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162
한자 開港期
이칭/별칭 개화기,근대 전환기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헌주

[정의]

1864년부터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강제 병합당한 시기까지 경기도 남양주 지역의 역사.

[개설]

서세동점의 시대적 변화 속에서도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펼치던 대원군 집권기는 1873년 고종의 친정으로 인해 막을 내렸다. 고종이 집권하고, 메이지 유신 이후 급격한 근대화 팽창 정책을 펴던 일본의 포함 외교가 맞물리면서 1876년 2월에 조선과 일본은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한다. 「조일수호조규」 조약으로 인해 조선은 부산·원산·인천의 3개 항구를 개항하고 일본 화폐의 통용을 허가하는 등 일본과 근대적 통상을 시작했다. 이로써 오랜 기간 중국을 중심으로 한 조공무역 체제에 편입되어 있던 상황에 균열이 생겼다.

이후 조선은 근대화 정책으로 인한 변화와 저항이라는 흐름이 동시에 이어졌다. 개항과 여러 국가들과의 조약 체결, 갑신정변, 갑오개혁은 근대화의 큰 흐름이었고 임오군란과 동학농민전쟁, 의병운동은 근대화에 저항하는 흐름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국왕 고종은 국외 중립과 전제군주제에 입각한 근대화 노선을 채택하였고,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된다. 그리고 광무개혁이라 불리는 일련의 근대화 정책을 시행한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적 변화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한반도에서의 패권을 장악한 일본에 의해 식민지적으로 변용된다. 1905년 을사조약과 통감부 설치, 1907년 정미7조약과 고종 강제 퇴위, 1910년의 대한제국 강제 병합은 일제 식민지화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남양주 지역에도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남양주의 행정구역 개편 과정]

개항기 남양주 지역의 행정구역 변화를 알기 위해서는 양주 지역과의 관계를 조선 시대부터 거슬러 올라가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양주는 1413년 양주도호부로 승격되었고 이후 많은 변화를 거쳐 1506년에 양주목으로 조선 후기까지 지속되었다. 1895년 지방제도 개정 당시 한성부 소속 양주군으로 변경되었고, 1896년 13도제 개정으로 다시 경기도 양주군이 되었고, 1906년 경기도 광주군의 초부면양주군에 편입되었다.

[남양주의 구국운동]

러일전쟁 이후로 일제의 침략이 강해지자 한국인들은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 국권회복운동의 노선은 두 방향이었는데 실력 양성론에 기반한 계몽운동과 무장 투쟁론에 기반한 의병운동이었다. 남양주에서도 두 흐름이 다 존재했다.

먼저 계몽운동의 흐름을 살펴본다. 남양주의 지식인들은 사립학교 설립 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일본에 저항하였다.

남양주 지역의 사립학교는 1906년 2월 통감부 설치 전후로도 꾸준히 이어졌다. 먼저 1906년에 전 군수 정인호가 동흥학교(東興學校)를 건립한 것을 들 수 있다. 그 외에도 1907년 3월에는 정인호와 갈라선 홍태윤과 이철용 등이 일성학교(一成學校)를 설립하였다. 1907년 6월에는 조중응과 구연팔 등의 인물이 봉명의숙(鳳鳴義塾)을 세우기도 하는 등 활발한 사립학교 설립 운동을 벌였다.

일본이 식민지화 과정에서 필요한 재원을 차관으로 도입하려고 하여 대한제국의 대일 부채가 1300여만 원에 이르게 되자 한국인들이 국채보상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남양주 일대에서도 의연금을 모집하였다. 대표적으로 접동면 궁동리와 장생리, 초부면 양수두리와 두릉리, 상도면 수전리 등에서 의연금을 모집하였다.

남양주 지역은 의병운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것은 13도 창의대진소의 활동이 현재의 남양주 지역과 인접해 있는 양주 지역에서 벌어진 것에서도 증명된다. 13도 창의대진소의 인원은 총 48진에 1만 명의 대부대였다. 양주에 집결한 의병부대의 의병장들은 13도 창의대진소의 대장으로 이인영을 추대하였다. 13도 창의대진소 소속 의병의 숫자는 1만여 명이었고 해산 군인과 포군은 약 3,000명 정도였다. 의병 부대의 조직 개편이 끝나자 13도 창의군은 서울 탈환을 위한 작전을 개시했다. 그 기본 구상은 전 병력이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 집결하여 대오를 정비하고 다음 정월을 기하여 서울에 입성한다는 것이었다. 총대장 이인영의 서울 진격 목적은 통감부를 타격하여 이른바 성하(城下)의 맹(盟)을 맺어 신협약으로 불리우는 을사조약과 정미7조약 등을 파기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계획에 의거해 먼저 허위의 선봉대 300명을 파견했다. 허위의 선봉대는 미처 본대가 도착하기 전인 1908년 1월 15일 경에 일본군의 선제 공격을 받고 후퇴했다. 3일이 지나서 이인영이 2,000명의 병력과 함께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 도착하여 후군을 기다렸으나 선봉대의 패배가 준 타격은 컸다. 이런 상황에서 1월 28일 이인영은 아버지의 부음을 접하게 되자 뒷일을 군사장 허위에게 맡기고 문경의 본가로 내려가게 된다. 이인영은 또한 귀향하면서 진격 작전을 중지하라는 통문을 각 의병 부대에 보냈기 때문에 13도 창의대진소의 서울 진격 작전은 중지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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