는 음식이 별것 없다고 말하기를 꺼려했다. 아마도 유교적인 의식이 매우 강해 남자가 여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니까 탐탁지 않게 여겨 말을 꺼린 것 같았다. 임산부가 먹고 싶으면, 입에서 당기면 당긴대로 먹으면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야기가 무르익어가자 보신탕, 탉고기, 오리고기를 먹지 말고, 부침개도 부치지 말고, 깨도 볶지 말아야 하며, 부엌의 아궁이를 고치지 말라고 말한다.
“음식 금기도 물론 있죠. 어느 누가 보신탕을(마침 오늘 구로계에서 보신탕을 먹어서) 그렇게 좋아할 사람이 있을란가는 모르겠습니다만은 어린애 나놓고 혈기가 이렇게 허는디 내가 보신탕 먹어야겄다 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요. 그러니까 어린애 나놓고 개고기 먹어야겄다 허는 사람은 없은개 그런 것은 가리되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이나 현 상황이나 다를 것이 없겠지만 다음은 어느 정도 한 집에서는 애기 낳기 전에 소고기 한 3-4근 사다 달아놓고, 한 단 사다놓고 미역국에다 소고기 넣고 끓여먹어 몸을 보하는 사람도 있습디다. 내 집안의 일이라 내가 알지 어린애 낳은 남의 집을 가 볼 수도 없지, 그런개 남의 집 일은 어떻게 알겠어요.”
“닭고기도 먹지 마라고 하지요. 피부가 닭살처럼 돋는다고, 거칠어진다고 못 먹게 하지요. 또 오리고기를 먹으먼 손가락 사이가 이어진다고 못 먹게 했어요. 또 임신 중에는 아궁이를 절대로 못 뜯어 고치게 했어요. 왜냐하면 애기를 째보를 낳는다고 해서 그랬어요. 그런가 하먼 두드러기 난 것처럼 물집이 일어난다고 해서 깨도 못 볶게 하고 적도 못 붙이게 했어요.”
“아궁이를 손대고, 아궁이 문을 손대고, 흙을 다루지 마라 그랬어요. 흙을 다루지 마라는 것을 한방에서는 동토증이 난다고 했지요. 그러먼 출산모가 순산을 못하고 난산을 한다고 해서 그런 것이죠.”
그리고 노봉마을은 설날 엿을 만들어 먹는 풍습이 있는데 이때를 염두에 두면서 임산부는 젖이 잘 나와야 하는데 “산부인한테 가장 기피하는 음식은 엿질금 들어가는 음식이요. 엿질금은 기피했어요. 왜냐하면 엿질금이 들어가면 젖이, 산유량이 떨어져 버려요. 그래서 엿질금 음식은 절대적으로 피했어요.”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자 옆에서 듣고 있던 최강윤 할아버지께서 태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산모한테는 주의 사항이 많죠. 소학에도 회임을 했을 때 높은디, 뾰쬭한 데 딛고 일어서지도 말라, 무도 삐뚤어진 것은 먹지 말라, 뭐 이런 것을 말했죠. 이런 것은 태교로서 그렇게 했죠. 요새도 태교는 절대적으로 필요하지요. 임신 중에는 음악같은 것도 산란하고 음산한 것 이런 것은 안 듣고 그렇잖아요. 현대과학으로도 태교를 아주 중요시하고 있어요.”
그러자 최도범 할아버지께서는 남자의 태몽이 중요함을 이야기 한다.
“태교는 여자 쪽으로 하는 것이고, 남자 쪽으로도 태교를 가질 수 있는디 꿈을 잘 꿔야 해요. 내가 노봉에서 누구라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생존자로 해서 태몽이 맞는 사람이 있어요. 제대로 태몽을 한 사람은 60% 이상은 맞아 들어가요. 태몽을 잘 흐먼 대인을 낳아요.”
의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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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돌담길. 혼불문학관이 생기면서 마을 길이 포장되었다.
의례복 중 회갑 옷은 특별히 한복을 장만하였고 당시의 축하 선물은 흰 고무신이 들어올 정도로 형편들이 어려웠다고 한다.
“회갑연은 8·15 광복 이후에는 확실히 알 수가 있지만 광복 이전에는 별로 아는 바가 없어요. 내가 직접 뵈옵고 가서 하다못해 과자라도, 산자라도, 밥상이라도 하나 얻어먹은 시절은 1930년 이전에 그 무렵에는, 전북대학교 교수로 있다가 퇴직한 최승범 교수님 할아버지 회갑년에 제가 한번 과자 얻어먹으러 가봤어요. 그 시절에는 회갑년을 지내신 분이 별로였어요. 없었어요. 그렇게 수명이 짧었다는 것이지요.”
“최승범 교수 할아버지 회갑연만 해도 잘 지내셨어요. 우리 마을에서만 해도 요호(饒戶)마을(살림이 넉넉한 집이라는 의미) 소리 들었어요. 그 양반 자제가 3형제 분이신데 큰 자제나 둘째, 셋째 다 넉넉하게 살으실 정도이셨어요. 그런데 그 시절에만 해도 흰 고무신이 선물로 들어왔어요. 최교수는 잘 아실 테지만. 그런개 동네 사람들이 구경을 갔던 사람들이 비교적 가난한 사람들이었지. 얻어먹으러 갔던 사람들이었지 그 어른 회갑연을 축하하러 갔던 사람들은 별로 없었거든. 그러니까 축하보다는 얻어먹는 데 관심이 더 있었다는 이야기이지. 축하하러 갔었지만 별로 헐 말이 없고 '아이구, 영천어른 회갑에 흰 고무신이 들어왔어.' 다들 그래쌓더라고. 내가 그때에 코흘리개고 얻어먹으러 다닐 때였어. 사매소학교 입학하기 이전인개.”
나이 오십 전후가 되면 수의를 장만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살림살이가 넉넉한 경우에 수의를 장만하지만 어려운 사람은 수의를 장만하기는커녕 관도 마련하지 못해 대발에 쌓아서 장례를 치르기도 했다고 한다.
“수의의 장만은 지금 사회에서도 그렇지만 그 시절에는 부모님이 벌써 연세가 50이 넘고 60이 근(近)하면은 윤삭, 공달을 챙겨서 공달 들던 해에 나이는 고사하고 비교적 수의를 많이 장만해서 간직했어요. 없는 사람은 여유가 없기 때문에 미리 수의를 장만해놓지를 못해요. 그것도 살림이 요적한 사람이어야 하지.”
“지금이니까 석관이네 뭐이네 허지만은 목관도 그렇고 수의도 그렇고, 생활정도가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사람들 말이제. 참으로 빈곤에 빠진 그 사람들은 수의는커녕 목관 하나만 장만해 놓으려해도 큰 맘을 먹어야 해요. 나 알기로만 해도 그래요.”
“해방 이후로도 그렇고 해방 전에도 그랬어요. 내가 13-4살 먹어서 해방이 됐지만은. 그거 목관 하나만 장만할려고 해도 쌀 한 가마니값이 든다고 했는디, 쌀이 얼마나 귀했습니까? 쌀 한가마니면 논도 한 마지기 살 수 있었어요. 그때는 최고 싼 것이 왜놈들 중말엽에 왜놈들 화폐로, 논 한 마지기에 200원밖에 안 나갔어요. 할이로 사는 경우에는 경작자가 별로 없어서 100원 내지 80원, 할이라는 것은 선이자 아닙니까? 그런 정도로 했어요.”
“돈은 쌀하고 해서 어떻게 비례가 되는지는 몰라도, 아, 우리도 너 마지기 한 벰이짜리를 그냥 두 가마니씩에 다 팔았그만 그냥. 그러니까 논 너마지기를 쌀 여덟 가마니에.”
“여유 있는 사람이 수의도 장만해놓고 아들도 글도 잘 하고 먹는 것 사는 것 풍족한 사람들은 관까지 편성해놓아요.”
“아까 쌀 한 가마니 하지만은 관목 반쪽만, 소나무 통나무 반쪽을 쪼개면은 관 하나를 만든디, 그 반쪽만 해도 쌀 닷말이고, 그리고 그것을 목수를 사다가 관을 짤라먼은 몇이서 놉을 얻어가지고 해야지.”
수의를 장만하고 관을 미리 만들어 놓는 경우는 여유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아주 어려운 사람들은 초상을 치를 때조차도 관을 마련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한다. 없는 사람들은 대나무를 엮은 대발로 싸서 초상을 치렀다고 한다. 그런 경우를 대발쌈(대발엮음장)이라고 말한다.
“없는 사람들은 대발쌈도 해가지고 묻고 그랬어요. 대발쌈 한 사람들은 그렇게 불쌍한 사람들인디, 빈곤층인디 그런디 복은 그 사람들이 빨리 받아요. 불쌍한 사람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도우셨는지 부처님이 도우셨는지 대발쌈 한 사람들 중에서 최소한 10% 이상이 다 축복을 빨리 받아. 그러니까 그때부터 균등 사회로 생각했던가 봐요.
“옛날에는 상여를 못할 정도가 되면 지게장도 허고 또 아니면 대발엮음장도 허고, 지게송장을 헐려고 허니께 대발송장을 허는 것이지요. 나무 목관을 준비를 했다고 허더라도 상여 준비가 안 되면 지게로 짊어지고 가서 헌 사람도 있고, 그것도 안 된 사람은 그냥 대발로 엮어서 욱에다 대막가지를 허고 창호지를 발라가지고 떼메고 가서 허기도 하고 그랬죠.”
제례 때 의상은 보통 삼베옷을 입었다. 그러나 특별히 준비되어 있지 않고 갑작스럽게 초상을 치러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때는 깨끗한 옷을 입었다고 한다.
“제례 때의 의상은 평소에 입던 의상이라도 되도록 세탁을 해서 세탁물을 입고, 아죠 빈곤한 사람은 도포 자락 정도는 못 느려도 두루마기 정도는 입어야죠. 여름에는 도포 자락 맹이로 삼베를 느려서 그런 정도는 입어야죠. 그러나 평상복을 세탁해서 입는 것이죠.
상례 때의 의상은 초상 때에는 내관상, 외관상에 따라 왼쪽을 벗고 오른쪽을 벗고, 입관 후에는 삼베를 입죠.
초상 의복과 관련된 금기는 특별히 없어요. 초상은 문득 홀연히 생기는 것이요. 운명을 당해서 들에서 일을 하다가 갑자기 당하니까 초상의 의상에서 금기하는 것은 별로 특별히 없었죠. 작고를 하셔서, 당고를 하셨다면 너나할 것 없이 광목을 입고, 외관상에는 좌견, 내관상(어머니상)에는 우견 상의를 벗고, 입관 후에는 성복이 되죠.”
수정일 | 제목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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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18 | 2011년 한자 재검토 작업 | 1) 선보(善甫)의 아들 충(忠)이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충의 아들 ->선보(善甫)의 아들 충(忠)이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충의 아들 〇 선보(善甫)와 충(忠)은 인명이므로 태깅 처리함 2)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창제에 참여, 이어 동국정운(東國正韻), 훈민정음해례, 용비어천가보수 등을 찬진했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창제에 참여, 이어 『동국정운(東國正韻)』, 『훈민정음해례』, 『용비어천가보수』 등을 찬진했다 〇 서명ㆍ작품이므로 모두 서명ㆍ작품 표기함 3) 저서로는 태허정집(太虛亭集), 관음현상기(觀音現相記)를 남겼다. ->저서로는 『태허정집(太虛亭集)』, 「관음현상기(觀音現相記)」를 남겼다. 〇 서명ㆍ작품이므로 모두 서명ㆍ작품 표기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