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T04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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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이은주 아주머니의 家族과 親戚 이야기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 |
집필자 | 장미영 |
출생과 청년기
1960년에 경상남도 거창에서 출생했다. 3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오빠와 함께 남매가 계모를 맞이하게 되었다. 계모는 5남매를 출산했다. 아버지는 건축가였다. 함양 위성국민학교를 졸업했다. 계모가 어려서 남의집살이로 보냈다. 남의 집에서 식모노릇을 하다가 태창기업주식회사라는 청바지 회사에서 일했다. 살기가 너무 힘들어 결혼을 하고 싶었다.
혼인과 시집살이
지금 큰시숙이 되는 분의 중매로 19살 때 선을 보게 되었다. 신랑감은 지능이 약간 모자라는 사람이었다. 신랑감을 보고는 싫다고 했다. 그런데 어른들이 자꾸 권하길래 현재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19살 때 결혼을 감행했다. 신랑 나이는 27살, 이름은 우택구이다.
시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데 무척 힘들었다. 시어머니가 경제권을 쥐고 매 끼니 때마다 쌀을 퍼주고 광의 문을 잠궈버리는 생활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다른 가용의 돈을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첫 아이를 낳고는 매 끼니마다 쌀을 조금씩 모았다. 얼마간 모아지면 쌀을 내다 팔았다. 그렇게 해서 남양분유를 사서 큰 아이에게 먹였다. 젖이 부족하여 아이가 제대로 먹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시어머니는 쉽게 노하고 한 번 노하면 노기가 잘 가라앉지 않는 분이었다. 한 번 삐치면 밥을 먹지 않았다. 살림도 전혀 도와주지 않았다. 9남매의 장남 며느리로서 초등학교 2학년, 4학년 되는 시동생의 도시락을 싸주고 씻겨주고 학부형 노릇까지 했다. 시어머니는 중간에 딸네 집에 가서 딸의 아이들을 키워 주셨다. 그런데 당신의 큰아들 자식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으셨다. 그 와중에 큰 시동생이 사업을 하겠다고 조르는 바람에 결혼반지를 팔아서 돈을 대기도 했다.
시어머니를 비롯한 시댁 식구들이 남편이 지능이 모자란다고 해서 무시하고, 함부로 하는 것이 가장 화가 났다. 동네 사람들까지 남편을 무시했다. 그런 남편의 편에 서서 남편을 지켜주고 싶었다. 아무리 시집살이가 힘들었어도 자식들에게 어머니, 아버지가 있는 가정을 만들어주고 고생을 시키지 않기 위해 참고 살았다.
누구한테 말도 못하고, 친정 부모도 살펴주지 않았기 때문에 혼자 삭이느라 삭였는데, 화병이 들었다. 조금만 신경 쓰면 얼굴로 열이 올라온다. 옛날 이야기만 하면 눈물이 나고, 말로 그 세월을 다 표현할 수 없다.
시어머니가 늙어서는 중풍이 들었다. 시누이가 5이나 있고 아들이 3이나 있어도 시어머니가 풍으로 쓰러지니까 아무도 모시려 하지 않았다. 시어머니의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 입히면서 미운 마음도 많았으나 지금은 더 잘 해드리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1달 정도 대소변을 받아냈다. 이제는 남편과 함께 내외만 산다.
자녀양육과 출가
19살에 결혼하여 20살에 큰 딸을 낳고 23살에 큰 아들을 낳았다. 1남 1녀이다. 가장 노릇을 못하는 남편을 대신하여 논 10마지기를 비롯하여 농사일도 하고, 틈 나는 대로 실 장사, 바늘 장사도 하고, 남의 밭떼기도 하고, 벽돌공장에도 다녔다. 길거리에서 과자 장사도 하고 다슬기도 잡아서 팔았다. 돈이 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부지런히 해서 살림을 꾸려갔다.
딸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국비로 간호사 자격증을 따서 현재 운봉 병원에 근무한다. 거기서 지금의 사위를 만나 결혼하여 잘 살고 있다. 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포크레인 보조기사로 일하고 있는데 아버지처럼 지능이 약간 모자란다. 아들은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
통과의례
먹고 살기도 힘들어 잔치는 하지 못했다. 백일잔치, 돌잔치, 환갑, 칠순, 팔순 때에는 형제간들을 불러 생일날 아침 식사를 같이 하는 것으로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