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T03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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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김을생 할아버지가 들려 준 白日里의 由來와 歷史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백일리 |
집필자 | 강정만 |
김을생 할아버지는 백일리의 유래와 역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백일리의 유래는 실상사 창건과 불과분의 관계가 있어. 원래 이곳은 전인미답의 산중이었는데, 통일신라 말기 대가람 실상사가 우리 마을 앞에 창건될 때, 스님을 따라 들어온 속세의 사람들이 최초로 우리 마을에 정착했다는 전설이 있어. 실상사의 번창과 쇠락이 마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해.”
참고로 통일신라 헌덕왕 때 출생한 홍척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지장(智藏)에게 선법(禪法)을 배운 뒤 귀국하여 지금의 지리산 산내면 입석리에 실상사를 개창하고 선풍을 천양(闡揚)함으로써 독립된 하나의 종파를 이루었다. 이것이 이른바 구산선종(九山禪宗)의 발생의 시초가 되었다. 그 뒤 실상사가 보리달마를 개조로 하고 육조(六祖) 혜능(慧能)에 의해 크게 발전한 조계(曹溪) 선종의 최초 본산이 된 이후, 남원 지역은 한 때 한국 불교 조계종의 중심지가 되었다.
6·25’ 동란 때 뱀사골에 은거하고 있던 이현상의 ‘빨치산’ 부대가 산내 지서를 습격하자 군경이 달아나고 무고한 양민들이 희생된 비극이었어. 당시 ‘산사람’이라 불렀던 지리산 일대의 공비들은 야음을 틈타 마을에 내려와 양식과 가축을 약탈하는 일이 빈번했어. 낮에는 한국군이 소탕 작전을 벌이고 밤에는 군경과 주민들이 합동으로 경비를 섰지. 지금 생각해 보니 1953년 휴전 무렵에 ‘빨치산’의 활동이 정점을 이루다가, 1957년도 전후로 완전히 토벌된 것 같아. 지리산 자락에 깃든 마을치고 ‘6·25’ 동란의 참화와 좌우익의 갈등을 겪지 않은 마을이 어찌 있었겠소? "
"우리 마을 주민들의 조상은 대부분 여기저기서 난을 피해 들어왔기 때문에 세거 성씨는 없소. 몇 년 전 문화관광부차관을 지낸 박문석씨가 마을 출신 가운데 최고위직에 오른 인사라고 할 수 있을 거야. "
"백일리는 북서쪽으로는 중황리(中黃里)와 대정리(大井里), 남쪽으로는 입석리(入石里), 동쪽으로는 경상도 마천면(馬川面)과 각각 인접해 있소. 입석리에는 실상사가 있고, 대정리에는 백장암 내의 3층 석탑[국보 제10호]이 있소. 네 마을 모두 실상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이오. "
"산내면은 사방이 고산준령으로 둘러 쌓여 있기 때문에 자고로 외부와의 통행이 크게 불편하였소. 행정 구역상 남원에 속해 있으므로 남원 방면으로 가려면 먼저 인월(引月)로 나가야 하오. 내가 어렸을 적만 해도 인월로 나가는 길은 버스는 고사하고 소달구지도 지나갈 수 없는 산길이었지. 오로지 걸어서 가는 수밖에 없었어. 또 달궁 계곡을 따라 적령치를 넘어 주천면(朱川面)을 거쳐 남원으로 가는 길이 있었는데, 이 길은 워낙 험하고 산짐승이 우글거리는 곳이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용하지 않았어. 산내면 동쪽으로는 경상도 마천과 이웃하고 있는 데, 옛날에는 전라도 인월로 나가는 길보다 오히려 경상도 마천으로 나가는 길이 더 편했어. 마천과는 한 마을이나 다름이 없었으므로, 산내 사람들은 마천을 거쳐 함양으로 나가는 일이 많았지. "
"지금은 사통팔달인 세상인 지라, 백일리에서 왕복 2차선 도로를 따라 인월, 마천, 뱀사골 등 어느 방향으로도 쉽게 나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어. 마을의 노인들은 주로 함양과 인월을 오가는 버스 노선을 이용하여 밖으로 나가지. 젊은 사람들이야, 자가용을 갖지 않은 이가 아직도 있겠어? "
김을생 할아버지 개인연표
1935년 / 남원시 산내면 백일리 출생
1950년 / 남원중학교 입학
1951년 / 전라목기기술중학교 입학
1955년 / 전주공업고등학교 졸업
1958년 / 육군 소위 임관(공병대)
1960년 / 서순자와 함양 읍내에서 결혼
1964년 / 육군대학 졸업, 대위 진급
1970년 / 금호공예 가업 계승
1994년 /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지정
1996년 / MBC 인간시대 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