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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임 할머니의 가족과 친척 이야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T04015
한자 최종임 할머니의 家族과 親戚 이야기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
집필자 장미영

출생과 청년기

1945년 남원 죽항동에서 태어났다. 위로 오빠 한 분이 있었고, 밑으로 남동생 하나와 여동생 하나가 있었다. 2남 2녀 중 큰 딸이다. 당시 명문이었고 지금도 명문인 남원여고를 졸업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농사일이나 집안일을 해 보지 않았다. 친정에서는 비교적 유복하게 자란 편이다.

혼인과 시집살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로는 원불교 교당에서 잔심부름을 하다가 25세가 되어 집안 어른들의 중매로 첫 선을 보았다. 신랑감은 당시 남원 면장 큰아들이었는데 이름은 박창원이다. 신랑은 31세였는데, 호강만 하고 자란 귀공자였다. 신랑감은 인물도 좋고 체격도 좋았다. 그러나 신랑감이 술을 좋아하고 놀기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렇지만 면장 아들이라는 것을 믿고 친정 부모님께서 결혼을 권유했다. 면장 아들이니 기본 재산도 있고 경우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 친정 부모님들의 생각이었다. 당시 신랑은 호주에서 들여 온 양을 키우는 종축장의 관리인이었다.

섣달 28일에 남원에 있는 원불교 교당에서 신식결혼을 하고 택시로 구례 화엄사에 가서 신혼여행을 즐겼다. 3일 동안의 신행을 마치고 시댁으로 들어갔다. 시어머니가 워낙 일을 잘 하고 알뜰하신 분이어서 일 못하는 며느리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결혼과 동시에 집안일뿐만 아니라 온갖 농사일을 배우게 되었다. 시어머니와의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았지만 그것은 며느리가 워낙 일을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아들과 딸을 크게 차별하지 않고 가르쳐주셔서 고등학교까지 나온 것을 밑천으로 새마을 부녀회장을 30년간이나 하고 새마을 동우회회장, 바르게 살기운동, 여성소방대, 새마을연합회장만도 10년 넘게 했다. 이제는 집안일이고 농사일이고 사회일이고 못하는 것이 없게 되었다.

자녀 양육과 출가

결혼 한 다음 해에 친정에서 큰 딸을 낳았다. 친정에서는 ‘곽 산파’라는 사람을 불러 출산을 도왔다. 집에서 이불 위에 비닐을 깔고 아기를 낳았다. 태는 지푸라기에 싸서 고기밥으로 냇물에 띄웠다. 그 뒤로 두 딸과 아들 하나를 더 낳았는데 모두 시댁에서 낳았고 시어머니와 동네 할머니들이 와서 받았다. 자식은 1남 3녀이다.

남편이 술만 먹고 멋만 내고 놀기만 좋아하는 바람에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다. 남편이 가장 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집안 돈만 갖다 쓰는 바람에 생활이 어려웠다. 남편이 미웠지만 아이들을 생각해서 농사일도 하고 공사판일도 하고 보험일도 하고 화장품 판매도 하면서 아이들의 학비를 마련했다.

큰 딸은 부산 산업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애 결혼을 한 뒤 지금 제주도에서 돌하르방 제작을 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큰 딸 애기 둘을 맡아서 키우고 있는데, 지금 초등학교 4학년과 5학년이다. 손주딸이 예쁘기도 하지만 어찌나 말을 함부로 하고 말을 안 듣는지 속상할 때가 많다.

둘째 딸은 부산 산업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야간대학교를 자력으로 나와서 백화점에 근무하다가 지금은 전업 주부로 있다.

아들은 이리 공고를 졸업하고 현재 거제도에 있는 삼성 조선소에 근무 중이다.

막내 딸은 전북대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서울 삼성병원에 간호사로 근무 중이다. 모두 결혼식장에서 결혼을 했다.

통과의례

자식들이 환갑을 챙겨주었다. 환갑 잔치를 하려고 했으나 주변 사람들이 만류했다. 환갑 잔치를 열어 동네 사람들에게 밥 한 끼라도 대접하고 싶은 생각이 많았으나 결과적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폐가 될 것 같아서 환갑 잔치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잔치 대신 자식들이 마련해 준 돈으로 큰 딸과 함께 호주로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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