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T03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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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日마을의 地理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백일마을 |
집필자 | 강정만 |
자연 경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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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마을 전경
먼저 산내면은 삼한 시대에는 마한에, 삼국 시대에는 신라 모산현(母山縣)[운봉현]에 속해 있었으며, 940년(고려 태조 23년)에는 운봉현 산내방으로 개칭되었다. 1413년(조선 태종 13년)에는 운봉현이 군으로 승격되고, 1897년에 방(坊)이 면(面)으로 개칭되면서 운봉군 산내면이 백일(白日), 대정(大井), 입석(立石) 등 29개 리(里)를 관할했다. 1914년(순종 8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운봉군이 면으로 되어 남원군으로 합병되면서 남원군 산내면이 되었다. 1995년 1월 1일 남원시·군 통합으로 남원시 산내면이 되어 현재 8개 법정리, 16개 행정리로 편성되었다.
B.C. 350년 경에는 마한의 별궁이 달궁에 있었다는 유래가 전하고 진한과 진한의 국경 지대가 되므로 정령치와 황령치에 성을 쌓아 침략을 막았다 하며, 서기 8년 삼국 시대에는 신라에 속했으나 주민들은 달궁에만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828년 신라 흥덕왕 때 창건한 실상사(實相寺)는 보물과 국보 13점을 보유한 명찰이다. 이러한 역사가 증명하듯이 실상사가 개창되면서 본격적으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취락의 기록이 전한 것은 임진왜란 때부터로 1592년(선조 25) 갑자기 일어난 왜란 때문에 도시 주민들은 모조리 깊은 산중으로 피난을 가게 되니 이곳도 피난민이 찾아들어 상황이나 횡치 등 깊은 오지부터 난민들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한편 지리산 일대는 예로부터 군사 요새지가 되었으니, 1950년 6·25 전쟁 때도 지리산은 빨치산의 소굴이 된 것을 보아도 군사상 요지임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산내면 소재지로부터 동부권(함양군 마천면) 방면 1.6㎞ 지점에 백운봉을 분기점으로 함양군 마천면과 경계가 되고, 군도 302호선이 백일과 저전마을을 관통하는 농로와 국가 지원 지방도 60호 함양 우회도로에 1일 백무동 직행, 9회 왕복과 함양군 군내버스 왕래와 시내버스 1일 4회 운행으로 대중 교통 수혜폭이 크다.
전라북도 산내면 백일리는 사방이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동쪽으로는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고 남쪽으로는 반야봉이 시야에 들어오며, 북쪽은 백운봉이 마을을 감싸고 있고 서쪽은 인월, 남원 방면으로 나가는 통로가 된다.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이며 마을 뒤로 울창한 숲이 있으며 앞은 시야가 넓은 전망을 자랑한다.
마을 경관
남원시에서 35㎞ 지점인 뱀사골과 백무동의 갈림길에서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백일리는 백운봉을 배후지로 하고 지리산 봉우리 가운데 하나인 삼정산을 마주 보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지리산 달궁에서 흘러나오는 만수천(萬壽川)이 흐르고 있는데, 이 하천은 낙동강 상류에 해당된다. 마을 뒤에 산이 있고 앞에 하천이 흐르므로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마을이라 할 수 있다. 백일리가 속한 산내면은 우리나라에서 첩첩산중의 오지 가운데 오지라고 할 수 있지만, 백일리는 남쪽은 벼농사를 지을 수 있는 평지가 꽤 넓고 시야가 트여 있으며, 동쪽으로는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이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장쾌한 경관을 자랑한다. 또 백일리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이어주는 길목에 있으므로 사통팔달의 천혜의 자연 환경을 가지고 있고,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을 대표하는 실상사(實相寺)가 바로 마을 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