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T03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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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배종수 할아버지의 家族과 親戚 이야기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백일마을 |
집필자 | 강정만 |
출생과 청년기
"올해로 일흔 일곱이므로 1930년 생이야. 본관은 김해 배씨(裵氏)이고 조상 대대로 경남 합천에서 살았어. 할아버지 때 백일리로 이주했다고 해. 할아버지께서 합천에 살 때 어떤 친척이 고조부 묘 옆에다 몰래 묘를 쓴 일이 있었대. 그 일로 고향에서 크게 싸우고 이곳으로 이사 왔다고 들었어. 나는 여기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지내왔지. "
"해방되기 바로 1년 전인가? 1944년에 산내국민학교를 졸업했어. 졸업 직후 서울로 올라가서 일본인 회사에서 급사 노릇을 하다가 해방된 후 고향으로 내려왔지. 고향에서 몇 년 지내다가 김제군 금산중학교에 진학했어. 그 학교가 불교 학교잖아. 부모님이 독실한 불교 신자였고 실상사 스님들을 섬기며 살았기 때문에, 그 인연으로 당시로선 먼 거리인 김제까지 유학을 간 거야. 아마 지금은 교명이 금산상고로 바뀌었을 거야. 내가 바로 금산중학교 1회 졸업생이야. 초등학교 다닐 때의 다께시마 선생이 생각나고, 중학교 은사이신 남두희 영어 선생도 떠오르네. 원평에 사는 중학교 친구 김봉섭이를 50년만에 만난 적도 있었어. "
"학창 시절 잊을 수 없는 사건은 ‘여순반란’ 사건 때 빨갱이들에게 총을 맞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일이야. 지금도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사지가 발발 떨려. "
참고로 ‘여수·순천 10·19사건’이라고도 하는 ‘여순반란’ 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4연대가 일으킨 반란 사건이다. 1948년 제주도에서 이른바 ‘제주 4·3사태’가 확산되자,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제14연대를 급파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지창수, 김지회 등의 좌익계열의 군인들이 중심이 되어 출동을 거부하고 친일파 처단, 조국 통일 등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19일 밤 8시 경 무기고와 탄약고를 점령하고 비상 나팔을 불어 전 연대 병력을 집결시킨 뒤 선동과 위협으로 반란군에 동참하게 했다. 곧 여수 시내의 경찰서와 관공서를 장악하고 여수, 순천을 순식간에 휩쓴 뒤 광양, 곡성, 구례, 벌교, 고흥 등 전라남도 동부 5개 지방을 장악해나갔다. 초기 진압 작전에 반란군에게 밀리자 정부는 여순 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광주에 설치한 반군토벌전투사령부의 지휘로 제2여단, 제5여단 예하의 5개 연대를 투입, 소탕 작전을 벌였다. 이들 정부군은 미국 군사고문단의 지휘아래 장갑차, 박격포 등을 동원해 여순 지역 탈환에 성공했다. 그때 반란군들이 대부분 토벌되었지만, 일부 잔당들과 좌익 세력들이 지리산으로 숨어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전개했다.
"아마 1948년 겨울일 거야. 겨울 방학을 맞이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여순반란’ 사건 때 쫓긴 빨갱이들이 지리산 일대로 숨어들어 반선의 뱀사골 계곡에 진을 치고 있다는 거야. 잔당을 토벌하기 위해 3연대 소속의 이광식 중대장이 국군들을 이끌고 실상사에 왔어. 실상사가 빨갱이 토벌대 본부가 된 셈이지. 그런데 국군들 중에는 김제 출신의 병사들이 꽤 있었어. 김제 사람 최아무개 일등중사가 내가 김제 금산중학교 학생이라는 것을 알고 우리 집에 자주 왔어. 하루는 마천 방면에서 빨갱이들이 나타났다는 첩보를 듣고 실상사에 주준하고 있던 국군들이 출동했지. 그날 밤 나는 출동하지 못한 병사들과 실상사 경내에서 잠을 자고 있었어. 한 12시쯤 되었을 거야. 갑자기 밖에서 ‘탕, 탕’ 총소리가 들렸어. 다들 놀라 밖으로 나오니 실상사 담벼락 쪽에서 빨갱이들이 ‘누구야!’ 하고 소리를 질렀어. 그때만 해도 학생이라면 살려주었으므로, 내가 ‘학생인데요, 살려 주세요’라고 대답했어. 그런데 갑자기 앞에서 일제히 사격하는 소리가 나면서, 함께 나왔던 사람들이 쓰러지고 말았어. 총을 맞으면 남자는 앞으로 쓰러지고 여자는 뒤로 쓰러진다고 해. 나도 앞으로 꼬꾸라졌는데 오른쪽 가슴 부위가 마비되는 느낌이었어. 정신은 잃지 않았어. 한참을 땅에 누워있는데 갈증이 너무 나는 거야. 새벽 5시쯤인가, 스님이 물을 뜨러 간다고 하는데 나는 무서워서 도저히 못 나가겠어. 그때 내가 살려는 운수였나 봐! 갈증이 나서 물을 마신 사람은 아침에 다 죽었어. 총상을 입으면 절대 물을 마시면 안 돼! 날이 밝자 군인들과 마을 사람들이 달려오더구만! ‘종수가 총맞았어’라는 소리가 들리데. 군인들이 나를 지금의 산내중학교 자리에 있었던 야전 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응급 치료를 해 주었어. 실상사에서 누군가 이불솜으로 내 상처 부위를 틀어막아서 요행히 지혈이 되었기 때문에 내가 살아남았다고 해. 그 뒤 전주에 있는 예수병원으로 가서 페니실린을 맞고 한 달 만에 나았어. 여기 봐! 이게 그때 생긴 흉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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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 전경
"왜정 때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서울로 올라갔어. 큰누님이 옥수동에 살고 있었거든. 누나 소개로 애국섬유주식회사에 급사로 취직했어. 오히라 겐지라는 왜놈이 사장이었어. 해군의 지정 공장이었기 때문에 규모가 상당했지. 지금의 애경유지가 바로 그 회사의 후신이야. 또 조선중기주식회사를 잠시 다니며 시흥, 안양 등지를 자전거를 타고 오가며 전령 역할을 했지. 그때가 ‘대동아전쟁’이 한창인 때라 회사에서 보급대 생활도 했고 탄약고를 지키기도 했어. 해방 후에 고향으로 내려왔어. 한 2-3년 집에서 빈둥빈둥 놀다가 금산중학교에 늦은 나이로 입학했지. 중학교 3학년 때 ‘6·25’가 터졌지. 김제에서 산내면까지 걸어왔어. 수복 후에 빨갱이들이 지리산에서 기승을 부렸잖아. 나는 낮에는 마을에서 생활하다가 밤에는 마을 뒷산에 파놓은 참호에서 마을을 지켰어. 이현상 부대가 한창 위세를 부렸을 때 내 친형(배종석)이 방위군 전신인 호국군 중위였어. 형님이 산내면 빨갱이 토벌에 앞장섰는데, 1.4 후퇴 때 지금의 산내중학교 앞의 고지에서 전사했어. 나이 25세의 젊은 나이에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후손도 남기지 못하고 죽은 거야. 형님이 부하들을 친동생처럼 돌보고 마을 일이라면 항상 적극적으로 나서서 했대. 6·25 때 실상사와 약수암이 불에 안 탄 이유는 순전히 형님의 노력 덕분이었어. 국군들이 마을 사람들을 소개시키고 마을과 절에 불을 지를 때 형님이 적극적으로 만류했다고 들었어. 나도 그때 형님을 따라 다니면서 마을 치안을 담당했지. 205부대, 203부대, 경찰 부대 등이 빨치산 토벌을 했는데, 경찰들은 싸움을 잘 못했어. 심지어는 자기들 총을 인부들에게 짊어지게 하고 산에 올라 갈 했을 정도였으니 기강이 얼마나 해이했는지 알만하지 않겠어? 그때 경찰 부대는 ‘검은 개’, 국군은 ‘노란 개’라고 불렀던 기억이 나. 경찰 제복이 검은 색이고, 군복이 노란 색이었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생긴 거야. 11사단이 남원에 들어와 빨갱이들을 본격적으로 토벌했는데 군인들이 산내면에 와서 젊은 사람이라면 무조건 잡아 광주로 끌고 가서 성분 조사를 했는데, 돌아가신 형님과 친분이 있었던 사람은 모두 살아나왔어. 어떤 마을 사람은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해 몇 년 동안 우리 집에 ‘이바지’를 해 왔어. 자기 자식 살려 주었으니 해마다 잊지 않고 음식을 장만해 온 거야. "
혼인
"집사람(강옥순)을 중매로 만나 백일리에서 구식 결혼했어. 처가가 마천이야. 아들 넷에 딸 둘을 두었어. 막내아들(배진영, 33세)만 빼고 다 시집, 장가갔어. 큰딸(배미자)은 51세, 둘째딸(배미란)은 47세, 큰아들(배진성)은 42세, 둘째아들은 배진우이고, 셋째아들은 배진용이야. 다 타지에 살아. 명절 때나 한 번 씩 모이지 뭐. 다들 자식들 키우고 먹고 사느라고 바쁘지. "
통과의례
"내 회갑, 칠순잔치 모두 자식들이 해 주었어. 다들 효자, 효녀들이야. 손자, 손녀들의 돌잔치도 우리 내외가 대부분 참석했어. 가족이 함께 모여 잔치를 벌이고 식사하는 즐거움이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이 아니겠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