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T04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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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碑前 마을의 歷史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 |
집필자 | 장미영 |
마을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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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대첩비와 보호각
비전마을은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209번지에 위치해 있다. 비전마을은 본래 운봉의 서면 전촌리(前村里)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전촌리(前村里), 옥계리(玉溪里), 소석리(小石里) 일부가 병합되어 화수리(花水里)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로는 군화동(軍花洞)이 있다.
비전마을은 마을 앞에 비각(碑刻), 즉 황산대첩비각(荒山大捷碑閣)이 있어서 비전(碑前)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비전마을은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이바지한 곳이다. 황산대첩비는 왜구를 황산벌에서 크게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승전비다. 이성계는 황산대첩 다음해 이 마을을 다시 찾아 손수, 1년 전 황산의 왜구들을 물리치고자 전의를 불태운 이곳 자연암석에 당시 참가했던 장수들의 이름을 새겼다고 전해진다.
황산대첩비각은 고려 우왕 6년(1380년), 태조 이성계의 황산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조선 선조 10년(1577년) 운봉현감 박광옥이 세웠다. 이 대첩비는 일제시대 일본에 의해 파괴되었다. 현존의 비각과 비석은 8·15광복 후 1957년 10월 27일에 다시 재건한 것이다. 운봉 현감은 이 대첩비각을 세운 후, 참봉과 몇 사람의 관원으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였는데, 이에 그 식솔들이 모여 살게 되었고 그 후에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서편에 하마정이 있어 말을 탄 관리가 황산대첩비각을 지날 때면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는 이곳에서 말을 내려 걸어와 비 앞에서 절을 하였다고 하는데, 이곳에는 구한말까지 2층 정자가 있어 주변 주막의 기녀(기생)와 소리꾼, 가마꾼(轎軍)이 상주하던 곳이었다. 그래서 비전을 역촌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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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마을 내부전경
남원에서 함양으로 가는 국도에 해발 477m의 여원치가 있다. 연재라고도 불리는 이 여원치 고개는 1894년 동학혁명 당시 남원 접주 김개남 장군이 이끌던 동학군이 처참하게 패한 곳이기도 하다. 운봉의 박봉양(일목장군)은 진주와 함양에서 원병을 받아 방아치(장교리에서 부절리 가말재로 넘는 고개) 전투에서 동학군을 대파했고, 이어 11월 관음치(가동에서 대기리로 넘는 고개)에서 재차 승리해 그 기세를 몰아 남원 동학군을 물리쳤다. 한편 조선 말 동학민중혁명이 동학군에게 참패를 안긴 곳이 또한 운봉이다. 남원을 지나 운봉으로 남상하던 동학군들이 고남산 서쪽 기슭 가말재(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까막재로 표기)에 진지를 구축한, 민관이 힘을 합한 토포군에게 참패를 한다. 운봉읍 장교리의 합민성(合民城)은 이 때 쌀을 저장해 두었던 곳이라 하여 합미성(合米城)으로도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